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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지은 시인의 시 ■ 사물들 & 식물원에 와서 쓰는 동물원 시 & 유기농 엄마 & 혼코노 & 세탁기 연구. 사람은 고쳐 쓰지 말랬지만사물은 몇 번이나 고쳐 쓸 수 있고 사물들   리본과 화분이 약속한다 간이 의자와 테이블이 포옹한다  단골손님과 주인으로 만나 혼인 신고를 마친 보르헤스 전집과 3단 책장  새로 산 우산이 겨울비를 맞는다 계단이 물 자국을 빨아들인다 투명한 창문에 입김을 불어 글씨를 쓴다  오래오래 잘 사세요  부러진 밥상과 스프링이 빠진 볼펜 사람은 고쳐 쓰지 말랬지만 사물은 몇 번이나 고쳐 쓸 수 있고  머리부터 집어넣는 티셔츠의 세계 몸통이 구멍인 빨대의 세계 뜨거워져야 움직이는 엔진의 세계  달력이 1월을 사랑해서 새해가 온다 바퀴가 동그라미를 따라 해서 자전거가 움직인다  컵과 얼음이 만나서 완성되는 여름 구멍 난 장갑이 눈사람의 차지가 되는 겨울  창문에 쓴 글자가 남아 있다  오래오.. 2024. 11. 12.
■ 이영광 시인의 시 ■ 평화식당 & 희망 없이 & 나의 인간 나의 인형 & 밀접 접촉자 & 큰 병원. ♥축하합니다.♥ 2024년 제11회 형평문학상 수상. 이영광 시집, 『살 것만 같던 마음』(창비, 2024) 슬퍼하지 않기 위해 슬퍼할 것    살지 않기 위해 살아갈 것 평화식당      오래전에는 식당에 혼자 가면 미안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젊어서는, 식당에 혼자 가면 받는 홀대에 분개하는 인간으로 바뀌었고요 얼마나 옳았는지 몰라요 쉰이 넘자 다시,식당에 혼자 오면 미안해하는 것으로 돌아왔습니다 벌레처럼요 얼마나 옳은지, 몰라요 얼마나 미안한지......     기뻐하지 않기 위해 기뻐할 것    자랑하지 않기 위해 자랑할 것    옳지 않기 위해 옳을 것    옳음의 불구처럼 옳을 것     구가하지 않을 것     가난하지 않기 위해 가난할 것    분개하지 않기 위해 분개할 것    미안하지 않기.. 2024. 11. 11.
■ 김이듬 시인의 시 ■ 입국장 & 법원에서 & 간절기 & 리얼리티 & 저지대. 축하합니다!!! 2024년 제1회 신격호 샤롯데문학상 시 부문(푸쉬킨문학) 대상 수상, 김이듬, 『투명한 것과 없는 것』(문학동네, 2023)  그녀에게 나는 이 도시를 어떻게 설명할까  자동차가 아닌, 사람의 도시라고  최소한 총성이 울려퍼지지는 않는다고 덧붙일까입국장     미국 국적 친구를 기다린다  심야 공항 터미널은 지나치게 환하다   그녀에게 이 도시를 어떻게 소개할까   순수하기 때문이 아니라, 복잡하고 불완전하며  폐허가 된 건물들의 더미이기 때문에 사랑한다고  파무크처럼 고백할 수 있을까   맞은편 의자에 앉아 통화하는 사람은 미소를 띤다  왼쪽 옆으로는 불매운동중인 제과업체의 체인점이 있다  빵공장 기계에 끼여 숨진 노동자의 얼굴이 어른거리고  플라스틱 빵처럼 내 표정은 굳어 있다   .. 2024. 11. 10.
『현대시』 11월호-2024년 등단 시인 특집 2부: 「교차빛」(엄시연), 「일지 1」(이실비), 「네 지네는 아름답다」(이정화), 「식사食思」(장대성), 「체인질링」(추성은), 「짐」(한백양). 교차빛-엄시연     00.      시간은 길을 잃은 지 오래. 눈을 떠도 잠이 왔고 눈을 감아도 잠이 왔다. 초인종을 뜯어놔도 귀에서 벨이 울린다. 밀린 잠은 보름을 새도 갚기가 힘들었다. 나에게 맡겨진ㄴ 글들이 너무 많았다. 잉태의 의무 무거운데 잠이 찾아왔다. 계속해서 계속. 수천 번째 지속되는 날들.    하지만 이제는 일주일도 남지 않았다. 모든 게 끝나기까지 모든 게 다시 시작되기까지. 아직 나에게 남은 것들이 많았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분출하는 감정을 사용하기로 했다. 나는 어쩔 수없이 어쩔 수 없이     어쩔 수 없이.     그러니까 이건 한 번만 봐 달라고 말하는 겁니다.    손가락을 부드럽게 꺾어 나를 깨워주세요. 내겐 고통이 필요해요.    수면제도 푸른 소금물도 커터칼.. 2024. 11.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