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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시인들

■ 김소연 시인의 시 ■ 흩어져 있던 사람들 & 촉진하는 밤 & 그렇습니다 & 문워크 & 식량을 거래하기에 앞서

by 시 박스 2024. 7.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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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집-픽셀스>

 

  근데 말벌은 어디 있지?

 

  뿔뿔이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벌집을 에워싸며

 

  처음으로 가까이 모여들었다

 

흩어져 있던 사람들

 

 

  선생님 댁 벽난로 앞에서 나는 나무 타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누군가 사과를 깎았고 누군가

 

  허리를 구부려 콘솔 위의 도자기를 자세히 보았다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나무 타는 소리가

 

  빗소리에 묻혀갔다 누군가 창 앞으로 다가가

 

  뒷짐을 지고 비를 올려다보았고 누군가

 

  그 옆으로 다가갔다

 

  뭘 보는 거야?

 

  비 오는 걸 보는 거야?

 

  선생님 댁 벽난로에서 장작 하나가 맥없이 내려앉았다

 

  다 같이 빗소리 좀 듣자며 누군가 창문을 활짝 열었다

 

  그때 말벌 한 마리가 실내로 날아들었다

 

  누군가 저것을 잡아야 한다도 소리쳤지만 모두가

 

  일제히 어깨를 움츠렸다 처마 밑에 벌집이 있는데요?

 

  119를 불러서 태워야 하지 않을까요?

 

  누군가 선생님을 처마 아래로 불러 세웠고 누군가는

  

  날아다니는 말벌만 쳐다보았다

 

  겨울이 되면 말벌이 떠나고 빈집만 남는댔어

 

  가만히 기다리면 적의 목이 떠내려온다구

 

  선생님 댁 벽난로에서 나무 타는 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누군가 내 옆에 와 앉으며

 

  말벌의 독침은 연사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 옆에 다가와서 누군가는 어린 시절 벌에 쏘인

 

  이야기를 했다 선생님은 2층으로 올라가서

 

  벌집을 들고 내려왔다 이건 작년 겨울에

 

  처마 밑에 있던 거야 조금만 기다리면

 

  저 벌집도 내 차지야

 

  벌집은 정말로 육각형이었다

 

  까끌까끌했지만 보석 같았다

 

  근데 말벌은 어디 있지?

 

  뿔뿔이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벌집을 에워싸며

 

  처음으로 가까이 모여들었다

 

  모두의 얼굴을 둘러보며 선생님은 빙그레 웃었다

 

  말벌이 나타나지 않았으면 어쩔 뻔했어?

 

  선생님은 2층에 벌집이 하나 더 있다며 다시

 

  2층으로 올라갔다

  <  >

 

마룻바닥처럼

  납작하게 누워서

  바퀴벌레처럼 어수선히 돌아다니는 추억을 노려보다

  저걸 어떻게 죽여버리지 한다

 

 

촉진하는 밤

 

 

  열이 펄펄 끓는 너의 몸을

  너에게 배운 바대로

  젖은 수건으로 닦아주느라

  밤을 새운다

 

  나는 가끔 시간을 추월한다

  너무 느린 것은 빠른 것을 이따금 능멸하는 능력이 있다

 

  마룻바닥처럼

  납작하게 누워서

  바퀴벌레처럼 어수선히 돌아다니는 추억을 노려보다

  저걸 어떻게 죽여버리지 한다

 

  추억을 미래에서 미리 가져와

  다 풀어놓기도 한다

  능멸하는 마음은 굶주렸을 때에 유독 유능해진다

 

  피부에 발린 얇은 물기가

  체온을 빼앗는다는 걸

  너는 어떻게 알았을까

 

  내가 열이 날 때에 네가 그렇게 해주었던 걸

  상기하는 마음으로

  밤을 새운다

 

  앙상한 너의 몸을

  녹여 없앨 수 있을 것 같다

  너는 마침내 녹을 거야

  증발할 거야 사라질 거야

  갈망하던 바대로

  갈망하던 바대로

 

  창문을 열면

  미쳐 날뛰는 바람이 커튼을 밀어내고

  펼쳐둔 책을 휘뜩휘뜩 넘기고

  빗방울이 순식간에 들이치고

  뒤뜰 어딘가에 텅 빈 양동이가

  우당탕탕 보기 좋게 굴러다니고

  다음 날이 태연하게 나타난다

  믿을 수 없을 만치 고요해진 채로

  정지된 모든 사물의 모서리에 햇빛이 맺힌 채로

  우리는 새로 태어난 것 같다

 

  어제와 오늘

  사이에 유격이 클 때

  꿈에 깃들지 못한 채로 내 주변을 맴돌던 그림자가

  눈뜬 아침을 가엾게 내려다볼 때

 

  시간으로부터 호위를 받을 수 있다

  시간의 흐름만으로도 가능한 무엇이 있다는 것

  참 좋구나

 

  우리의 

  허약함을 아둔함을 지칠 줄 모름을

  같이 오류를 반복하는 더딘 시간을

  이 드넓은 햇빛이

  말없이 한없이

  북돋는다

  <  >

 

응, 듣고 있어

  그녀에게 들리든 들리지 않든

  그 사람과 나는 그녀에게 이 말을 해놓고서 기다렸다

  그녀가 한 번쯤 이쪽을 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응, 듣고 있어

  그녀가 그 사람에게 해준 마지막 말이라 했다

  그녀의 말을 듣고 그 사람이 입술을 조금씩 움직여 무

슨 말을 하려 할 때

  그 사람은 고요히 숨을 거두었다고 했다

 

  다른 이야기를 하다가 그녀는

  다시 그 이야기를 했고 한참이나 다른 이야기를 하다

가 또다시

  그 이야기를 반복했다

 

  다른 말을 했어야 한다고 그녀는 여기는 듯했다

  겨우 그런 말이 그 사람과의 마지막 말이라는 것을 안

타까워하는 듯했다

  그것 때문에 그 사람의 마지막 모습을 자꾸 생각하게 

되는 듯했다

 

  나는 다른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 비친 우리의 머그잔과 머그잔 속 커피에

비친

  등불 같은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응, 듣고 있어

  응, 듣고 있어

  그녀에게 이 말을 하면서 나는 자꾸 다른 곳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먼 곳으로 가게 되었을 때 그 사람과 나는

  나란히 앉아 그녀를 안타까이 바라보며 입술을 열었다

  그 사람이 그녀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응, 듣고 있어

  그녀에게 들리든 들리지 않든

  그 사람과 나는 그녀에게 이 말을 해놓고서 기다렸다

  그녀가 한 번쯤 이쪽을 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  >

 

 누군가가 두 팔을 벌린 채

  내 등을 안아주려고 서 있는 데까지

  무사히 도착하고 싶다

 

문워크

 

 

  텅 빈 종이 봉지가 유유히 날아간다 텅 빈 주차장을 만

끽하는 것 같다

  저쪽 끝에서 이쪽 끝까지, 몇 번의 스텝으로 유유히

  "뭐 하니" 하고 나에게 다가오는 것 같다

  그리고 저녁이 내려오고 있다

 

  보였던 것들이 하나씩 지워지고 있을 뿐인데도 무언

가가

  끝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뒤로 걷고 싶다

  차차 누군가를 지나치고

  차차 누군가의 등을 잠시 바라보고

  차차 누군가가 멀어지고

  차차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면서

 

  누군가가 두 팔을 벌린 채

  내 등을 안아주려고 서 있는 데까지

  무사히 도착하고 싶다

 

  그는 저 멀리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다

  "그쪽으로 가지 말고 이리 와봐" 하면서

  영원히 나를 기다린 것 같다

 

  물론 앞으로 걸어도 좋을 것이다

  기다리는 사람은 멀리 있고 그를 조금 더 모른 척한다

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을 것이다

  물론 좋을 것이다 앞으로는 걷는 게 덜 우스꽝스러울 테

니까

 

  나는 대체로 눈앞에 있는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했고

  그래서 대체로 혼자 있고 싶어 했으니까

  지금부터 뒤로 걷는 거다 부드러운 스텝으로 저쪽 모

퉁이까지 그리고 모퉁이를 돌아

  구두를 벗고 재킷을 벗고 콧수염을 떼는 거다

  <  >

 

'끝까지'라는 것은 끝에 대하여

상상을 하고 있을 때에나 가정할 수 있을 뿐, 그럴듯하기

만 하고 그럴 리 없는

 

식량을 거래하기에 앞서

 

 

  어둠은 어두워야 한다

  암막 커튼을 닫아도

  실내에 남은 빛 

 

                                                                                     너는 

                                                             밝음은 밝아야 한다

               는 문장을 내가 쓸까 봐 미리 고개를 돌리고 있다

 

                                                         어둠에 대해 말했다면

                          어둠을 끝까지 노려보며 쓰기를 바라면서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렇게 할 수 없어서는 아니다

 

  이미 내가 어둠이 되었기 때문이다

  끝까지 갈 때마다 끝은 없다 끝을 번번이 지나친다 끝

은 사라질 수밖에 없다 '끝까지'라는 것은 끝에 대하여

상상을 하고 있을 때에나 가정할 수 있을 뿐, 그럴듯하기

만 하고 그럴 리 없는

  순진하고 어여쁜 소꿉놀이

 

                                                   살아서 그곳에 가보라고?

                                                       같이 가지는 않으면서?

                             그게 그렇게 좋으면 네가 가면 될 텐데? 

 

  좋은 소식 전할게

  네가 바라던 건 아닐 테지만

  다른 측면에서

  기뻐해주길

 

  별빛이 새어들어 미량의 빛이

  벼랑 끝에 카펫처럼 걸쳐 있다

  까마귀처럼 나는 그곳에 날아가 앉는다

 

  이렇게 써두고 나는

  바깥으로 나가려고 문을 연다

  나를 관조하던 네가

  사라진 게 기뻐서

 

  걸어둔 외투가 나를 모방하는

  밤에

 

  어둠이 와도 나보다는 어두울 리 없는

  밤에

  밤을 내디딘다

  <  >

 

 

김소연 시인: 1993년 《현대시사상》에 「우리는 찬양한다」 등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 시작. 
시집, 『극에 달하다』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 『눈물이라는 뼈』 『수학자의 아침』 『i에게』 『촉진하는 밤』 등이 있다. 노작문학상, 현대문학상, 이육사시문학상, 현대시작품상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