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회 김만중문학상 신인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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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지랄은 세련된 것.
병법 없이는 사랑할 수 없다.
너는 나의 편견이다.
대자연과 세계적인 슬픔
액상의 꿈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를 매달고, 생시의 문턱
을 넘는다.
애인의 악몽을 대신 꿔 준 날은 전화기를 꺼 둔 채 골
목을 배회했다. 그럴 때마다 배경음악처럼 누군가는 건반
을 두드린다.
비로소 몇 마디를 얻기 위해 침묵을 연습할 것. 총명한
성기는 매번 산책을 방해한다. 도착적 슬픔이 엄습한다.
나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부모에게서, 향정신성 문
장 몇 개를 훔쳤다.
아름다웠다.
괘씸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경외한다. 우리들의 객쩍음에.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이유 없이 사람을 살릴 수도 있다. 나의 지랄
은 세련된 것. 병법 없이는 사랑할 수 없다. 너는 나의 편
견이다.
불안과의 잠자리에서는 더 이상 피임하지 않는다. 내가
돌아볼 때마다 사람들은 온갖 종류의 비극을 연기한다. 우
울한 자의 범신론이다. 저절로 생겨난,
저 살가운 불행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럴 때마다 생
은 내 급소를 두드린다.
나와 나의 대조적인 삶.
길항하는,
꼭 한 번은 틀리고 말던 아름다운 피아노 소리.
고통의 규칙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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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응달 위에 서서
슬픔에 가려진 내 뒤안길을
오래오래 기다렸다.
해피엔드
연애 같은 소일거리를 해 주고 푸른 찰과상 무늬 몇 닢을 받는다. 아직 나를 떠나기 전, 너는 알몸으로 내 구겨진 길 몇 갈래를 다려 주었지만, 한 번쯤 주저앉지 않기란 어려운 일. 사람들은 순조로운 삶에 적선할 줄을 모르고, 행복을 위해 누군가는 버려져야 한다. 어린 내가 길어다 준 시절의 수면 위로 나보다 먼저 살다 간 새를 보았다. 이 투명하고 시린 꿈 한 사발로 목마른 여생을 축인다. 바람에 묶인 풍향계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멈춰 있고, 나는 이러한 예측할 수 없는 소수자의 절경이 무척 마음에 든다. 따뜻한 응달 위에 서서 슬픔에 가려진 내 뒤안길을 오래오래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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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처럼 취할 거다.
꼬인 인생은 꼬인 혀로 말해야 하니까.
나는 왜 이리 매사에 시적인지를
곰곰이 생각했다.
그 후
슬픔을 경제적으로 쓰는 일에 골몰하느라 몇 계절을
보냈다.
나를 위탁할 곳이 없는 날에는 너무 긴 산책을 떠난다.
목줄을 채운 생각이 지난날을 향해 짖는 것 하며, 배변하
는 것까지 묵묵히 지켜보았다.
그건 거의 사랑에 가까웠지만, 결코 사랑은 아니었다는
식의 문장을 떠올려본다. 모든 불행은 당신과 나의 욕구
가 일치하지 않는 데서 온다.
병구완이라도 하듯 아침과 저녁은 교대로 나를 찾아왔
다. 한마디 상의도 없이.
좋은 냄새가 나는 아기를 안아 주고, 도닥여 준다. 아기
를 좋아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아름다운 것은 인생이 아니라 기어코 비극적이려는, 고
삐 풀린 그것을 길들이는, 인간이다.
집에 놀러 온 신은 내 일기를 들춰보다가, "신이란 신은
죄다 불량품인지, 뭘 가지고 놀든 작동이 잘 안 돼서"라
는 구절을 보고 표정이 굳어진다. 그러나 그쪽이 인생에
관여하는 건 너무 이상한 일이라고. 시는 시일 뿐이라고.
친구는 집을 샀다고 했다. 나는 아직 내 명의로 된 단어
하나 갖지 못했다.
폴리아모리를 알게 된 뒤로는 사랑 같은 거, 시시해져
버렸다. 통념 안에서 목숨 거는 일이 죄다 촌스러워졌다.
나를 위협하는 사람을 간발의 차로 따돌리고 꿈 밖으
로 나온다.
당신이 떠난다고 했을 때, 나는 작고 둥그런 불가항력
을 입안에 넣고 굴리며, 잠시 슬퍼졌다. 오래 만나야만 가
질 수 있는 슬픔이 있고, 그 슬픔 하나를 빚은 것은 우리의
기쁨이다. 그리움에 녹이 슬었다.
원하는 걸 가질 방법이 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걸 꼭 취하고 싶다. 원하는 걸 갖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기 위해.
개처럼 취할 거다. 꼬인 인생은 꼬인 혀로 말해야 하니
까.
나는 왜 이리 매사에 시적인지를 곰곰이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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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앞에는 네가 던져 준 붉은 고깃점 한
조각이 놓여 있다.
흙먼지 묻은 슬픔을 오랫동안 내려다본다.
젖빛유리 너머
잎이 지는데 나, 아무렇지도 않다.
머리에 책갈피를 끼워 넣고, 그리운 너는 잠시 덮어 둔다.
수요가 없는데 생은 자꾸만 모자랐다.
노랫말을 붙이지 않은 시간이 모호하게 흐르고, 아버지
는 이제 어린애처럼 울고 계시다.
내 앞에는 네가 던져 준 붉은 고깃점 한 조각이 놓여 있
다.
흙먼지 묻은 슬픔을 오랫동안 내려다본다.
나는 어쩌다 인격을 가져 버린 개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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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너를,
사력을 다해 기억하려 한다.
400번의 구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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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가에 버려진 거울 속에는 나, 그리고 지나가는 여자가 하나. 너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너를, 사력을 다해 기억하려 한다. 너는 생각나는 것이 있으면, 맥락을 개의치 않고 불쑥 뱉어 버리고는 했던 사람. 나 어느 날엔가 나도 모르게, 흘러들어 간 거리에서 가만히 서 있을 때, 문득 네가 나를 우연히 호명했다는 생각. 불시에 너는 낯선 길 위에 나를 불러 세운다. 꾸지람을 듣는 기분으로, 아름답지는 않고 낯설기만 한 방식으로 멈춰 있다. 좋은 사람과 좋아하는 사람을 구별해야 한다. 동시통역이라도 하듯 네가 말할 때마다 새가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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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너의 집에 앓아누웠을 때, 너는 조용히 배숙을 달인다.
네가 너처럼 여윈 살림을 뒤져 밥상을 들여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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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너의 집에 앓아누웠을 때, 너는 조용히 배숙을 달인다. 네가 너처럼 여윈 살림을 뒤져 밥상을 들여온다. 아직은 네가 나를 사랑하던 날들이고, 떨어진 꽃잎들은 여전히 붉던. 다시, 찬바람이 기억들을 여민다. 걱정과는 다르게, 우리가 헤어져야 할 이유는 많았어. 너는 꼭 원치 않게 낳은 아이 같다. 어쩌다가 너는 나를 구원해 버렸니? 너를 위해 쓴 시를 설명해야 하는 것이 슬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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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포장지도 뜯지 않았는데/ 그대로 낡아 버린 새 물건이 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누군가 틈틈이 꺼내서 사용하고,/ 다시 몰래 넣은 흔적이 역력하다.
누구라도 사용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새것이면서 더는 새것이 아닌 그것을 본다.
내 것이면서 더는 내 것이 아닌 그것을 본다.
세계의 양심을 꾸짖기 어려웠다.
박민혁 시인: 2017년 현대시를 통해 등단. 첫 시집 《대자연과 세계적인 슬픔》(파란, 2021)으로 제13회 김만중문학상 신인상(시)을 수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