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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시인들

■ 정다연 시인의 시 ■ 비밀 & 사실과 진실 & 빨래 & 밑줄 & 산책

by 시 박스 2024. 10.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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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래 말리기_by. Daniil Kondrashin _pexel

 

누군가에게 비밀은

  버려야 살 수 있는 거

  누군가에게 비밀은

  간직해야 살 수 있는 거

비밀

 

 

 

  이건 내 비밀이야

 

  아무 사이도 아닌데 한 아이가 말했다

  앞으로 영원히 마주칠 일 없다는 듯이

 

  다행히 그 말을 하고 가는 아이의 표정은

  한결 가벼워진 듯했는데

  나는 끙끙 앓았다

  그 비밀이 무거워서

 

  한여름에 혼자서 물이 가득 찬 어항을 옮기는 것 같았다

 

  새어 나가면 안 되는데

  실수로 깨뜨리면 안 되는데

  비밀 안에서 물고기들이 평화로워야 하는데

 

  나 때문에 잘못될까 봐

  껴안고 있었다

 

  만약 그때 널 불러 세웠다면 어떻게 됐을까?

  실은 나도 너와 같은 일을 겪었어

  그런데도 살고 있어

  말했다면

 

  누군가에게 비밀은

  버려야 살 수 있는 거

  누군가에게 비밀은

  간직해야 살 수 있는 거

 

  어느 쪽이든 덜 아픈 건 아닐 거야

  <  >

 

 

멀어지는 게 두려워서

  전처럼 내 이야기를 꺼내지 못한 건데

  마음이 다칠까 봐 겁이 나서

  잠깐 거리를 두려고 했던 건데

사실과 진실

 

 

 

  억울하다고

  울음을 터뜨린 적 있다

 

  멀어지는 게 두려워서

  전처럼 내 이야기를 꺼내지 못한 건데

  마음이 다칠까 봐 겁이 나서

  잠깐 거리를 두려고 했던 건데

 

  침묵이 이렇게 오해만 낳을 줄 몰랐어

 

  아파하는 내게

  윤주는 사실과 진실이라는 단어를 보여 줬다

 

  사실은 있었던 일 겉으로 드러난 일

  진실은 아무것도 덧씌워지지 않은 그대로의 마음

 

  사람들이 진실을 안다면

  널 오해할 수 없을 거야

 

  나는 진실을 알아

  너의 진심을 알아

 

  사실과 진실

  진실과 사실

 

  한 글자 차이로

  뒤틀리고 어긋나는

  그런 복잡한 거 말고

 

  한 사람

 

  한 사람이 옆에 있다는 게

  너무 깨끗해서

  엉엉 울었다

  <  >

 

 

온종일 운동장을 뒹굴었던 마음도

  주르륵 흘렀던 외로움도

  희미하게 옅어질 것 같은 기분

빨래

 

 

 

  따뜻한 물에서

  교복 와이셔츠를 꺼내 비누칠한다

 

  어디서 이렇게 많은 때가 묻었지?

  흘러나오는 구정물을 본다

  겉보기엔 깨끗한 거 같았는데

 

  잘 보이지 않던 얼룩과

  올올이 달라붙은 먼지까지

  한꺼번에

  녹는 중인가 보다

 

  와이셔츠를 뒤집는다

  겉과 안이

  시원하게 뒤집힌다

 

  더운 수증기가 뿌옇게

  얼굴에 닿을 때마다

 

  온종일 운동장을 뒹굴었던 마음도

  주르륵 흘렀던 외로움도

  희미하게 옅어질 것 같은 기분

 

  축 늘어진 교복을 턴다

  물방울이 날며 흩어진다

 

  햇볕에 말리면 가벼워진다

 

  걸어도 무겁지 않겠다

  <  >

 

 

다만 어둠 속에서 펼치게 되는 이야기였으면
침을 묻혀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딧불이 빛처럼 얼룩이 묻는 책이었으면

밑줄

 

 

 

  누가 나를 읽어주면 좋겠다 어디 사는 누구인지 몰라도

괜찮으니까 다만 읽어 줬으면

 

  처음부터 끝까지 정자세로 읽지 않아도 된다 어떤 과거

를 지나왔는지 누굴 미워하는지 완벽하게 서사를 이해하

지 않아도 된다 여름이면 고즈넉한 자귀나무 아래서 바람

이 넘겨주는 페이지를 따라 훨훨 건너가도 내가 듣지 못

해도

 

  웃기는 대목에서 깔깔 웃어 주고

  엎어져서 무릎이 깨지면

 

  일어날 수 있어, 주문처럼 중얼거려 주고 나도 그랬던

적 있어. 문장에 밑줄 확 그어 주고

 

  눈에 잘 보이는 곳에 두지 않아도 된다 죽기 전에 꼭 읽

어야 하는 책이 되지 않아도 된다 다만 어둠 속에서 펼치

게 되는 이야기였으면 침을 묻혀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반

딧불이 빛처럼 얼룩이 묻는 책이었으면

 

  어떤 이야기는 누군가 넘겨줘야 다음 장으로 넘어갈 수 

있으니까

  <  > 

 

 

 네 생각은 조금 무섭지 함부로 발을 디뎠다가는
그 안으로 굴러떨어질까 봐 다가갈 수 없지

산책

 

 

 

  네 생각은 날 의자에 앉혀 두지 않지 이마를 짚어 주지

않지 네 생각을 하는 동안의 책 읽기를 허락하지 않지

 

  나는 자주 산책줄을 놓치지 네 생각과 걸으면 나는 비 맞

은 우체통을 놓치고 편지를 잃어버리고 엉뚱하게도 불 꺼

진 상점 유리창에서 발견되지

 

  네 생각은 조금 무섭지 함부로 발을 디뎠다가는 그 안으

로 굴러떨어질까 봐 다가갈 수 없지 나는 사실 두려워 네

생각 앞에 서는 게 그걸 두드려 보는 게

 

  역시 그 안엔 내가 없구나 알게 되는 게

 

  네 생각은 네 생각을 하는 동안의 풍경을 허락하지 않지

다른 사람의 재밌는 농담을 듣지 못하게 하고 버스에 우산

을 두고 내리게 하지

 

  고인 빗물에 목욕하는 새

 

  부서지는 빛

 

  분명 혼자인데 너와 본 것처럼 만들지

  <  >

 

 

정다연 시인: 2015년 《현대문학》 신인 추천 시 부문에 당선. 시집 『내가 내 심장을 느끼게 될지도 모르니까』 『서로에게 기대서 끝까지』 『햇볕에 말리면 가벼워진다』. 산문집 『마지막 산책이라니』 등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