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시인들

■허수경 시인의 시 ■ 나의 도시 & 비행장을 떠나면서 & 슬픔의 난민 &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시 박스 2024. 7. 28. 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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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도시

 

 

 

  나의 도시들 물에 잠기고 서울 사천 함양 뉴올리언스 사이공 파

리 베를린

  나의 도시들 물에 잠기고 우울한 가수들 시엔엔 거꾸로 돌리며

돌아와, 내 군대여, 물에 잠긴 내 도시 구해달라고 울고

 

  그러나 나의 도시들 물에 잠기고 마치 남경 동경 바빌론 아수르

알렉산드리아처럼 울고

  도서관에서는 물에 잠긴 책들 침묵하고 전신주에서는 이런 삶이

끝날 것처럼 전기를 송신하던 철마도 이쑤시개처럼 젖어 울고

 

  나의 도시 안에서 가엾은 미래를 건설하던 시인들 울고 그 안

에서

  직접 간접으로 도시를 사랑했던 무용수들도 울고 울고 울고

 

  젖은 도시 찬란한 국밥의 사랑

  쓰레기도 흑빛이었다가 흰빛이었다가 보랏빛 구릿빛 빛 아닌

살갗이었다가

  랩도 블루스도 기타도 현도 방망이도 철판도 짐승의 가죽으로

소리 내던 북들도 젖고

 

  유전인자 관리하던 실험실도 잠기고 그 안에서 태어나던 늑대

들도 잠기고

  나의 도시 나의 도시 울고 그 안에서 그렇게 많은 전병이나 만

두를 빚어내던 이 방의 식당도 젖고

 

  생선국 끓이던 솥도 고기 튀기던 냄비도 젖고 젓가락 숟가락 사

이 들락거리던 버스도 택시도 어머니, 연을 끊지요,라는 내용이

든 편지도 젖고

 

  나의 도시 나의 도시 잠기고 물에 들어가면서도 고무신 하나 남

기지 않고

  나의 도시 도시의 장벽마다 색소병을 들고 울던 아이들도 젖고

 

  나의 도시 나의 도시 당신도 젖고 매장당한 문장들 들고 있던

사랑의 나날도 젖고

  학살이 이루어지던 마당도 폭탄에 소스라치던 몸을 쟁이고 있던

옛 통조림 공장 병원도 젖고

  죄 없이 병에 걸린 아이들도 잠기고

  정치여, 정치여, 살기 좋은 세상이며, 라고 말하던 사람들 산은

로 올라가다 잠기고

 

  물 위에 뜬 건 무의식뿐, 무의식뿐,

  건덩거리는 입술을 위로 올리고 죽은 무의식뿐

  <  >

 

 

비행장을 떠나면서

 

 

 

  비행장을 떠나면서 나는 울었고 너도 울었지

  비행장을 떠나면서 사람들은 커피를 마시며 우울한 신문들을

읽었고

  참한 소설 속을 걸어 다니며 수음을 했지

  사랑이 떠나갔다는 걸 알았을 때 사람들의 가슴에서는 사막이

튀어나왔는데

  사막에 저리도 붉은 꽃이 핀다는 건 아무도 몰라서 꽃은 외로

웠지

 

  비행장을 떠나면서 사람들은 테러리스트들을 향해 인사를 했고

  비행장을 떠나면서 지상에 쌓아놓은 모든 신문들에게 불안한

악수를 청했어

  울지 마,라고 누군가 희망의 말을 하면

  웃기지 마, 라고 누군가 침을 뱉었어

 

  21세기의 새들은 대륙을 건너다가 선술집에 들러 한잔했지

  21세기의 모래들은 대륙과 대륙에 새 집을 짓다가 초밥집에 들러

  차가운 생선의 심장을 먹었어

 

  21세기의 꽃게들은 21세기의 모기들은 21세기의 은행나무들은

  인사를 하지 않는 시간을 위해 오랫동안 제사를 지냈지

  21세기의 남자들은 21세기의 여자들은 아이들은 소년과 소녀

들은

 

  비행장을 떠나면서 사랑이 오래전에 떠난 사막에 핀 붉은 꽃

을 기어이

  보지 못했어, 입술을 파르르 떨며 꽃이 질 때

  비행장을 떠나면서 우리들은 새 여행에 가슴이 부풀어

  헌 여행을 잊어버렸지, 지겨운 연인을 지상의 거리, 어딘가에

세워두고

  비행장을 떠나면서 우리들은 슬프면서도 즐거웠지

  <  > 

 

 

슬픔의 난민

 

 

 

  가녀린 손가락을 가진 별 같은 독서의 시절은 왔다 세계룰 읽다

보면 이건 슬픔으로 가득 찬 배고픔으로 억울한 난민의 역사 같아

서 빛 속에서 나던 냄새를 맡으며 세계를 여행하는 저 어린 새들에

게 아버지 아버지 날 버리세요 하면서 나는 눈을 감았다

 

  아직 죽지 않은 신들 가운데 제일도 다정하던 노을이라는 신이

나에게 달력을 내밀었을 때 달력에는 술잔만 가득했고 아프리카

를 떠나서 막 유럽의 해변으로 들어오던 작은 배의 난간을 붙들

고 어떤 남자가 살려달라고 살려달라고 데리고 가달라고 가달라

고 울부짖었다

 

  저 지중해에 비명이 없었다면 대륙의 살갗에 거친 몸을 들이대

는 배들은 아마도 지중해에서 영혼을 팔았을 터, 저 남해에 소금

처럼 아스라하게 널려 있는 섬이 없었다면 우리는 울음을 몰랐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데

 

  슬픔은 언제나 가늘게 떨린다 늙은 슬픔만큼이나 가늘게 떨면서

삭아내리는 것도 없다 아주 젊은 슬픔은 격렬하나 가늘게 떨리

면서 새벽에 엎드려 있다가 해가 나오면 말라죽는다 아주 오랫동

안 슬픔은 가을의 바다 장미처럼 오랫동안 말라가는 하늘 아래 서

있다 팔랑거리는 잠자리의 날개가 가늘게 공기의 핏줄을 건드리

고 갈 때 지는 장미의 그늘 아래 그렇게 조금은 나이가 더 든 슬픔

이 쪼그려 있다가 밥하러 들어갔다 남자의 비명이 아프리카에서

넘어들어왔다 해맑은 밥에 따뜻한 눈물 한 방울 어려 있다 누군가

나에게 건네주는 난민의 일기장 같다

  <  >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이름 없느 섬들에 살던 많은 짐승들이 죽어가는 세월이에요

 

  이름 없는 것들이지요?

 

  말을 못 알아들으니 죽여도 좋다고 말하던

  어느 백인 장교의 명령같지 않나요

  이름 없는 세월을 나는 이렇게 정의해요

 

  아님, 말 못 하는 것들이라 영혼이 없다고 말하던

  근대 입구의 세월 속에

  당신, 아직도 울고 있나요?

 

 

  오늘도 콜레라가 창궐하는 도읍을 지나

  신시(新市)를 짓는 장군들을 보았어요

  나는 그 장군들이  이 지상에 올 때

  신시의 해안에 살던

  도롱뇽 새끼가 저문 눈을 껌벅거리며

  달의 운석처럼 낯선 시간처럼

  날 바라보는 것을 보았어요

 

  그때면 나는 당신이 바라보던 달걀 프라이였어요

  내가 태어나 당신이 죽고

  죽은 당신의 단백질고 기름으로

  말하는 짐승인 내가 자라는 거지요

 

  이거 긴 세기의 이야기지요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의 이야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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