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심은섭 시인의 시 ■ 백일홍나무 아래에서의 고백 & 아내& Y셔츠 두 번째 단추을 끼울 때 & 경주 김씨 달안의 딸 & 7번 국도
< >
백일홍나무 아래에서의 고백
해당되는 것에 O표 하시오
순종이다 흰 그림자이고 새벽에 배달된 과즙이다 흔들
려야 정오를 기억하는 시계추다 수평선에 걸터앉아 인간
의 비극의 기원이 어딘지를 찾는 0시의 태양이다 겨울 동
안 찬바람에 살찐 얼음일 뿐이다 기침하는 사랑방으로 보
낸 장문의 편지이고, 터진 슬픔을 꿰매는 상처의 바늘이다
막다른 골목의 계단을 쌓는 미장공이다 어는 날엔 살아
있는 사육신이었고, 꽃을 피우는 일이 혁명이 아니라고 귀
를 잘라버린 봄이다 고독한 오후를 되새김길하는 낭만의
양 떼, 단추처럼 붙어사는 나는 백일홍나무 아레에서 하
늘을 쳐다본다
어느 곳 하나 O표 할 데 없다
< >
아내
얼굴은 하얀 목련이지만 뒷모습은 사월 초파일이다 나
와 함께 한 방향으로 기관총을 쏘는 총잡이다 내가 마른
강물로 흐를 때면 기우제를 지내주는 제사장이고 대기
권을 이탈하는 유성을 바라보며 서로 슬픔을 수혈하기도
했다
때로는 통기타 1번 선의 C단조였가가 내가 어둠의 깃
발로 펄럭일 때 푸른 새벽을 불러주었다 붉은 장미꽃이
지천으로 핀 5월이면 초병의 눈초리고 경계를 강화하지만
10월이 오면 어김없이 황금불상의 미소를 건네는 능금이
다
오랜 생의 전투로 사기가 저하된 패잔병인 줄로 알았으
나 탄알이 장전된 38구경 6연발 권총 한 자루였다 단단
한 몇 개의 고독이 실밥이 터진 나의 정신을 향해 조준사
격을 가할 때마다 내 손을 잡고 함께 군가를 불러주는 전
우였다
< >
Y셔츠 두 번째 단추를 끼울 때
옷소매를 통과하던 두 팔이 달아나고, 그 자리에 달의
뒤편으로 뻗어가던 내 어둠이 채워졌다 그 어둠 속에서
누가 나를 집어삼키고 내 손금마저 사용하고 있었다 나
는 시나브로 아침을 통과하지 못한 저녁으로 자랐다
Y셔츠 두 번째 단추를 끼울 때 폐경의 꽃이 하혈을 했
다 그는 마지막 숨을 몰아내고 송곳 같은 부리로 나의 어
둠을 쪼아대며 유방 하나를 떼어 내 입술에 걸어 주었다
그럴수록 달아났던 두 팔은 회향의 시간을 기억하지 못
했다
Y셔츠 두 번째 단추를 끼울 때 자본에 조련된 한 구의
시체가 흰 기둥에 걸린 출근 인식기를 통과했다 그는 어
느 누구도 해독하지 못하는 문장이었고 그 두 손엔 아무
도 알아보지 못하는 나의 영정사진이 들려 있었다
< >
경주 김씨 달안*의 딸
그녀는
두 개의 밥통을 가슴에 달고 있다
명품이 아니다 스테인리스도, 고가 외제품은 더욱 아
니다 그 밥통 속엔 단발머리 소녀의 푸른 초경과 포성을
기억하는 몇 권의 역사책이 꽂혀 있고, 경전을 읽는 창백
한 부도수표와 가시나무새 울음소리가 단단한 한낮이
있다
그의 밥통은 밥통이다 이를테면 장작불을 지펴도 끓어
넘칠 줄 모르고, 담장 너머 바람소리가 아우성을 쳐도 실
어증 환자로 산다 그 밥통은 밥통이 아니다 젖무덤에 사
내아이 하나 묻고, 처음으로 눈이 큰 짐승처럼 포효했다
어두움 쪽으로 등뼈가 휘어지는 이 저녁, 밥통은 전쟁
터에서 퇴역한 그믐달이다 헌 유행가를 부르며 몰려오는
매콤한 허무이고, 전기가 들어오지 않은 적막산골이다 신
경 한 올 끊어진 뒷골목이다 아니다 온종일 숭배해야 할
나의
종교이다
* 오조부
7번 국도
시작과 끝을 잇는 '그리고'라는 접속사이다
'혹은'
세상이 저음으로 가라앉을수록
내가 벽에 걸리고 그러다가 사라지는 일이다
한 줄의 슬픈 문장이다
'이를테면'
월남에서 건너온 전사통지서를 막차가 싣고
그의 등뼈를 밟고 오기 때문이다
궁서체로 쓴 필사본 한 권이다
'예를 들자면'
과속을 사이비교주로 숭배하던 질주가
깨알처럼 써 놓고 반성하지 않는 반성문이다
속도가 말하는 허무의 직선이다
'그러므로'
한 여자가 흰 뼛가루로 날리면서
인적이 끊어진 통금의 길을 걷는 뒷모습이다
< >
심은섭 시인: 2004년 《심상》 등단. 2006년 《경인일보》 신춘문예 당선, 2008년 《시와세계》 문학평론 당선.
시집, 『K 과장이 노량진으로 간 까닭』 『Y셔츠 두 번째 단추를 끼울 때』 등.
평론집, 『한국현대시의 표정과 불온성』 『상상력과 로컬시학』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