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시인들

■ 이장욱 시인의 시 ■ 극적인 삶 & 전 세계적인 음악의 단결 & 우리 동네 & 대관람차 &

시 박스 2024. 5. 4. 2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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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조명된 관람차.

 

우리는 결국 바냐 아저씨처럼 쓸쓸할 거예요.
고도를 기다리며 영원히
벌판을 떠돌겠지요.
자책하는 햄릿과 함께

 

 

극적인 삶

 

 

 

  막이 내려올 때는 조용한 마음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후의 해변이나

  노인의 뒷모습 또는

  혼자 깨어난 새벽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여전히 말의 눈을 찌르는 소년이었다.

  요한의 목을 원하는 살로메였고

  숲을 헤매는 빨치산이었다.

  세일즈맨이 되어 핀 족명이 떨어지는 무대에서

  독백을

 

  여러분, 인생에는 기승전결이 없다.

  코가 큰 시라노는 여전히 편지를 쓰고

  빨간 모자를 쓴 늑대는 밤마다 문을 두드리고

  맥베스는 예언에 따라 죽어가는 것

 

  추억에 잠겨 혁명을 회고하는 자들은 이미

  혁명의 적이 된 자들이지.

  겨울 다음에는 가을이 오고 가을 다음에는

  영구 미제 살인 사건이 시작된다.

 

  우리는 결국 바냐 아저씨처럼 쓸쓸할 거예요.

  고도를 기다리며 영원히

  벌판을 떠돌겠지요.

  자책하는 햄릿과 함께

 

  드라마틱한 삶이란 장장 일곱 시간짜리 카라마조프 씨

네 형제들인데

  카라마조프는 검은 피와 더럽혀진 자들이라는 뜻인데

  인형의 집에서는 드디어 노라가 뛰쳐나오고

  에쿠우스의 주인공은 자신의 눈을 찌르며 외친다.

  머리가 열 개인 말들이여, 눈이 백 개인 말들이여, 반

인반마의 신들이여!

 

  붉은 막이 등 뒤로 내려오자

  나는 배꼽에 두 손을 모으고 깊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관객들의 박수 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객석의 어둠 속에서 모자를 깊이 눌러쓴 살인자가

  물끄러미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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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책이 커튼이고
모든 커튼이 컴퓨터라면······

 

 

전 세계적인 음악의 단결

 

 

 

  모든 책이 커튼이고

  모든 커튼이 컴퓨터라면

  책은 나부끼다가

  나부끼다가

  쓸쓸한 계산을 하겠지.

 

  파리 교외의 아파트에서는 앙투안이 눈을 감고 펑크

록에 빠져 있었는데 그 순간

  상하이의 장첸은 바에 앉아 블루스에 몸을 맡겼다가

문득

  눈물을 흘리고

 

  서울의 명희는 침대를 타고 날아다녔다.

  아아, 구름의 비유는 너무 쉬워서

  어떤 리듬이든 만들 수 있지, 가령

  모든 책이 커튼이고 모든 커튼이 컴퓨터라면

  책은 나부끼다가

  나부끼다가

 

  명희는 주사파를 싫어하지만

  꿈속의 평양 뒷골목을 혼자 돌아다녔네.

  앙투안은 혁명가가 아니지만

  전 세계의 음악이 한꺼번에 봉기하는 느낌이었어.

  장첸은 동물들의 구슬픈 노래를 처음 들으며

  정확하게 따라 불렀다.

 

  서울에는 외국인이 많고 한국인도 많아요.

  앙투안과 장첸과 명희는 동시에

  북촌의 게스트 하우스에 도착하였다.

  같은 시간에 잠이 들고 같은 꿈을 꾸고 드디어

  같은 음악을 들으며 깨어났다.

  모든 책은 아무도 모르게

  나부끼고

 

  그 순간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

  평양의 뒷골목을 혼자 걸어가던 이가 있었는데

  그이의 이름이 우연히 명희였는데

  평양의 명희는 자신도 모르게

 

  모든 책이 커튼이고

  모든 커튼이 컴퓨터라면······

  이라고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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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영을 할 수 있다면 천장만 보여서 좋을 텐데
물을 슬슬 가르며 외롭게 인생의 강물을 흘러갈 텐데
백반은 오늘따라 맛이 좋았네.
꼬마들은 왜 귀여워.

 

 

우리 동네

 

 

 

  여러분 우리 동네에는 미친, 미친, 미친

 

  사람이 있다. 완전히 미치지는 않아서

  사람들을 보면 멀쩡한 척 인사를

 

  마트에도 가고 이발소에도 가고 백반집 오락실 수영

장에서 우연히 만나면 반갑게

  인사를

 

  하지만 저것은 거짓이다 여러분!

  저이는 지금 우리의 공동생활에 치명적인 위해를

 

  저이는 곧 바늘을 구해서 바늘을 물고

  식칼을 찾아서 식칼을 품고

  망치라든가 휘발유라든가 권총 같은 것을 교묘히

  숨기고 저이는

 

  골방을 나와서 골목을 나와서 거리를 나와서 광장을

나와서 저이는

  망상을 집착을 불안을 절망을 선언을

  전염병처럼

 

  저이는 버스 정류장에 멍하니 서 있고 지하철 통로를

마구 뛰어가고 야구장에 도착해서 목청껏 소리를 지르다

가 영화관에 앉아 두 시간 내내 무섭게 침묵하는

  저이는

 

  마트에서는 결국 가격표를 꼼꼼히 확인하는 이발소에

앉아 드디어 눈을 감고 실내 수영장에서는 마침내

  마침내

  잠수를

 

  배영을 할 수 있다면 천장만 보여서 좋을 텐데

  물을 슬슬 가르며 외롭게 인생의 강물을 흘러갈 텐데

  백반은 오늘따라 맛이 좋았네.

  꼬마들은 왜 귀여워.

 

  학교 정문을 지나 문구점에도 가고 마트에도 가고 이

발소와 편의점에 들렀을 뿐인데

  누가 낯익어서 반갑게 인사를 했을 뿐인데

  나는 식칼이 없고

  권총도 없고 실은

  진실이나 거짓도

 

  미친, 미친, 미친

  이라고 중얼거리며 누가 내게서

  천천히 멀어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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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대관람차 아래서 
대관람차를 올려다보며 중얼거리네. 
대관람차 따위 
높고 크고 화려하게 원을 그리며 돌아가는 
저 혼자 완성되는 
대관람차 따위

 

 

대관람차

 

 

 

  아홉살에 대관람차를 탔지. 빙빙

  대관람차가 도는데

  창밖에 커다란 머리가 나타났네.

  눈 코 입이 달린 풍선인가.

  날아다녔어.

 

  열아홉 살에도 대관람차를 탔는데

  그대와 빙빙 돌다가 덜컹

  정지해버렸네. 아, 공중에 갇혔다!

  하지만 그대여,

  대관람차에서만 볼 수 있는 머나먼 초원이 있잖아.

  지평선이 있잖아.

 

  스물다섯 살의 대관람차를 탈 때는 마침내 

  혼자였어요. 

  여기는 가난하고 높고 쓸쓸하니 저 멀리 

  나를 떠난 그대의 뒷모습이 보여. 

  아무래도 울지 않았네.

 

  서른세 살에는 아무것도 바라보지 않고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았는데 

  그게 좋았다.

  그게 좋았지. 

  여전히 나는 빙빙 돌고 있을 뿐이지만

 

  쉰 살에는 대관람차를 타지 않았다. 

  일흔 살까지 대관람차를 타지 않았다. 

  아흔 살이 되자 

  그런 건 기억도 나지 않았네. 

  평화롭고 고요해.

 

  오늘은 대관람차 아래서 

  대관람차를 올려다보며 중얼거리네. 

  대관람차 따위 

  높고 크고 화려하게 원을 그리며 돌아가는 

  저 혼자 완성되는 

  대관람차 따위

 

  나는 조금씩 부풀어 올라서 

  눈과 코와 입이 달린 

  우습고 커다랗고 지헤로운 머리가 되어서

  천천히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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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욱 시인, 소설가: 1994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내 잠 속의 모래산』 『정오의 희망곡』 『생년월일』 『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한』 『동물입니다 무엇일까요』 『음악집』 등이, 소설 작품으로 『기린이 아닌 모든 것』 『천국보다 낯선』 『캐럴』 『칼로의 유쾌한 악마들』 『트로츠키와 야생란』『뜨거운 유월의 바다와 중독자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