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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후2

■ 나희덕 시인의 시 ■ 그날 이후, 거대한 빵, 유령들처럼, 토리노의 말, 가능주의자 문의 공포는열 수 없다는 데 있는 게 아니라잠글 수 없다는 데 있다 그날 이후     출입문의 손잡이가 있던 자리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손잡이가 사라졌으니  문은 그대로 벽이 된 것인가   구멍으로 스윽 밀고 들어온 주먹 하나가  내 손목을 거칠게 잡아챘다   어디론가 끌려갔다 돌아와 보니  문이 활짝 열려 있다   타인의 시선들로 가득찬 방,  책상과 의자와 침대가 수치심에 떨고 있다   이제 이곳은 내 방이 아니다   누구든지 들어올 수 있지만  출구는 없는 방   문의 공포는  열 수 없다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잠글 수 없다는 데 있다   시선의 블랙홀 속에서  앉을 수도 누울 수도 없이 서성거리는 동안   또 어떤 손이 저 구멍으로 밀고 들어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발이 바닥에서 떨어지지.. 2024. 4. 22.
■ 진은영 시인의 시 ■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세월호 시, 2022년 백석문학상 수상 시집 시인의 말  "불행이 건드리고 간 사람들 늘 혼자지."헤르베르트의 시구를 자주 떠올렸다.한 사람을 조금 덜 외롭게 해 보려고애쓰던 시간들이 흘러갔다.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청혼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별들은 벌들처럼 웅성거리고   여름에는 작은 은색 드럼을 치는 것처럼  네 손바닥을 두드리는 비를 줄게  과거에게 그랬듯 미래에게도 아첨하지 않을게   어린 시절 순결한 비누 거품 속에서 우리가 했던 맹세들을 찾아  너의 팔에 모두 적어줄게  내가 나를 찾는 술래였던 시간을 모두 돌려줄게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벌들은 귓속의 별들처럼 웅성거리고   나는 인류가 아닌 단 한 여자를 위해  쓴잔을 죄다 마시겠지  슬픔이 나의 물컵에 담겨 있다 투명한 유.. 2024. 4.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