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문의 공포는
열 수 없다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잠글 수 없다는 데 있다
그날 이후
출입문의 손잡이가 있던 자리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손잡이가 사라졌으니
문은 그대로 벽이 된 것인가
구멍으로 스윽 밀고 들어온 주먹 하나가
내 손목을 거칠게 잡아챘다
어디론가 끌려갔다 돌아와 보니
문이 활짝 열려 있다
타인의 시선들로 가득찬 방,
책상과 의자와 침대가 수치심에 떨고 있다
이제 이곳은 내 방이 아니다
누구든지 들어올 수 있지만
출구는 없는 방
문의 공포는
열 수 없다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잠글 수 없다는 데 있다
시선의 블랙홀 속에서
앉을 수도 누울 수도 없이 서성거리는 동안
또 어떤 손이 저 구멍으로 밀고 들어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발이 바닥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목소리도 나오지 않는다
눈동자, 눈동자, 눈동자들,
나는 작살에 찍힌 물고기처럼 파닥거린다
열려 있으면서 닫혀 있는
닫혀 있으면서 열려 있는 방에서
< >
비법이 뭐냐구요?
매일 반죽을 조금씩 떼어두었다가
다음날의 반죽에 섞는 것,
발효는 그렇게 은밀히 계승되어 왔습니다
거대한 빵
이 빵으로 말할 것 같으면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빵입니다
비법이 뭐냐구요?
매일 반죽을 조금씩 떼어두었다가
다음날의 반죽에 섞는 것,
발효는 그렇게 은밀히 계승되어 왔습니다
오늘도 빵 속으로 걸어들어가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빵 속의 터널에서 만났다 헤어지는 사람들은
같은 빵을 먹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서로를 식구라고 부릅니다
밀가루로 된 벽과 지붕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요
그러나 거대한 빵은
오병이어의 기적처럼 계속될 것입니다
지금도 빵을 먹어들어오는 저 왕성한 소리가 들리십니까?
이미 한쪽에선 곰팡이가 피기 시작한, 그래도
아직 먹을 만한 이 빵은
유구한 반죽 덕분에 발효화 부패 사이를 오가고 있습니다
더이상 보장된 미래는 없다고
더 많은 빵을 만들어내야 한다고 말들 하지만
오늘의 반죽이 어떤지는 알 수 없지요
빵의 분배 역시 마찬가지,
파이를 나누는 일에 정해진 규칙이란 없습니다
나이프 쥔 사람 마음대로지요
그가 눈을 감은채 칼을 휘두르지 않기만 바랄 수밖에요
빵에 갇힌 자로서
빵의 미래를 어찌 알겠습니까?
눈앞의 빵조각에 몰입할 뿐
부드러운 제 살을 황홀하게 먹어들어갈 뿐
< >
어둠을 끝까지 응시하는 것
날감자를 쥐고
날감자를 쥐고
토리노의 말*
거리에서 말의 목을 끌어안고 흐느꼈던 니체처럼
자신이 왜 우는지도 알 수 없으면서
무작정 울고 싶을 때는
살 수 있는 힘이 남아 았지 않을 때는
삶이라는 마부의 채찍을 빼앗아 던져버리고 싶을 때는
어찌해야 하나
마부의 말을 듣지 않는 것
단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는 것
탁한 물과 시든 먹이를 삼키지 않는 것
점점 정물에 가까워지는 것
그것만으로 부족할 때는
어찌해야 하나
뜨거운 감자알을 쪼개먹으며
나무좀이 운명을 갉아먹는 소리를 듣는 날에는
그 소리조차 들리지 않게 되는 날에는
우물이 말라버리고
땔감과 기름이 떨어져버린 날에는
도무지 어찌해야 하나
바람 속 지푸라기처럼 떠나는 것
그러나 출구를 찾지 못하고 다시 돌아오는 것
점점 나빠지는 세상을 향해 문을 닫는 것
여섯째 날의 어둠을 받아들이는 것
어둠을 끝까지 응시하는 것
날감자를 쥐고
날감자를 쥐고
*벨러 터르 감독의 영화 <토리노의 말> (2011).
< >
빗자루에 매달린 유령들처럼
구획된 선과 면을 따라 조용히 움직이는 우리를
유령들처럼
사람들은 우리를 보지 않는다
빗자루만 본다
대걸레만 본다
양동이만 본다
점점 투명해진다
우리를 사람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빗자루에 매달린 유령들처럼
구획된 선과 면을 따라 조용히 움직이는 우리를
날이 밝기 전부터
어둠 속에서 일하는 우리는
머리카락도 잡아낼 만큼 어둠에 익숙해진 우리는
손과 발 대신 수십 개의 더듬이를 지녔다
소리 없이 사라질 준비가 되어 있다
사람들은 우리를 보지 않는다
거리를 쓸다가
달리는 승용차에 툭 떨어져나갈 수도 있다
트럭에 매달려 끌려갈 수도 있다
그때가 되어서야 사람들은 간신히 우리를 본다
또는 유서를 남기고 사라진 후에야
바닥 아래 바닥이 있고
그 아래 바닥이 있고 또다른 바닥이 있고
계단 위에 계단이 있고
그 위에 계단이 있고 또다른 계단이 있고
창문 옆에 창문이 있고
그 옆에 창문이 있고 또다른 창문이 있고
엘리베이터나 자동문이 열려도
우리는 말을 하거나 고개를 들지 않는다
최대한 몸을 낮추고
사람들이 지나가기만 숨죽여 기다린다
점점 바닥에 가까워져간다
온갖 얼룩을 지우는 얼룩들처럼
유령들처럼
큰 빛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반딧불이처럼 깜박이며
우리가 닿지 못한 빛과 어둠에 대해
그 어긋남에 대해
말라가는 잉크로나마 써나가려 합니다
가능주의자
나의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
그렇다고 제가 나폴레옹처럼 말하려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은 불가능들로 넘쳐나지요
오죽하면 제가 가능주의자라는 말을 만들어냈겠습니까
무엇도 가능하지 않은 듯한 이 시대에 말입니다
나의 시대, 나의 짐승이여*
이 산산조각난 꿈들을 어떻게 이어붙여야 하나요
부러진 척추를 끌고 어디까지 가야 하나요
어떤 가능성이 남아 있기는 한 걸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가능주의자가 되려 합니다
불가능성의 가능성을 믿어보려 합니다
큰 빛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반딧불이처럼 깜박이며
우리가 닿지 못한 빛과 어둠에 대해
그 어긋남에 대해
말라가는 잉크로나마 써나가려 합니다
나의 시대, 나의 짐승이여,
이 이빨과 발톱을 어찌하면 좋을까요
찢긴 살과 혈관 속에 남아 있는
이 핏기를 언제까지 견뎌야 하는 것일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무언가 가능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되는 것은
어떤 어둠에 기대어 가능한 일일까요
어떤 어둠의 빛에 눈멀어야 가능한 일일까요
세상에, 가능주의자라니, 대체 얼마나 가당찮은 꿈인가요
나희덕 시인: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뿌리에게』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그곳이 멀지 않다』 『어두워진다는 것』 『사라진 손바닥』 『야생사과』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파일명 서정시』 『가능주의자』,
시론집, 『보랏빛은 어디에서 오는가』 『한 접시의 시』, 산문집 『반통의 물』 『저 불빛들을 기억해』 『한 걸음씩 걸어서 거기 도착하려네』 『예술의 주름들』이 있다.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중.
'한국의 시인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장수진 시인의 시 ■ 목숨, 대머리 여인, 띄엄띄엄 말하기, 가위 바위 보, 그러나 러브스토리 (1) | 2024.04.25 |
---|---|
■ 조혜은 시인의 시 ■ 눈 내리는 체육관 연작 (1) | 2024.04.25 |
■ 양안다 시인의 시 ■ 천사를 거부하는 우울한 연인에게, 잔디와 청보리의 세계, 탄포포 그리고 시인의 말 (1) | 2024.04.21 |
■ 김리윤 시인의 시 ■ 재세계reworlding, 이야기를 깨뜨리기, 영원에서 나가기, 글라스 하우스, 모든 사람 같은 빛 (1) | 2024.04.20 |
■ 김 현 시인의 시 ■ 혼자서 끝없이, 터치 마이 보디, 시원시원한 여자, 궁지 (1) | 2024.04.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