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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시인들

■ 김 현 시인의 시 ■ 혼자서 끝없이, 터치 마이 보디, 시원시원한 여자, 궁지

by 시 박스 2024. 4.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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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 슬픔이 많으면 개가 되는 거야
석희가 기쁨의 뼈다귀를 멀리 던졌습니다
금희가 맨발로 뛰어갔지요

 

혼자서 끝없이

 

 

 

  현이야 내 슬픔도 가져가 지난밤 저승으로 가는 길목에서 금희는 속삭이었어요 저승까지 가는 마당에 슬픔도 묻어야지 금희가 짚신을 벗어서 한 손에 들었습니다 얼마나 더 가야 할까 금희가 석희에게 물었습니다 석희는 네 살배기 조카 지난밤 금희의 꿈에 따라 들어와서 나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요 유창하게 의사를 전달하였습니다 이모, 연우가 그러는데 한민족은 아름답대 연우가 남북 겨레의 가슴에 대고 물어봤대 울창하더래 소나무 숲이 푸르더래 사돈에 팔촌도 다 상록수림 금희는 왈왈 짖었습니다 이모, 슬픔이 많으면 개가 되는 거야 석희가 기쁨의 뼈다귀를 멀리 던졌습니다 금희가 맨발로 뛰어갔지요 현이는 남에 있고 금희는 북에 있고 금희는 현이 배 밑에 한 손을 넣어두고 있었습니다 그로써 둘은 범민족 석희는 아무도 없는 텅 빈 곳에 앉아 금희의 짚신을 시종일관 바라봤습니다 하룻밤만 더 기다려보자 마음먹고 석희는 밤낮으로 삼강행실도를 읽으며 20세기 민족주의를 깨치고 현이는 일어나 잠든 금희와 연우를 보고 부엌으로 가서 아궁이에 땔감을 넣고 무쇠솥에 물을 부은 후에 핏물 뺀 고기를 모셨습니다 동이 트고요 그 옛날 산정 아래 살 때 산업혁명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금희와 연우를 데리고 나가 캐주얼레스토랑에서 사진을 찍고 두부와 견과로 멋을 낸 솥밥 먹던 생각 역사와 선조와 이웃을 버렸습니다 금희는 현이의 귀거래사가 가여워 눈물짓다가 붉은 해의 기계음이 또렷이 울려 퍼질 때까지 산너머를 지켜보다가 다 끝났구나 뼈다귀를 물고 돌아갔습니다 민족은 아름다워? 석희는 잘도 묻고요 금희는 잠자리에서 일어나 현우와 연우를 작동하고 인간으로 여겼습니다

   - 『다 먹을 때쯤 영원의 머리가 든 매운탕이 나온다』(문학동네), p.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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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찬스! 
삼만육천구백원에 알이 꽉 찬 영원 한 두름
나와 형은 인간을 벗고

 

 

터치 마이 보디

 

 

 

  바다에 갔다

  바다는 해변에 붙어 있다

  해변에서

  나는 오래된 필름카메라로 겨울 파도를 찌고

  형은 내게 껍질을 주었다

  그 앙상한 잿더미 속에서

  나는 웃고

  형은 흘러가서

  외투 호주머니에 껍질을 넣고 뒤쫓아갔다

  천천히 가 아주 멀어지진 마

  형이 본질에서 멀어져서

  나는 껍질이 주는 교훈을 생각했다

  알맹이는 껍질에 붙어있다

  우리는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신식 화장실에서 안전하게

서로를 범하였다

  이 문장에서 알맹이인 부분은

  우리가 엉덩이를 깨끗이 닦고 나와 청정횟집에 들어가 앉

았다는 것

  인생의 쌍두마차에 관하여 이야기 나누었다는 것

  우리 앞에 회가 한 접시

  밤이 깊어질수록

  우리는 상념의 흰 팬티를 내리고

  내가 일병인고 형이 상병이었을 때의 흑역사를 확인했다는 것

  군인 둘이 휴가지에서

  회 떠놓고 앉아 인생의 쌍두마차에 관하여 이야기 나누는

시는 이렇게 시작된다

  혼자 있을 수 있겠어?

  밤의 해변에선 누구나 혼자

  다녀올게 바다에 빠져 죽어볼게

  기다릴게 영원히

  인간의 탈을 쓰고 너를 보며 인간의 탈을 쓴 내가 보인다

  인간을 쓰고 어떻게 그런 말을 하니?

  군인들은 밤의 해면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혼잣말 하는 사람을 보다가

  본질에 가까워져서 불꽃놀이를 보았다

  터치 마이 보디

  시시해

  그만 됐어, 빠져나와, 알맹이는 거기 없어

  흰 연기가 피어올랐다 시간이

  이렇게 해서.

  형과 내가 회를 다 먹어치울 때쯤 매운탕이 나왔다

  대가리를 마주하고

  우리 안의 상거지가 염불을 외웠다

  나무석가모니불

  염불의 알맹이는 잠시 후에 밝혀집니다

  우리는 펄펄 끓는

  끓어넘치는 매운탕을 떠먹고

  시원 칼칼 인생의 쌍두마차 뒤로 하고

  밤의 해변에서

  형은 콜택시를 부르고

  "서울, 얼마!" 소리치고

  나는 택시 앞으로 달려들어

  "너도 나 좋다고 했잖아!" 소리치고

  우리는 흰 팬티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천천히 가 아주 멀어지진 마

  이제 알맹이가 나온다 나온다

  나와 형은 본질에 가까워져서

  합장하고 인생의 쌍두마차에 올라 길 떠나

  가슴 펜션으로 갔다

  합장하고 인생의 쌍두마차에 올라 길 떠나

  가슴 펜션으로 갔다

  텔레비젼을 켜고 홈쇼핑 채널을 틀었다

  마지막 찬스!

  삼만육천구백원에 알이 꽉 찬 영원 한 두름

  나와 형은 인간을 벗고

  이불속에서는 누구나 해골바가지

  서로를 꼭 껴안은 채

  정신의 배설물울 염원하며

  기다려 알맹이로 문질러줄게

  껍질까지 쪽쪽 빨아먹었다

   - 『다 먹을 때쯤 영원의 머리가 든 매운탕이 나온다』, pp. 5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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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은 나의 것
불렀다 하면
민해경 언니 뺨치는 여자
쫌 사는 여자

 

시원시원한 여자

 

 

 

  흙 필요하신 분

  묻기 전에

  관 짜는 여자

  그런 여자가 끌고 다니는 관짝

  속에 

  한 여자

  징글징글한 여자

  오라질 년 서방 잡아먹을 년

  너구리에 밥을 말아놓고

  총각김치만 베어먹는

  신박한 고부 갈등이네

  저 미친 새끼 연속극 비 오는 밤

  지압봉으로 허벅지를 꾹꾹 눌러

  푸는 여자

  풀어줄 땐 풀어주고

  당신이 진국이야

  당신만이 진땡이야

  들어놓고 못 들은 척

  진 빼는 여자

  러브핸들이 부르르

  부르르 살 떨리는 여자

  쾌녀다 쾌녀야

  패디큐어도 모르는 여자

  일밖에 모르고

  소주는 참이슬 빨갱이

  소싯적 운동깨나 해서

  사상의 어깨가 떡 벌어진

  넌 좀 벌려라 이년아

  씹새야 쥐좇 치워라

  주사파 앞에서도 주사를 압도하는 여자

  꽹과리 치고 슬플 땐 힙합을 추는

  자식복 서방복은 없어도

  없어도 그만

  내 인생은 나의 것

  불렀다 하면

  민해경 언니 뺨치는 여자

  쫌 사는 여자

  읍에서 좀 알아주는 여자

  배드 걸이라고 적힌

  아메리칸 캐주얼 트레이닝복을 입고

  골든리트리버를 끌고 산책하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벤티지

  시럽을 들이붓고

  자수성가한 여자

  조국 통일의 폭주 기관차 여성 통선대장

  촛불 혁명의 주도자

  남자는 성가셔도 내 몸은 사랑해서

  삼백육십 도 돌기 찍어 누르기 쾌속 질주 가능이 있는

  많이 러버

  밤이면 밤마다 글월문을 열고

  거기 여자의 일생을

  생각했네

  가부좌를 틀고

  생로랑을 들고

  자본주의 해시태그를 달고 인스타그램에

  올라오는 핵인싸

  쟁반짜장을 시키면 짜장보다 쟁반에 관심이 먼저 가는

  쨍한 여자

  정이 많아

  베갯잇 마를 날 없는 심사

  오장육부에 기운이 좋아

  혈색이 맑고

  목청이 큰

  짧은 머리에 멘솔

  비비드한 여자

  오늘 낮에 대로에서 제대로 처맞아 죽은

  여자

  배운 년이 돈 좀 있다고

  이 동네에선 유명했어요

  쓸 땐 쓰고 놀 땐 놀고

  겨털은 안 깎았잖아 무성했어 그게

  대단했지

  더울 땐 노브라

  대장부였지

  난 년이었어

  여기서 진돗개를 훔쳐간 개새끼는 평생 개새끼다

  글씨 좀 뻣뻣하게 쓰는 여자

  부자영양탕 끼고 돌아서 첫번째 골목 은색 대문 집

  관 문을 닫으면 고분고분하고

  관짝 열면

  뜨끈뜨끈해서 얼음을 씹어먹고

  외로운 여자가

  기도하는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오늘밤 주인공은 나야 나 나야 나

  속사포 같은

  여자 여자 여자

  흙 필요하시면 가져가세요

   - 『다 먹을 때쯤 영원의 머리가 든 매운탕이 나온다』, pp. 58~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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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어를 배운다고요
우리 이제 마흔입니다
리이티티아와 라이타티오를 때맞춰 쓸 줄 안다면
저와 경섭씨의 상황이 달라질 수 있을까요

 

궁지

 

 

 

  지금은 아이그리모니아와 아마로르를 구분할 줄 아십니까?

  경섭씨

 

  라틴어를 배운다고요

  우리 이제 마흔입니다

  리이티티아와 라이타티오를 때맞춰 쓸 줄 안다면

  저와 경섭씨의 상황이 달라질 수 있을까요

 

  지금도 우리가 궁지 속에 머물렀던 것을 떠올리면 머리카

락을 올려묶게 됩니다

 

  눈은 끝도 없이 내릴 것 같고

  (끝도 없이 내렸죠)

  장독이 밑도 끝도 없이 깨져서

  우리 그 밑으로도 가보고 그 끝으로도 가보았죠

  그 밑에 있던 게 똥인지 된장인지도 모르고

  그 끝에 있던 걸 보고도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글까

  경섭씨가 말했습니다

  저는 잘 지냅니다

 

  딸도 없고 아들도 없소 아내도 없고

  남편과는 사별했습니다

  꾸며내고 있다고 하시겠죠

  경섭씨가 어렵게 구해온 코스모스를

  제가 글쎄 먹어버렸던 기억이 나요

  흰 코스모스였는데

  녹여먹고 빨아먹고 혀가 얼얼해서

  제가 경섭씨 입에 혀를 넣었잖아요

  경섭씨가 왜 울었죠

  맞아요

  우리 너무 깊었죠

 

  궁지 속에서 나와

  짐싸고 짐을 끌며 우리 걸었죠

  검은 방향이었나요

  흰 방향이었나요

  멈춰 서서 제가 먹은 걸 다 토했지요

  눈 나리고요

  그걸로 끝

 

  경섭, 궁지 속에

  떠올랐어요

  밑도 보고 끝도 보고

  우리 눈을 파서 눈을 심었잖아요

  꽃이 피라고

  그게 잘못되었어요

  흰 코스모스면 족했는데

  끝내기엔 너무 어리다고 했죠

  어렸죠 그게 다예요

 

  라틴어를 배운다고요

  (In frondem crines crescunt)

 

  만날까요

  경섭씨, 저는 죽었고 재봉 일을 합니다

 

  찾지 마세요

   - 『다 먹을 때쯤 영원의 머리가 든 매운탕이 나온다』, pp. 11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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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0

  연기를 시작합니다.

 

  1

  다음과 같은 곡이 무대에 차례로 흐릅니다.

  주현미 <비 내리는 영동교>, 혜은이 <제3한강교>, 원더 걸스 <So Hot>, 민해경 <내 인생은 나의 것>, 최양숙 <가을 편지>, 조용필 <비련>, 패티김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PRODUCE 101 <나야 나(Pick Me)>, 천지인 <청계천 8가>, 꽃다지 <전화카드 한 장>, 조덕배 <꿈에>, 이정석 <첫눈이 온다구요>, 이상은 <언젠가는>, 이소라 <봄>, 양수경 <사랑은 창밖에 빗물 같아요>, 시인과 촌장 <좋은 나라>, 조하문 <같은 하늘 아래>, 이치현과 벗님들 <사랑의 슬픔>, 송재호 <늦지 않았음을>, 김민기 <봉우리>

  너무 매캐하지 않게.

 

  2

  영원은 무슨 맛일까요?

  먼저 맛보신 분 해시태그(#) 영원의 맛, 후기 부탁해요.

 

  4. 시를 쓰지 않을 때 더 행복해(라고 말하면 그럼 쓰지 마,라고 말하는 이가 꼭 있는데, 너나 나나 인생을 쉽게 보진 말자), 계속 쓸래?

 

  8

  아침에 일어나 공복에 유산균 캡슐 한 알 먹는 것이 시를 보호하는 데 도움되고요.

 

  6

  독자도 시를 물로 보는 편이 건강에 이롭습니다.

 

  ♡

  이렇게 계속 달려가는 말이 저기,

  장을 비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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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현 시인: 2009년 작가세계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글로리홀』 『입술을 열면』 『호시절』 『낮의 해변에서 혼자』
『다 먹을 때쯤 영원의 머리가 든 매운탕이 나온다 』  산문집, 『걱정 말고 다녀와』『아무튼, 스웨터』 『질문 있습니다』 『당신의 슬픔을 훔칠게요』 『어른이라는 뜻밖의 일』 『당신의 자리는 비워둘게요』가 있다.
김준성문학상, 신동엽문학상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