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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시인들

■ 김복희 시인의 시 ■ 밤의 기계 & 거울 & 사랑 & 씌기 & 천사의 선물 & 용서는 가장 작은 돌

by 시 박스 2024. 4.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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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스미기에 좋지》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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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기계

 

 

 

  세상 것들이 서로 두려워하지 않도록

  나는 떠올린 모든 것에게 그림자를 만들어주었다

 

  많이 알 지 못해

  입력하지 않은 것들이 그림자 없이 살 줄은 몰랐다

 

  모두를 위해

  밤을 준비했다

  그늘을 준비했다

  작은 소리들을 달아주었다

 

  꼭 나는 조용한 것들에게

  매료된다

  내 귀로는 못 듣는 소리들

 

  너희 거기 없지

 

  못 들으면서

  있다고는 아는

  그림자가 없다는 이유로

  정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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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은 조금 미쳐 있지만 그래서 사람처럼 보일 때도 있지만
  나는 정신을 차린다
  그들 가까이
  멀리
  걸어 빛 속으로 사라진다 신이 그들을 따라다닌다 미치지 않고서야 사람을 저렇게 따라다닐 리 없다

 

 

거울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는 사람이라면 좋을 텐데 밤에 사냥하고 낮에 자는 맹수라면 좋을 텐데 집이 없고 집에 들일 마음이 없다면 무색할 정도로 활짝 핀 다음 고개가 꺾여 버려지는 꽃이라면 그렇다면 좋을 텐데

  나는 변치 않는 몸으로 빛을 재우며 시간을 보내고

  대놓고 사람을 본다

  좋은 사람을 본다 좋은 사람이 보인다 좋은 사람의 마음을 보자

  나는 마음이 궁금하여 마음에 대해 이런저런 물음을 가지고 있지만 마음에 대해서 이해하는 것은 금기 중의 금기.

  내가 깨질 수도 있다 추측건대 마음은 사고와 다르지 않고 기호와 유사한 경우도 있고 변덕에 대한 핑곗거리에 지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어떻게 보다 보니 모르는 것만 늘어 보이는 것을 본다 귀퉁이부터 조금씩 마음을 반사한다

 

  사람을 구경하고 있으면 여러 번 태어나는 것 같다 그러나 사람은 단 한 번만 사람으로 태어난다 신의 자비다 신은 조금 미쳐 있지만 그래서 사람처럼 보일 때도 있지만

  나는 정신을 차린다

  그들 가까이

  멀리

  걸어 빛 속으로 사라진다 신이 그들을 따라다닌다 미치지 않고서야 사람을 저렇게 따라다닐 리 없다 나는 그 마음이 궁금하여 신을 대놓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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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

 느리게 뛰는 천국

 

사랑

 

 

 

  수면을 지치고 가는

  기억은 뱀 같은 것일까 꼬리를 보면 따라가게 되고 물

리면

  죽은 듯이 질문에 붙들리게 된다

 

  기억하는 바가 있어

  도달할 수 없는 수면이 깊다

 

  뱀이 자는 동안 겨울이 온다고

  뱀이 깨어나면 봄이라고 그러나

  계속 잠들어 있는 뱀은 무엇이라 할까 취한 뱀이라 할래

겨울이라 할래 아니 이불을 돌돌 만 슬픔이라 할래 일어

나지 않아도 되니까 천국이라고 하자 그래 그러자 천국엔

무엇이 없을래 뱀을 재우는 천국에 무엇을 없앨래 출근이

없고 퇴근이 없는 깊은 잠에는 나비도 개구리도 자고 나면

서 있으니 서로 방해하지 않고 없는 것처럼 평화롭고 들끓

는 용암 불티 오르는 밤 한밤도 잠들어 깊이깊이 잠들어

보이지 않는다 잠든 사람들의

 

  심장

 

  느리게 뛰는 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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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서는 어디도 갈 수 없구나 
산 사람을 빌려야겠구나 
아무래도 몸보다는 마음이 편하지 
스미기에 좋지

 

 

씌기

 

 

 

  나 혼자서는 어디도 갈 수 없구나

  산 사람을 빌려야겠구나

  아무래도 몸보다는 마음이 편하지

  스미기에 좋지

 

  가끔 사람들이 묘한 꿈을 꾼다면

  그건

  마음이 씐 것

  마음이 그 사람 모르게 유랑한 것

 

  내가 잘 타고 돌아다닌 다음 놓아준 것

 

  그런데 

  귀신도 꿈을 다 꾸나

 

  네 꿈이 정말 춥구나

  귀신에게 가혹한 온도다

 

  네 마음을 타고 너무 멀리 나왔었나 보다

  네 마음을 놓아주었다고 생각했는데

  네 마음이 이제 너를 어색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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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의 선물

 

 

 

  천사여

 

  성년이 되면 얼굴을 잃게 될 것이다

  누구의 기억에도 흐릿하게 남을 것이다

  누구의 곁에서도 제대로 보이지 않을 것이다

 

  요정들의 선물에

  왕비는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미소 지었다

 

  오로라는 자랄수록 인간 같지 않았다 왕비도 왕도 생각

했다

  공주는 정말 천사같군

 

  천사가 

  저에게 키스를 한 왕자를 밖으로 밀어버렸을 때, 

  성 안의 모든 자들이 깨어났고

  뒷목을 주무르고 배를 채우러들 갔다

 

  천사는

  창가게 걸터앉아 사람들이 깨어나 움직이는 것을 지켜

보다가

  왕자가 타고 왔던 말을 끌고 성문을 나섰다

 

  이제 이 성에는 편히 잠들 수 있는 이가 아무도 없다

  왕과 왕비는 생각했다

 

  천사는 사랑받지 않아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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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는 가장 작은 돌

 

 

 

  용서는 가장 작은 돌

  돌 공장에서 용서를 만든다

  큰 돌을 부숴서 작은 돌을 만드나

  아니 아니 작은 돌을 모아서 큰 돌을 만드나

  아니 아니 작은 돌이 모이면 큰 무덤이다

  성곽,

  넘을 때 넘어지는 턱,

  넘겨다 짚는 미래다

 

  돌 공장 앞 버스 정류장에서 나는

  신발을 벗어 돌멩이를 털어낸다

  길바닥에 두고 버스를 탔다

  돌멩이는 죽지 않으니까 괜찮겠지

  옆에 있는 다른 돌멩이랑 구별되지 않으니까

  상관없겠지 결국

  큰 돌 무게에 가깝게 돌멩이들

  있는 거라고

  오래오래 살아 있는 조용함이라고 그러려고

 

  아무리 높이 던져도

  가장 낮은 곳을 찾아 떨어지는 돌처럼

  부서지려고

  흩어지려고

 

  용서할 수 없지만 좀 쉬려고

 

김복희 시인: 201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으로 『내가 사랑하는 나의 새 인간』 『희망은 사랑을 한다』 『스미기에 좋지』가 있고, 산문집, 『노래하는 복희』 『시를 쓰고 싶으시다고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