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의 시인들

■ 윤은성 시인의 시 ■ 계약 & 주소를 쥐고 & 원탁 투명 & 공원의 전개 & 선셋 롤러코스터

by 시 박스 2024. 4. 16.
728x90

 

시집, 주소를 쥐고 표지

 

 

켄트 씨는 그런 춥고 느린 장면들이
함박눈이 내리는 길고 긴 오후의 인상처럼

기억에 남을 것이라 생각되고 있었다.

 

 

계약

 

 

 

  트렁크를 끌고서

  켄트 씨가 걸어간다.

 

  그녀가 오지 않을 것이라고

  의심한 적은 없었다.

 

  연락이 가끔 더뎠고

  계좌에 잔액이 줄었다.

 

  일을 구하는 것이 늦어지고 있었다.

 

  유리문 밖에는 소년들이

  담배를 피우다 돌길을 걸어

  사라지고 있었다.

 

  켄트 씨는 그런 춥고 느린 장면들이

  함박눈이 내리는 길고 긴 오후의 인상처럼

 

  기억에 남을 것이라 생각되고 있었다.

 

  천천히 낙하하는 눈을

  좋아하는 켄트 씨는

 

  자신의 트렁크 안에 비가 내린다고 했다.

 

  열면 멈추지 않고 우는

  신들의 얼굴이 보인다고 했다.

 

  그러한 신들 역시

  끌어안을 것을 모두 놓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고 했다.

 

< >

 

어려운 일은 아니다. 이제는 기다리면 되니까. 하차한
바로 그 자리에서 만나기로 했으니까.

 

 

주소를 쥐고

 

 

 

  어려운 일은 아니다. 이제는 기다리면 되니까. 하차한

바로 그 자리에서 만나기로 했으니까. 사람들은 지나간

다. 마주할 일이 있다고 하면 겁을 먹기도 하면서, 더 많

은 노력을 한 사람이 누구인지 견주면서, 거대한 밤과

통로.

 

  폭죽을 터뜨리고 싶다.

 

  그러나 어디로 가든지 상관이 없다는 게 어떤 선을 그

어대도 괜찮다는 뜻인 것은 아니었다는 생각. 안내견과

그의 주인이 지나가고 동행인의 옷깃을 쥔 노인이 천천

히 지하도로 사라지고.

 

  멀다.

 

  나는 계속 기다린다. "왔구나"라는 말을 대신할 말을

찾으면서. 보이지 않게 된 사람들이 다시 나타나는지 건

너편 플랫폼을 살피기도 하면서.

 

  겨울을 여기서 맞는다면 커다란 커튼을 살 것이다. 창

을 다 덮고도 바닥까지 늘어뜨려지는. 닦거나 감싸거나

누군가 잠시 숨겨줄 수도 있는.

 

  왔구나.

  왔구나.

 

  손을 쥐었다 펼쳐본다. 한번 죽어본 사람처럼. 여기에

도 새가 산다. 여기도 새가 살고. 밤이 되면 어둡다.

 

  가방을 끌어안고 벽에 기대 조는 아이.

  아이와 인사를 주고받고 싶다.

 

< >

 

언니가 아주
오래전부터 알았던 것처럼 느껴졌다
견디는 게 아니라 통과하는 거라고

 

 

원탁 투명

 

 

 

  언니가 아주

  오래전부터 알았던 것처럼 느껴졌다

  견디는 게 아니라 통과하는 거라고*

  거기까지라고, 네가

  네 길 가면 된다고

 

  부디 깨지지 말라고

 

  그렇게 녹아도 되는

  그렇게

  지켜져도 되는 날이라니

 

  나는 통과라는 말을 누구에게

  빼앗기지 않고, 헐값에 줘버리지도 않고

  간직하려는 생각으로

 

  먹태를 집고 또 집어

  오래 씹어 삼켰다

 

                      *

 

  나는 계속 천천히 걷고 있다

  진심과 진실과 약간은 불필요각한 회고를 지나고,

  나도 수긍하며 크게 놀라기도 하며

 

  원탁 위

  사실들의 얼굴이

  무섭고 또 다정하다고 생각하며

 

                     *

 

  해보려고 해도 안 되고 열받은 건

  나일뿐이라는 건가

 

  미리 녹은 내가 멀리서 그를 바라본다

 

  아직 다 지나가지 않았구나

 

  원탁들이 서로를 지치지도 않고

 

  통과하는 금요일 저녁

 

                      *

 

  나를 지나간 원탁들을 모두 모아둔 창고들

  불 질러버려도 된다면

  그때는 더욱 마음놓고 온갖

  내 사랑을 담아 태워버리려고 한다

  커다란

  하나의 마지막 원탁이

  꿈쩍도 안 하는지 그때 가서 보기로

  지금은 나의 원탁들을 아껴

  나의 모든 다정을 다해

  기록해두기로

 

  나는 부드럽고

  나는 이제 원탁과 원탁의 바깥에서

  나를 실험하기로 한다.

 

* 강은진, 「통증에 대한 낭만적 이해」(달콤 중독, 파란, 2020)

 

< >

 

우리는 우리의 불씨를 사방에 퍼뜨리고 말았다네, 우
는 말들을 내버려두고

 

 

공원의 전개

 

 

  영원이라는 말을 쓴다 겨울의 도끼라는 말처럼 우연

히 여기라고 쓴다 공원이라고 쓴다 누군가를 지나친 기

분이 들었으므로

 

                           *

 

  모자를 벗어두고 기타를 치고 있는가 물구나무를 서

고 있는 아이의 다리 위로 그대는 날아가려 하는가 발

을 버둥거릴 때 옷깃을 쥐려 하는 사람들이 생기고

 

  손목을 내리찍으려고 돌아다니는 도끼

 

  물이 어는 속도로

  얼음이 갈라지는 속도로

  겨울의 공원이 생기지, 해가 저물도록 벤치에 앉아서

책을 읽던 사나이여

  그대의 곁에서 넘어지고 일어서는 어린 수리공들

  우리는 우리의 작업을

  언제든 완료할 수 있지.

 

  그저 꽃잎을 떨구면

  그저 붉은색 페인트 통을 엎지르면

 

  상점은 짜부라지면서 물건을 토해내지, 상점의 주인처

럼 주인의 집주인처럼 이빨들이 썩어가지, 그림자에서는

머리카락이 점점 깊어지고 그대의 책장이 넘어가고

  또 해가 저물지, 테이블 위의 물컵은 놓아둔 그대로 있

는데 무엇이 여기서 더 아름다울 수 있겠는가

 

  우리는 우리의 불씨를 사방에 퍼뜨리고 말았다네, 우

는 말들을 내버려두고 그대의 오랜 신부들이 먼 도망을 

준비한다

 

  수리공이 모두 모이자

  그대에게 주려던 꽃이 굳고

  페인트가 빠르게 갈라지기 시작한다

 

< >

 

그 애는 뭐랄까.
갈 데가 없었지. 놀 데 말고. 도망치고 숨을 데
추락하는 것 말고
잠시 내려와 앉을 데.

 

 

선셋 롤러코스터

 

 

 

  네가 찾는 그 아이는 창고

  건초 더미 위에 있어.

  가서 쓰다듬어주든가.

  입을 맞추어주든가.

  어쨌든 오늘이 지나가기 전에 가보는 게 좋을 거야.

  걔는 벌써 몇 번 죽은 적이 있잖니.

  아니 죽기 직전까지 갔다던가.

  너무 여러 번 죽었다 깨어나서 자기 자신이

  잿더미에서 찾아낸 뼛조각인 줄 안다고 했던가.

  나야 그 앨 모르잖아.

  얼마나 많은 고양이를 잃었는지도 모르고

  그 애가 무엇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알기

도 어렵고.

  무표정한 그 애의 얼굴을 들여다보노라면······

  그래, 어렵진 않다고 들었어. 그럴지도 몰라.

  그 애는 뭐랄까.

  갈 데가 없었지. 놀 데 말고. 도망치고 숨을 데

  추락하는 것 말고

  잠시 내려와 앉을 데.

  한번 둘러볼 사람이 바로

  나였다는 것을 알았을 무렵에

  내가 찾았던 그 아이를 네게로 보낸 적 있었지.

  유원지에 보내듯 좋은 옷을 입혀서.

  몸의 자잘한 자국들을 덮은 채로.

  비틀거리며 도로를 건넜었지.

  다시 돌아올 것이란 생각을 안 한 것은 아닌데.

  보내고 다시 데려오고,

  엉거주춤 서 있는 아이에게

  제발

  네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라고

  우리는 소리를 친 적 있지······

 

< >

 

윤은성: 2017년 문학과사회 신인상으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 『주소를 쥐고』가 있다.
「남은 웨하스 저녁」 외 3편으로 제12회 '문지문학상' 시 부문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