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엔 술잔을 던졌고
내일 밤은 보들레르의 시를 읊으며
단골 바에서 울고 있을 예정이야
한 뼘의 경희
개의 그림자는 한낮
죽은 나무들은 이름이 없다
세상의 종말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매주 종로에 모였다
서툴게 인사를 나누며
출렁이던 사람들 틈에서
어깨를 움츠린 경희를 만났다
150센티미터도 안 되는
한 뼘의 경희
너는 영화를 좋아했고
롱부츠를 자주 신었고
붉은 입술이 온기로 부풀던 아이
덜 아문 상처를 서로 할퀴며
그럴 때마다 눈물이 솟아나는 게 신기해
훔치던 두 손을 모른 척하던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면
무릎을 껴안고 숨어 있는 게 안전해
어젯밤엔 술잔을 던졌고
내일 밤은 보들레르의 시를 읊으며
단골 바에서 울고 있을 예정이야
우리에겐 애인이 없고
직장이 없고 미래도 없었기에
끝내 바닥난 기분이 발목을 잡아채면
온통 고요한 거리를 바라보았다
내가 멀쩡히 살아 있다는 게
지겨워 견딜 수 없어
젖은 속눈썹이 떨려 오면
박차도 일어서던 너의 작은 등을
우리는 대화라고 불렀다
누가 더 길어졌나 내기를 하면
누구도 한 뼘에서 더 자라지 못하던
세상에는 구름 한 조각
잠깐의 빗소리와 길어진 그림자들
한 뼘이란 큰 걸까 작은 걸까
누구도 물어보지 않았는데
매일 밤 그 질문에 골몰하느라
머리가 하얗게 셌다
< >
우리는 막(幕) 내린 밤으로 숨어들어 와
사랑이라는 야만을 꿈꾸는 입술들
밤과 꿈의 뉘앙스
너의 귓바퀴를 만지다가
짙게 타 버린 색과 질감을 섞어, 이목구비가 없는 몰골
을 오래, 그렸다 지웠다
살아서는 끝내 잠들 수 없는 얼굴
이렇게 너를 보면 가까이, 좀 더 가까이 숨고 싶다 숨을
참고 싶다 풀이 무성한 침대 밑에서, 이불이 없는 벽장 속
에서, 누군가 울고 있는 커튼 뒤에서
우리는 막(幕) 내린 밤으로 숨어들어 와
사랑이라는 야만을 꿈꾸는 입술들
밤과 꿈 사이
탕헤르의 처녀처럼 춤을 추는
발가락이 꺾여도 멈추지 않는 턴 속으로, 초점을 잃은
눈으로 거울을 보듯, 자신의 철부지 연인을 시기하듯, 나는
밤을 흔적하고 꿈을 발굴한다 그때
너의 얼굴은
가장 먼 곳에 있다
꿈꾸지 않는다면 끝나지 않을 밤들
한 장씩 피부를 벗을 때마다 너는 작아진다 몸의 무늬들
이 물처럼 흔들린다 맨몸으로 떠다니는 갈 곳 없는 꿈처럼
잘 봐, 어둠마다 네가 거꾸로 매달려 있어
흔들리는 머리칼 너머
자신의 울지 않는 얼굴을 보는 악몽처럼
늑골에선 선율도 없이 무모한 코러스가
아침이 오면
우리는 나란히 누워 있다
내가 너의 목을 조르고
네가 나의 목을 조르면서
< >
거센 바람이 옷자락을 뒤집자 한 무리의
소란한 사람들이 달아나고 있었다 두 사람은 걷는다 달아
나지 않는 게 이 산책의 유일한 생존법이라는 듯,
산책
두 사람이 있다 한 번의 계절이 지날 때마다 무심코 자신의 얼굴을 어루만지던, 어떤 날은 요절한 이의 문장을 외우며 하루를 보내고 어떤 날은 아무 데서나 출몰하는 고독한 소녀들을 지나치면서, 두 사람을 걷는다 한 블록을 지나면 희미한 벽, 한 블록을 지나면 치솟는 어둠, 목적지도 없이 그들을 걸었다 걷다가 숨이 차면 걸음을 멈추고 서로의 호주머니에 손을 밀어 넣는다 자취만 남은 손을 어루만지며, 사라진 것들에 오래 머뭇거리면서, 조금쯤은 슬퍼도 괜찮을 거라 생각하는데, 순식간에 달아나는 자전거 바퀴가 나뭇잎을 흔들며 사라진다 발을 굴리는 아이의 젖은 티셔츠가 타임 슬립된다 여기서 정지 아니 여기서 다시 시작하자 몸에 익은 감각들은 버리고 서로가 서로를 잊은 듯이, 여자가 담배를 꺼내 무는 동안 남자는 자신의 죄를 잊었던 이름처럼 기억해 낸다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는 거지? 이 세계엔 모를수록 다정해지는 것들이 무궁무진하고, 뒤돌아보면 제자리, 마주 보면 사라지는 시간들, 그러나 다시 걸어 보자 웅덩이에 떠 있는 낙엽처럼, 천천히 죽어 가는 자신을 잊듯, 거센 바람이 옷자락을 뒤집자 한 무리의 소란한 사람들이 달아나고 있었다 두 사람은 걷는다 달아나지 않는 게 이 산책의 유일한 생존법이라는 듯, 눈앞에는 무수히 펼쳐지는 시간들, 네가 죽는다면 나라는 사람도 울 수 있을 것 같은데, 마음이 무섭다는 생각, 발등이 부어도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산책을 하며, 빗줄기 소리 없이 내리
친다
< >
까마귀를 훔친 아이
눈앞의 검은 빛을 본다
먼 데서 오는 음악에 맞춰
자신의 눈을 가린 채로 춤추는 아이
아이의 꿈은 댄서였다
어둠 속에서 하나의 빛을 향해
솟구치고 전진하는
대화가 없는 여름이었다
아이는 난간에 상체를 내밀고
낡은 회벽처럼 말라 간다
붉은빛을 부리에 물고
전신의 밤을 춤추는 실루엣
죽도록 아름답다는 건
구분되지 않는 우리를 말하는 걸까
두 팔을 벌리면 까만 눈알을 굴리며
부풀어 오르는 미궁
너를 사랑해서 훔쳤어
그건 내 죄가 아니야
빛의 실수일 뿐
밤마다 머리맡에 앉은 그림자가
잠든 아이의 멱을 쪼아 댄다
핏빛 어둠이 선명해질수록
제자리에서 몸짓 하나가 생겨났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춤이었다
죄를 지은 여름이었다
풍경이 사라진 여름이었다
먼 데서 오는 음악만이 남아
아이를 춤추고 있었다
< >
사랑을 다시 말하기엔 늙었고
이별을 다시 말하기엔 지쳤기에
302호
빗소리가 귓바퀴에 모래알처럼 쌓이고
우리는 마지막 담배를 나누어 피운다
이제 악수를 나누며 헤어져야 할 시간, 언젠가 읽다 덮
은 소설처럼 시선을 거두고 처음부터 없었다는 듯이
이럴 줄 알았다면 새로 산 스웨터를 입고 멋진 작별 인
사를 연습해 두는 건데
고장 난 짐승처럼 누워 천장을 보고 있으면 곧 죽을 듯
일생이 파노라마로 지나가지 멍청한 우리는 입을 벌리고
아름답구나 무어라 말할 수 없이
요상하고 아름답구나
의미 없어 혼잣말을 들려주는 일이 좋아서
어릴 적 죽도록 오빠에게 맞던 기억이나 동생이 연못에
빠졌던 기억들도 오래 알고 지낸 사람에게 들려주듯
사랑을 다시 말하기엔 늙었고
이별을 다시 말하기엔 지쳤기에
모르는 사람처럼 각자의 신발을 신고
다시없을 다음을 기약하도록
창밖엔 구름 웅덩이
불 꺼진 방엔 모스부호처럼 떠도는 말들
꿈 없는 눈으로 앓듯
자꾸만 이불을 뒤척이는 기분을 아니
우박이 떨어지고 크리스마스가 오고 그 해 마지막 기도
가 잊히면 가엽고 따뜻한 입술에는 못다 한 인사만 남아
어젯밤 당신은 인간의 말을 버리고
짐승의 음성으로 일생을 울어 주었는데
낡은 액자 속에는 목동과 어린 양들
마지막 새해 기도를 올리고
내가 가진 슬픔은 작고 부드러워
두 손이 붉게 물들 때까지
주여, 우리를 한입게 삼키소서
< >
시인의 말
사랑의 프락치들 앞에
시궁쥐처럼 모여 앉아
영혼의 매장량을 세어 본다
박은정 시인: 2011년 《시인세계》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아무도 모르게 어른이 되어』 『밤과 꿈의 뉘앙스』 『아사코의 거짓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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