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의 시인들

■ 이수명 시인의 시 ■ 셔츠에 낙서를 하지 않겠니 & 물류창고 & 이디야 커피

by 시 박스 2024. 4. 16.
728x90

< >

물류창고에 쌓은 상자들

 

셔츠에 낙서를 하지 않겠니

 

 

 

  오늘 하나씩 천천히 불 켜지는 거리를 걸어보지 않겠니

  하늘을 위로 띄워보지 않겠니

  부풀어 오르는 셔츠에 재빨리

  우리는 죽었다고 쓰지 않겠니

 

  풍경을 어디다 두었지 뭐든 뜻대로 되지 않아

  풍경은 우리의 위치에 우리는 풍경의 위치에 놓인다

  너와 나의 전신이 놓인다

 

  날아다니는 서로의 곱슬머리 속에 얼굴을 집어넣고

  한 마디의 말도 터져 나오지 않을 때

  하나씩 천천히 불을 켜지 않겠니

 

  나란히 앉고 싶어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는 사건을

 

  흉내 내고 싶어

  오늘을 다 말해버린다 오늘로 간다

  오늘로 가자

 

  오늘이여 영 가버리자

 

  너를

  어디에 묻었나

 

  어두운 낙서를 같이하지 않겠니

  빠르게 떠내려가는 하늘 아래

  방향을 바꿀 줄 모르는

  아무것도 모르는 티셔츠를 한 장씩 입고

 

< >

 

물류창고

 

 

 

  우리는 물류창고에서 만났지

  창고에서 일하는 사람처럼 차려입고

  느리고 섞이지 않는 말들을 하느라

  호흡을 다 써버렸지

 

  물건들은 널리 알려졌지

  판매는 끊임없이 증가했지

  창고 안에서 우리들은 어떤 물건들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으로 갔다가 거기서

  다시 다른 방향으로 갔다가

  돌아오곤 했지 갔던 곳을

  또 가기도 했어

 

  무얼 끌어 내리려는 건 아니었어

  그냥 담당자처럼 걸어 다녔지

  바지 주머니엔 볼펜과 폰이 꽂혀 있었고

  전화를 받느라 구석에 서 있곤 했는데

  그런 땐 꼼짝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지

 

  물건의 전개는 여러 모로 훌륭했는데

  물건은 많은 종류가 있고 집합되어 있고

  물건 찾는 방법을 몰라

  닥치는 대로 물건에 손대는 우리의 전진도 훌륭하고

  물류창고에서는 누구나 훌륭해 보였는데

 

  창고를 빠져나가기 전에 아무 이유 없이

  갑자기 누군가 울기 시작한다

  누군가 토하기 시작한다  누군가 서서  등을 두드리기 시작한다  누군가 제자리에서 왔다 갔다 하고  몇몇은 그러한 누군가들을 따라 하기 시작한다

 

  대화는 건물 밖에서 해주시기 바랍니다

 

  정숙이라 쓰여 있었고  그래도 우리는 한동안 웅성거렸는데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소란하기만 했는데

 

  창고를 빠져나가기 전에 정숙을 떠올리고  누군가 입을 다물기 시작한다  누군가 그것을 따라 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조금씩 잠잠해지다가  더 계속 계속 잠잠해지다가  이윽고 우리는 어느 순간 완전히 잠잠해질 수 있었다

 

< >

 

 

물류창고

 

 

 

  처음 보았는데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창고였다.

  누가 여기서 만나자고 했지

  불평이 나왔지만 왜 그런지

  여기를 드나드는 사람들이 많아서

  창고지기가 없어 이 건물은 언제 들어섰나요

  물어볼 수도 없지만

  우리가 모두 모였을 때 우선 사진을 찍었다.

  벌써 삐뚤빼뚤 줄들을 섰다.

  혼자서도 찍고

  단체 사진도 찍었다.

  우리는 잠시 앞을 실천했다.

  자 다시 한번 앞을 보세요.

  처음 들었는데 어디선가 들은 음성이었다.

  다시 앞을 향했을 때 앞은 사라지고 없었다.

  기념사진을 찍는 동안에는 몇 사람이 잠들었다.

  이제 무얼 하면 좋을까

  기념 후 곧장 사라져버린 카메라

  남은 사람들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창고가 폭발하기까지는 아직 약간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밖으로 나가려는 사람은 없었다.

  창틀에 마침 나뭇잎 하나 앉아 있었는데

  더 이상 날지 않는 잎이었다.

 

< >

 

이디야 커피

 

 

 

  몇 시쯤인지 알 수 없었다. 여기서부터는

  걸어가야 하는데

  길이 엉망이구나 나는 고개를 돌렸다.

  흰 셔츠를 입은 남자가 이디야 커피 앞에서 자꾸 내 말

들려 내 말 들리냐구 하면서

  폰에 대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의 입술이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과연 그의 말은 들렸는데 사람을 잘못 보았어 하는 말

도 잘 들렸다.

  여기서부터는 걸어가야 하는데 날벌레들이

  가로등을 엉망으로 망쳐놓았다.

  한 늙은 여자가 바닥에 앉아 있었고 술에 취해

  술을 더 가져오라고 했다.

  그것은 사실이라고 했다.

  당장 오라고 했다.

  오늘은 더 걸을 수 없구나 나는 휘파람을 불었다.

  여기서부터는 걸어가야 하는데

  몇 시쯤인지 알 수 없었다. 여자는 다시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했다. 모두들 죽음으로부터 다시 한번

  튕겨 나와

  무언가로 죽음을 내리치고 있었다.

  밤새 싸놓은 짐 보따리들이 엉망이구나

  흩어진 천 쪼가리들이 돌아다니며 엉망이구나 나는 한

숨을 쉬었다.

  남은 셔츠들을 가지런히 개기 시작했다.

 

< >

 

물류창고

 

 

 

  나는 언제나 같은 꿈을 꾸어요

  차를 타고 지나가고 있고요

  붉은 컨테이너로 지어진 물류창고를 보아요

  그것은 도시 곳곳에 솟아 있어요

  뜨거운 태양이 하루 종일 걸려 있어도

  녹지 않아요 녹슬지 않아요

  뜨거운 태양이 이지러져도

  도무지 움직이지 않아요

  창고 옆에 한 사람이 서 있어요

  창고 밖에 서서 그는 창고 안에 있는 어떤 사람고 이야

기해요

  창고에서 창고로 건너뛰어 다녀요

  아무것도 흐트러뜨리지 않고

  창고를 떠나 창고로 다시 돌아오는 즐거운 작업

  내가 그를 향해 손을 흔들면

  창고 안에서 사람들이 일제히 같은 잠에 들어요

  창고에서 다음 창고로 최선을 다하는 그들의 명랑한

명상

  붉은 컨테이너 물류창고는 여름 내내

  녹지 않아요 녹슬지 않아요

 

 

이수명 시인: 1994년 작가세계로 등단. 시집, 『새로운 오독이 거리를 메웠다』 『왜가리는 왜가리놀이를 한다』 『붉은 담장의 커브』 『고양이 비디오를 보는 고양이』 『언제나 너무 많은 비들』 『마치』 『물류창고』 『도시가스』
연구서, 『김구용과 한국 현대시』 평론집, 『공습의 시대』 시론집, 『횡단』 『표면의 시학』 『내가 없는 쓰기』
번역서, 『낭만주의』 『라캉』 『데리다』 『조이스』 등이 있다. 박인환 문학상, 현대시 작품상, 노작문학상, 이상시문학상, 김춘수시문학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