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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불행이 건드리고 간 사람들 늘 혼자지."
헤르베르트의 시구를 자주 떠올렸다.
한 사람을 조금 덜 외롭게 해 보려고
애쓰던 시간들이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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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청혼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별들은 벌들처럼 웅성거리고
여름에는 작은 은색 드럼을 치는 것처럼
네 손바닥을 두드리는 비를 줄게
과거에게 그랬듯 미래에게도 아첨하지 않을게
어린 시절 순결한 비누 거품 속에서 우리가 했던 맹세
들을 찾아
너의 팔에 모두 적어줄게
내가 나를 찾는 술래였던 시간을 모두 돌려줄게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벌들은 귓속의 별들처럼 웅성거리고
나는 인류가 아닌 단 한 여자를 위해
쓴잔을 죄다 마시겠지
슬픔이 나의 물컵에 담겨 있다 투명한 유리 조각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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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장수 하느님께 네가 좀 졸라다오
오늘 이 봄날
봄에 죽은 아이
막을 수 없는 일들과 막을 수 있는 일들
두 손에 나누어 쥔 유리구슬
어느 쪽이 조금 더 많은지
슬픔의 시험문제는 하느님만 맞히실까?
부드러운 작은 몸이 그렇게 굳어버렸다
어느 오후 미리 짜놓아 굳어버린
팔레트 위의 물감, 종이 울린 미술 시간
그릴 것은 정하지도 못했는데
초봄 작은 나뭇잎에 쌓이는
네 눈빛이 너무 무거울까 봐 눈을 감았다
좋아하던 소녀의
부드러운 윗입술이 아랫입술과 만나듯
너는 죽음과 만났다
다행이지, 어른에게 하루는 배고픈 개들
온종일의 나쁜 기억을 입에 물고 어디론가 사라져버
리는
그러니 개장수 하느님께 네가 좀 졸라다고
오늘 이 봄날
슬픔의 커다란 뼈를 던져 줄 개들을
빨리 아빠에게 보내달라고
세월이 어서 가고 너의 아빠도
말랑한 보랏빛 가지를 씹어 그걸 쉽게 삼키듯
죽음을 삼킬 테지만
그전에, 봄의 잠시 벌어진 입속으로
프리지어 향기, 설탕에 파묻힌 이빨들은
사랑과 삶을 발음하고
오늘은 나도 그런 노래를 부르련다
비좁은 장소에 너무 오래 서 있던 한 사람을 위해
코끼리의 커라란 귀같이 제법 넓은 노래를
봄날에 죽은 착한 아이, 너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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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나는 볼이 통통하고, 얌전한 귀 뒤로
긴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 아이슬픔의 대가족들 사이에서도 힘을 내는
씩씩한 엄마아빠의 아이
그날 이후
아빠 미안
2킬로그램 조금 넘게, 너무 조그맣게 태어나서 미안
스무 살도 못 되게, 너무 조금 곁에 머물러서 미안
엄마 미안
밤에 학원 갈 때 휴대폰 충전 안 해놓고 걱정시켜 미안
이번에 배에서 돌아올 때도 일주일이나 연락 못 해서
미안
할머니, 지나간 세월의 눈물을 합한 것보다 더 많은 눈
물을 흘리게 해서 미안
할머니랑 함께 부침개를 부치며
나의 삶이 노릇노릇 따듯하게 익어가는 걸 보여주지
못해서 미안
아빠 엄마 미안
아빠의 지친 머리 위로 비가 눈물처럼 내리게 해서
미안
아빠, 자꾸만 바람이 서글픈 속삭임으로 불게 해서
미안
엄마, 가을의 모든 빛깔이 어울리는 엄마에게 검은 셔
츠만 입게 해서 미안
엄마, 여기에도 아빠의 넓은 등처럼 나를 업어주는 뭉
게구름이 있어
여기에도 친구들이 달아준 리본처럼 구름 사이에 햇빛
이 따듯하고 펄럭이고
여기에도 똑같이 주홍빛 해가 저물어
엄마 아빠가 기억의 기둥들 사이에 매달아 놓은 해먹이
있어
그 해먹에 누워 한숨 자고 나면
여전히 나는 볼이 통통하고, 얌전한 귀 뒤로 긴 머리카
락을 쓸어 넘기는 아이
슬픔의 대가족들 사이에서도 힘을 내는 씩씩한 엄마
아빠의 아이
아빠, 여기에는 친구들도 있어
이렇게 말해주는 국어 선생님도 있어
"쌍꺼풀 없이 고요하게 둥그레지는 눈매가 넌 참 예
뻐"
"너는 어쩌면 그리 목소리가 곱니,
생머리가 물 위의 별빛처럼 그리 빛나니"
엄마! 아빠! 벚꽃 지는 벤치에서 내가 친구들과 부르
던 노래 기억나?
나는 기타 치는 소년과 노래 부르는 소녀들 사이에
있어
음악을 만지는 것처럼 부드러운 털을 가진 고양이들과
있어
내가 좋아하는 엄마의 밤길 마중과 분홍색 손거울과
함께 있어
거울에 담긴 열일곱 살, 맑은 내 얼굴과 함께, 여기 사
이좋게 있어
아빠, 내가 애들과 노느라 꿈에 자주 못 가도 슬퍼하
지 마
아빠, 새벽 세 시에 안 자고 일어나 내 사진 자꾸 보
지 마
이빠, 내가 친구들이 더 좋아져도 삐치지 마
엄마, 아빠 삐치면 나 대신 꼭 안아줘
하은 언니, 엄마 슬퍼하면 나 대신 꼭 안아줘
성은아, 언니 슬퍼하면 네가 좋아하는 레모네이드를
타줘
지은아, 성은이가 슬퍼하면 나 대신 노래 불러줘
아빠, 지은이가 슬퍼하면 나 대신 두둥실 업어줘
이모, 엄마 아빠의 지친 어깨를 꼭 감싸줘
친구들아, 우리 가족의 눈물을 닦아줘
나의 쌍둥이, 하은 언니 고마워
나와 손잡고 세상에 와줘서 정말 고마워
나는 여기서, 언니는 거기서 엄마 아빠 동생들을 지
키자
나는 언니가 행복한 시간만큼 똑같이 행복하고
나는 언니가 사랑받는 시간만큼 똑같이 사랑받을 거야
그니까 언니, 알지?
아빠 아빠
나는 슬픔의 큰 홍수 뒤에 뜨는 무지개 같은 아이
하늘에서 제일 멋진 이름을 가진 아이로 만들어줘 고
마워
엄마 엄마
내가 부르고 싶은 노래들 중 가장 맑은 노래
진실을 밝히는 노래를 함께 불러줘 고마워
엄마 아빠, 그날 이후에도 더 많이 사랑해줘 고마워
엄마 아빠, 아프게 사랑해줘 고마워
엄마 아빠, 나를 위해 걷고, 나를 위해 굶고, 나를 위해
외치고 싸우고
나는 세상에서 가장 성실하고 정직한 엄마 아빠로 살
려는 두 사람의 아이 예은이야
나는 그날 이후에도 영원히 사랑받는 아이, 우리 모두
의 예은이
오늘은 나의 생일이야*
* 유예은은 2014년 4·16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안산 단원고 2학년 3반 학생입니다. 10월 15일, 안산의 치유 공간 '이웃'에 예은이 부모님과 하은, 성은, 지은 세 자매, 그리고 친구들이 모여 아이의 열일곱번째 생일 모임을 했습니다. 그날은 쌍둥이 언니 하은이의 생일이기도 했습니다. 생일 모임에 참석하지 못한 예은이를 대신하여 시인 진은영이 예은이의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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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은아, 진실과 영혼은 너무 가볍구나
거짓됨에 비해,
진실과 영혼은 너무 가볍구나
모시옷처럼
등 뒤에 돋는 날개처럼
천칭자리 위에서 스무살이 된 예은에게
슬픔은 가장 사랑스러운 보석일 거요.
모든 사람이 그리 아름답게 슬픔을 착용한다면.
-셰익스피어, 《리어왕》
너와 만났다면
가을 하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을 거야
서정주나 셰익스피어, 딜런 토머스
너와 같은 별자리에서 태어난 시인들에 대해
종이배처럼 흘러가버린 봄날의 수학여행과
친구들의 달라진 옷맵시에 대해
나뭇잎이 초록에서 주황으로 빠르게 변하는 그늘 아래
우리가 함께 있었다면
너는 가수가 되는 꿈에서 시인이 되는 꿈으로
도에서 라로, 혹은 시에서 미로
건너뛰었을지도 모르지
노래에서 노래로, 삶에서 삶으로
그것들은 서로 가까이 있으니까
누군가의 손으로 흩어졌다
그 손에 붙들려 한곳에 모여드는 카드 패들처럼
그러면 흰머리가 많이 늘어난 아빠는
네가 2학년 3반이었는지, 4반이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아
얘야 그때 네가 몇 반이었더라,
허허 웃으며 계속 되물으셨을 텐데
예은아 이쪽의 새치 좀 뽑아다오, 웃으셨을 텐데
너는 이제 다 커버렸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는 똑같다
바뀐 그림 하나 없이
어린 소녀에서 어린 청년으로
아이에서 농민으로
바다에서 지하도로, 혹은 공장으로
너무 푸른 죽음의 잎들
가을인데, 떨어지지 않고 전부 붙어 있다
그렇지만 네가 사는 별,
모든 것이 제때에 지는 법을 배우는 거기에서
얘야, 너의 시인들은 여전히 아름다운 시를 쓰고 있겠지?
바람 소리로 귀뚜라미의 은반지로 침묵의 소네트로
예은아 거기서도 들리니? 아빠의 목소리가
"얘들아, 어서 벗자 이건 너희들이 입기엔 너무 사이즈
가 큰 슬픔이다"
예은아 거기서도 보이니?
모두에게 제대로 마른 걸 입히려고 진실의 옷을 짓는
엄마가
너와 친구들 얼굴이
맑은 물, 돌들 밑
은빛 물고기처럼 숨어 있다 나타난다
모두 알고 있다 안 보이지만 너희가 거기 있다는 걸
예은아, 진실과 영혼은 너무 가볍구나
거짓됨에 비해,
진실과 영혼은 너무 가볍구나
모시옷처럼
등 뒤에 돋는 날개처럼
양팔 저울의 접시에 고이는 네 눈물
너의 별 쪽으로 더 기울어지려고
광장 위 가을 하늘이 자꾸만 태어났다 쏟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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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무엇이든 다른 것이 시작될 때마다
예언은 빛나며 빗나갈 테니까
방을 위한 엘레지
1
꿈이 죽은 도시에서 사는 일은 괴롭다
누군가 살해된 방에서 사는 일처럼
태양계의 세번째 행성이
지구라는 것을 알고 있듯
봄이 겨울을 이기고 온다는 것과 그 반대도 참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뒤에 오는 것이 승리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화성이여 지구를 이기길
내일이여 오늘을 이기길
썰물이여 밀물을 이기길
그러나 봄, 여름 뒤엔 다시 겨울이고
무지 노트와 지구본 연필깎이와 제본한 《예술의 규칙》
을 한 줄로 늘어놓은
내 방 책상 위로
가장 나중에 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게 무엇이든 다른 것이 시작될 때마다
예언은 빛나며 빗나갈 테니까
여기는 방이 아니라 거리이며
나는 다만, 여기를 걸어서 지나가는 거라고
벽과 벽 사이를 서성이며 생각하는 것이다
2
이 방에는
유채꽃 들판으로 노란 죄수복 입은 봄이 달려 나오는
사진이
걸려 있다 고인의 사진처럼
너는 책상에 기대어
여기는 바다처럼 푸른 바다이며
"푸른색으로 뛰어들어 나는 고통의 잠수부가 되었다"고
쓰는 대신
물 위로 떨어지는 눈송이나
눈 덮인 마당에 떨어지는 담뱃불 같은 것을 생각한다
사라지고 꺼지는 것들로
잠시 환해지는 관념의 모서리
방은 눈을 녹이는 뜨거운 손을 닮았다
방은 죽음을 쫓아 달리는 커다란 개다 겨울이 죽고 봄
이 죽고
죽음은 항상 너무 빠르다
개의 헐떡거리는 혓바닥 위에서 담뱃불이 꺼지며 빛
난다
너는 흰 도미노처럼 서서
쓰러지는 방들의 흔들리는 어둠을, 우리를 응시하는
영원한 뒤통수들
물끄러미 바라본다
25일 오후 2시께 경기도 안산 화랑유원지에 차려진 세월호 사고 희생자 정부합동분향소 들머리에 베트남에서 온 아버지 판만차이(62)씨와 딸 판록한(24)씨가 손팻말을 들었다. 세월호 침몰 사고로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는 사위 권재근(51)씨와 손자 혁규(6)군을 찾아달라는 것이었다. "한 달이 넘게 언니의 장례식도 못 치르고 있어요. 함께 장례라도 치를 수 있게 빨리 형부와 조카를 찾아주세요." 딸 판록한씨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 김일우 기자, 《한겨레》 2014년 5월 26일 자
진은영 시인: 2000년 《문학과사회》에 「커다란 창고가 있는 집」 외 3편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 시작. 시집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우리는 매일매일》 《훔쳐가는 노래》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가 있다.
대산문학상, 천상병 시문학상, 현대문학상, 김달진문학상 젊은시인상, 백석문학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