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의 시인들

■ 박지일 시인의 시 ■ 사카린 프로젝트 & 아기 새 & 빈방은 나의 정원 그네 하나 · · · · · · & 오드아이 신드롬 & 립싱크 하이웨이

by 시 박스 2024. 4. 14.
728x90

 

 

나와 전혀 관계 아니하는, 꿈틀대는 구름

 

부정하라 나는 부정되라. 나는 물결 하였다. 백만 송이 내가;
물결 하는 클럽이었다. 미러볼 아래에서 나는 기형 하
였다; 그러니까 머리가 둘 넷···

 

사카린 프로젝트

 

 

  홀로 탱고 하였다. 미러볼이 무대를 기록하였다. 내 자

리 그곳에 없었다. 미러볼 나를 부정하였다. 나는 클럽

지붕 위 배회하는 형광 나비였다.

  나는 나의 꿈속으로 도망하였다. 어둠 흔드는 탱고였

다. 내가 탱고 하는 것인지 탱고가 나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한 송이씩 붉은 장미 흐드러졌다. 엉킨 스텝이

장미에게 탱고 가르쳤다.

  나는 부정당한 백만 한번째 장미였다. 장미는 백만 송

이 기어코 완성하였다. 심수봉은 나를 몰라. 나는 나를

부정하였다.

  미러볼 위에서 장미 홀로 탱고하였다. 나는 미러볼을 

부정하였다. 나는 나를 꿈속에서 끄집어내었다. 백만 송

이 흐드러진 이 클럽; 머리 하나 머리 둘 그러니까 나는

백만 송이 아래 기어 다니는 쌍두사였다.

  클럽은 나를 부정하였다. 백만 송이 클럽 아래 나는 기

어 다니지 아니하였다. 정원이 내게 도망하였다. 나는 정

원을 품어주었다;

  이 정원은 모래나 하얀 돌을 깔아 바다의 형상 떠올리

게 만드는 일본의 지정池庭 양식 참고하여 만들어졌으나

나는 모래나 하얀 돌 대신 붉은 장미 백만 한 송이를 배

치하여 나의 꿈속다운 특징을 지니게 하였다.

  쌍두사 나를 부정하였다. 백만 송이 장미 여전히 흔들

리는 정원에서 늘어나는 머리가 넷 여섯··· 나는 이 뱀의

여덟번째 머리였다;

  나의 순서 나는 부정하였다. 다섯 머리가 여덟··· 나는

대가리 늘려가는 뱀이었다. 나 홀로 탱고하였다. 나는

부정당한 백만 한번째 장미였다.

  백만 한 송이 정원은 지정 양식 잊지 아니하였다. 부정

하라 나는 부정되라. 나는 물결 하였다. 백만 송이 내가;

  물결 하는 클럽이었다. 미러볼 아래에서 나는 기형 하

였다; 그러니까 머리가 둘 넷··· 이 뱀을 읽어내는 눈동자

로부터 나는 시작하였다.

 

< >

 

휘파람이 지배한 공원이었다. 내 이름 울려 퍼진다.
부르고 싶은 이름 많다. 부르는 사람들 많다.
공원으로 간다.

 

 

아기 새

 

 

 

  총성 울려 퍼진다. 다시 시작이다. 휘파람이 지배한 공원이었다. 내 이름 울려 퍼진다. 부르고 싶은 이름 많다. 부르는 사람들 많다. 공원으로 간다. 셰퍼드가 필요하다. 취한 걸음으로 다가와도 좋다. 취한 눈빛으로 바라봐도 좋다. 목줄을 떠올려도 된다. 의자, 실크, 산 능선, 셰퍼드 필요 없다. 부르는 사람들 많다. 여름의 여덟번째 태풍 시작되었다. 부르고 싶은 이름 없다. 어항을 흔들고 싶다. 금붕어 깨우고 싶다. 어항이 나를 흔들어도 좋다. 대형 전광판 위로 흰 매듭 짓고 떠나는 바람. 오륜기 육륜기 칠륜기··· 대륙은 많을수록 좋다. 방아쇠에 손가락이 목을 건다.

 

< >

 

나는 너를 시작할 수 없다

 

 

빈방은 나의 정원 그네 하나 끝없이

흔들려야만 했어요

 

 

 

  나 그러나 너르 시작할 수 없다 너를 떠올리면 망가지

는 확신 때문이다

 

  빈방이라 명명한 곳

  이곳에는 우거진 양치식물과 무수한 손금과 물로 짠

퀘벡 양탄자 흐르고 있고

 

  나는 내가 지시한 공간이 허물어지는 것을 바라본다

 

  나는 네가 가장 아름답게 흔들릴 수 있는 공간을 가리

킨다 보행자로도 밀어두고 표지판 젖혀두고 주행 표지판

쓰러뜨리며

 

  그곳에 너를 배치한다

 

  그러나 너를 시작할 수 없다

  너구리 탱자나무 고르끼 히또리······ 다만 네게 어울

리는 별명이라도 지어주려던 것뿐이었어

 

  물살은ㅇ 손깍지 껴 수몰 나무를 필사적으로 붙들기 시

작한다

  너의 설계도가 지연된다

 

  너 흔들리고 있습니다 네가 흔들리고 있어요

 

  그러나 저기 자세히 보라 너의 추상적인 운동성 너의

해학적인 회전축 너의 초현실주의적 높이

  이곳에서는 너 하나를 시작할 수 없다

 

  나 장면을 전환한다

 

  청둥오리를 뒤따른다 청둥오리는 너의 흐름이었고 너

의 궤적이었고 너를 난사한 산탄총이었으나

 

  나는 너를 시작할 수 없다

 

  그러나 너는 바람에도 분절되는 풍선 인형의 관절

  구부리기 좋은 각도를 가졌다

 

  그것이 너를 부르게 만들고 동시에 형용할 수 없는 이

인칭, 결점 없는 네가 떠오르지만

 

  너는 물에 잠긴 솜사탕, 양옆 없는 사람

  과거와 미래를 포기한 책상

  미동 없는 백금 반지

 

  너를 시작할 수 없어서 공중의 모든 발목을 자른다

 

  상상을 헛디디며 너는 시작한다

 

  내게서 멀어지는 풍경

 

< >

 

폭설 휘몰아치는 창밖···
나 다가가네, 다가가고 있어,
멱살 움켜쥐어야 해, 저 사람 일으켜 세워야 해,

 

오드아이 신드롬

 

 

 

  숲속이었어 일인용 숲이었어, 잎사귀 덮고 누운 요정들, 구름 베고 잠든 흰 새들, 푸르고 붉은 열매들 공중에 정지된 숲이었네, 숲이었어, 끊임없이 중얼거려야 해. 직전의 풍경 떠올려야 해, 바깥의 집중력 끌어와서··· 자꾸만 내게로 기우는 공중, 굴러와 눈앞 폭발하는 요정들, 끊임없이 다이빙하는 저 흰 새들··· 아아 무력한 숲이라네, 이렇게 중얼거릴 수밖에 없나, 풀리는 무릎. 감기는 눈, 깊은 잠 빠져들 수밖에 없나, 꿈속 나무처럼 곤히 잠든 나, 당신과 나 백년 전의 돌과 백 년 일 초 전 돌처럼 아득해, 닫힌 눈꺼풀 틈새 빠져나온 눈부신 토성의 고리, 팽팽하게 돌아가는 도롱뇽알, 폭설 휘몰아치는 창밖··· 나 다가가네, 다가가고 있어, 멱살 움켜쥐어야 해, 저 사람 일으켜 세워야 해, 혀는 나의 유일한 증인, 엉성한 포옹, 일제히 정지하는 눈발··· 비탈 모르는 새처럼 나 내게서 미끄러질 수는 없나, 한 바퀴··· 한 바퀴 더 팽팽하게··· 전속력으로··· 둥글게 몸 만 태아가 쥔 유리구슬 하나만큼, 저기 요정들 노래하는 숲이 지척인데··· 나는 나의 마지막 목격자, 닫히지않는눈꺼풀

 

< >

 

아 그러니까 나와 전혀 관계 아니하는 구름이 어찌 나
와 상관해보겠다는 듯 꿈틀대는 저 하늘을, 빌딩, 혜화,
신촌 거쳐 어데 립싱크 하이웨이를, 미치지 아니하고야

 

 

립싱크 하이웨이

 

 

 

  정체 모를, 립싱크 하이웨이와 비슷한

 

  그러니까 영상, 흰 유령 전속력으로 달리던

 

  그러니까 가드레일 옆면에 뿔 갈며 달려가던 마콘다

라 불리는 영물을, 은빛 드릴을

 

  그러니까 사라져버린 소진돼버린 어쩜 프랑케슈타인

의 관자놀이에 나사 박아놓을 생각을

 

  그러니까 지나가버린 분명함으로부터 불분명함을, 나

의 화를 돋우는, 저 대추나무 깎아 만든 도마 위로 탕탕

내려치는 식칼의 리듬이

 

  그러니까 화양시장에서 구매한 민어든 조기든 멜론이

든 종 구분 없이 흡뜬 눈알 속에 무릎 박아 놓고 웅크린

채 프리징 된 파리 한 마리의 자세가

 

  그러니까 벗어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해? 새벽 세 시 삼

십칠 분에 갇힌 내가 17, 832헤르츠 목소리 떠나지 못해

대충 잡도리 친 생선 살이나 발라 먹는 내가

 

  아 그러니까 백반집 구석에서 죽은 이를 구실 삼아 입

구까지 축 늘어진 손톱을 가위로 썰어내는 내가 립싱크

하이웨이라 불리는 일종의 과거 아닌 과거를 반복하는

내가

 

  그러니까 탁탁 튀어 오르는 손톱이 보여주는 화산 초

입에서, 없는 화산 만들어서라도, 정상석 위에 헬리콥터

떴다. 저 헬리콥터, 프로펠러 내팽개치고 하이웨이로 도

망한다고 외치는 내가

 

  그러니까 바람; 응집과 해산; 뭐 중간에 껴서 이도 저

도 못 하다 눈 코 입 반쪽을 짐승에게 뜯겨버린 내가, 지

퍼 올리고 내릴 때마다 딱딱하게 굳는 날숨을 톱으로 썰

어대는 내가, 방공호를 골몰하려 드는 내가, 내 뒤통수

탁탁 내려치는 내가

 

  아 그러니까 나와 전혀 관계 아니하는 구름이 어찌 나

와 상관해보겠다는 듯 꿈틀대는 저 하늘을, 빌딩, 혜화,

신촌 거쳐 어데 립싱크 하이웨이를, 미치지 아니하고야

어디 한번 미쳐볼 생각에 매초 미쳐 있는 이 나를. 립싱

크 하이웨이는 사진으로 남겨 자신의 곁에 두기에 이르

렀다; 

 

박지일 시인: 2020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립싱크 하이웨이가 공유하는 전제는 세상의 모든 우연을 하나의 논리, 하나의 진리로 수렴하는 간단하고 손쉬운 대처법이 아니다. 이곳, 일인용 숲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의 자리가 끝내 마련되지 않은 장소다. ······[시집, 립싱크 하이웨이(문학과지성, 2021) 표지 날개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