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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은 영원히 아무것도 잊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을 영원히 잊게 될 것이다
재세계 reworlding
지나간 일은 다 잊자
지나간 일은 다 잊는 거야
그는 이 대사의 다음 장면에서 죽었다
영화 속에서 영화는 계속될 것 같았고
그 사람은 영원히 아무것도 잊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을 영원히 잊게 될 것이다
휴대폰 불빛이 신경 쓰여서 도무지 영화에 집중할 수
없었어
극장에 꽉 들어찬 어둠은 그 작은 불빛 하나 숨겨주지
못하고
주인공은 12월 밤거리의 쏟아지는 불빛 때문에 맞은
편에서 다가오는 것도 알아보지 못한다
오래된 거리를 걸으면 가로수들은 영원히 자랄 것 같
다 정원사의 손에서 떨어지는 잎사귀와 뚝뚝 분질러지는
나뭇가지의 미래를, 잔디가 깎이는 동안 우수수 떨어지
는 머리통을 다 기억하면서
12월엔 어디에서나 커다란 나무에 작은 전구들이 주
렁주렁 매달리고
불빛이 들어오고
빛을 끄고 불을 켜면 다 똑같아 보이는
세계의 근원은 이제 전기라고
인간은 빛보다 한참 느린 속도로 움직이면서 원하는
만큼의 빛을 만들 수 있다
운전자가 죽은 다음에도 계속 달릴 자동차를 가질 수
있다
이것은 생명의 낭비를 줄여주는 기술입니다
그러나 너무 환한 곳에서는 생명을 낭비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높은 조도에서는 사물을 정확하게 인지하기 어렵기 때
문입니다
밝게 빛나는 하늘과 흰옷을 입은 사람을 구별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세계는 점점 더 낮은 조도로 진화하고 있어
매년 20퍼센트 정도의 광량이 감소하고 있대
희박한 태양광 아래에서 낮아지는 조도의 세계에서 우
리는 함께 희박해지겠지 정말 좋은 일이다 좋은 미래가
오면, 도로 위에서 공들여 식별해야 할 산 것들이 없는
그런 미래가 온다면 생명이 낭비되는 일도 없을 거야
앞서 걸어가는 사람의 등에 죽은 짐승의 등이 포개져
있다
너는 어쩜 죽어서도 이렇게 따뜻하고 부드러운지
짐승의 등을 어루만지며
아름답다 감탄하는 사람들이 모두 사라진 자리에서 아
름다움은 시작되었다
이것은 전기로 작동되는 신이 들려준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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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발로 유리잔을 밟으면
와장창 터지는 웃음소리
슬픔을 깨뜨리며 슬픔을 기억하기
미래의 불행을 미리 깨뜨리기
이야기를 깨뜨리기*
시간이 흐르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서로의 주머니에 몰래 넣어둔 친구들아
실패하지 않는 사랑
남겨지는 사람이 되지 않기
이런 것만이 우리의 소원은 아닐 거야
오른발로 유리잔을 밟으면
와장창 터지는 웃음소리**
슬픔을 깨뜨리며 슬픔을 기억하기
미래의 불행을 미리 깨뜨리기
깨진 컵을 버리는 여자들과
새 컵을 찬장에 채워 넣는 여자들
우리는 와장창 웃으며 미래로 간다
세상에는 검은 모래의 해변도 있어
백사장이라는 말을 몰랐더라면 우리는
검지도 희지도 않은 모래를 뭐라고 부를까 골몰할 수
있었겠지
세계는 거꾸로 익어가는 과일 같다
한입 베어 물면 과즙이 뚝뚝 흐르는 것으로부터
이가 들어가지 않는 단단함을 향해
우리는 미래에게 목덜미를 잡힌 것 같다
뒤로 걸으면서 앞을 보기를 멈출 수 없는 것 같다
앞쪽 현실을 바라보는 사이 또 다른 현실이 흔들리며
흩어지네***
우리는 어떤 인과도 배운 적 없는 사람들처럼
어떤 것도 인과로 저장하지 않는 사람들처럼
걷고 웃고 먹고 잠드네
바깥의 여름 속을 걸으면 더위의 인과를 묻고 싶어져
정말 덥다,
여름이니까 덥지
이런 대답 대신
새롭게 열리는 땀방울을
이상한 질감의 피부와 미친 햇빛을
앞사람의 손에 들린 봉지 속에서 흔들리는 복숭아 두
알을
똑같은 교복을 입은 애 둘이 새끼손가락을 걸고 신호
를 기다리는 것을 본다
여름 나무의 빼곡한 잎이 부드러운 천장을 만든다
여름 바람이 만드는 틈 사이로 쏟아지는 햇빛
구멍 난 천장이 두 개의 새끼손가락에 동그랗게 걸리
는 것을 본다
초록 불이 켜지면 사방에서 쏟아지는 얼굴들
먼지 속에 숨을 수도 없이 환한 여름에
드러난 사랑의 부스러기들
사람들은 이렇게나 다른 것을 모두 얼굴이라고 불러
왔네
또 이렇게나 모두 다른 사랑을 어떻게 불러왔는지
똑바로 익어가는 과일처럼 부드러운 세계를
흘러가는 시간을 본다
우리는 기호가 아니다
사랑의 형식들을 오른발로 밟으면
와장창 터지는 모두 다른 웃음소리
* 리베카 솔닛, UC 버틀리 저널리즘 대학원 졸업식 축사.
** 유대인 결혼식에는 식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유리잔을 바닥에 놓고 신랑이 오른발로 밟아 깨뜨리는 풍습이 있다.
『 탈무드 』 에서 기인한 이 풍습에는 깨어진 유리잔처럼 돌이킬 수 없는 것이 결혼임을 상징하는 것, 예루살렘 성전 붕괴의 슬픔을 기억하는 것, 큰 소리를 냄으로써 악마들을 만족하게 해 결혼을 방해하지 않도록 하는 것 등의 의미가 있다.
*** "한쪽 현실을 바라보는 사이 또 다른 현실이 흔들리며 흩어질 것이다" (에이드리언 리치, 『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 』 , 이주혜 옮김, 바다출판사, 20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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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다 늙는다는 건 뭐지?
우리가 자라온 시간
늙어갈 시간보다 오래된 꽃나무 밑에서
우리는 여전히 질문으로만 답할 수 있는 질문을 잔뜩
가진 사람들
영원에서 나가기
우리도 다 늙었나 봐
꽃 사진을 찍으며 함께 웃던 친구들아
우리는 열심히 웃느라 늙는 일도 깜빡한 것 같았네
그런데 다 늙는다는 건 뭐지?
우리가 자라온 시간
늙어갈 시간보다 오래된 꽃나무 밑에서
우리는 여전히 질문으로만 답할 수 있는 질문을 잔뜩
가진 사람들
친구의 품에 안긴 작은 사람의 이마에서 꽃잎은 얼마
나 거대해지는지
손바닥에 떨어진 꽃잎은 얼마나 작고
얼마나 쉽게
두 손가락 사이에서 형태를 잃어버리게 되는지
나는 발이 없는 것만이 계속 자란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우리와 세계가 서로 단단하게 묶인 레이어라면
같은 비율로 커지다 먼저 멈출 수밖에 없다면
우리의 작은 손으로는 나뭇잎 하나 망가뜨리기 어려울
텐데
우리는 참 쉽게 깨질 텐데
매일 2만 마리의 새가 유리 벽을 통과하려다 죽는대
자그마한 밭을 가진 작은 새들
다 큰 새들은
다 자란 다음에도 새롭게 거대해지는 풍경이 의아해
이 세계는 형태가 결정하는 물질로 이루어진 레이어다*
도시의 유리 벽들은
끝없이 자라는 나무에게도
두 발로 나뭇가지를 움켜쥔 새들에게도 당혹스러운 속
도로 자란다
기다리는 시간 앞에서 숫자는 얼마나 길게 늘어지는지
동전을 세는 손 안에서 숫자는 얼마나 작아지는지
살아 있었던 것들을 세는 마음 앞에서 숫자는 얼마나
거대해지는지
유리문을 가볍게 회전하고 우리는 문 안으로 미끄러진다
우리는 너무 많은 영화를 너무 많은 스크린을 봤다
프레임 안으로 쉽게 미끄러진 다음
화면 바깥을 잊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강화유리는 안전하게 깨지는 유리이기도 하지
설탕 결정처럼 우수수 쏟아지는 유리 파편 아래의 세계를 본다
가느다란 뼈와 연약한 살 부드러운 깃털
굳어가는 새는 새의 형태를 잃어버리지 않는다
우리는 창문 안쪽에 서서 열매가 주렁주렁 열린 커다란 나무를
보고 있다
과일과 설탕을 2 대 1의 비율로 끓여 걸쭉한 상태의 액체로 만드
는 것은 과일을 보존하는 가장 오래된 방법이다
집이 불에 타오를 때만 비로소 건축 구조를 목격할 수 있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열매들이 나무에 매달린 채로 썩어갈 때
우리는 꽃의 모양을 본다
* "물질이 형태를 결정하고 동시에 거의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리는 물체들이(예를 들면 돌덩어리, 물 한 방울, 그리고 일반적으로 모든 자연적인 것들) 있는 반면 다른 것들은(항아리, 곡괭이,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모든 것들) 형태가 물질을 결정하는 듯이 보인다"(조르조 아감벤, 『내용 없는 인간』, 윤병언 옮김, 자음과모음, 2017).
** 같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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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불안은 벽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옆에서 발생하는 풍경의 모든 순간을 볼 수 있다면 불안하지 않을 거라고
글라스 하우스*
눈동자는 눈앞의 풍경을 비추고 연인의 눈동자는 등 뒤의 풍경을 비춘다 여름 숲에서 연인의 눈 속은 유리창 너머의 실내처럼 무성한 나뭇잎 사이 한 줌의 어둠으로만 보인다
인간의 불안은 벽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옆에서 발생하는 풍경의 모든 순간을 볼 수 있다면 불안하지 않을 거라고 치과에서도 눈을 감지 못하는 그의 연인은 말했다
그는 여름 내내 일렁이는 나뭇잎 그림자만 보다가 유리로 된 집을 지었다 그 집은 벽 대신 네 개의 커다란 창을 가졌다 눈동자의 실내 같은 그 집에서는 안팎이 사라지고 옆만 남았다 두 사람은 유리의 옆이 되어 포개진 풍경이 모두 같은 질감으로 요약되는 세계를 어루만졌다
유리에 부드럽게 흘러넘치는 오후의 햇빛은 우리의 얼굴처럼, 나뭇잎처럼, 이불처럼 매끄럽고 차갑네
보이는 모든 걸 만질 수 있다면 보이는 대로 믿게 되겠지
그런데 왜 왼손이 쥔 옆의 손은 오른손이 만지고 있는 눈앞의 손과 다를까
믿음을 넘치는 온도가 두 사람의 손안에 가득 차 있다
그러나 믿음을 넘치는 것을 가장 믿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고 마는 어린 마음
눈빛은 사물의 뒷면을 깨면서 나아간다 연인의 눈빛은 피부를 투명하게 만든다 나란히 침대에 누워 자욱하게 천장을
떠다니는 사물의 뼛가루를 헤아리며 어린 마음은 부서질 수 없는 뼈를 가진 사람처럼 두려움 없이 웃는다
이제 우리는 너무 가까워서 서로의 눈에 비친 풍경으로만 어디에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네
눈동자에 비친 붉은빛 위로 같은 붉은빛의 눈동자가 포개지고 있어
투명한 피부의 연인을 안으면 팔이 녹았다
불타는 숲을 비추는 유리는 얼린 불꽃처럼 펑펑 깨졌다
차갑고 매끄러운 불꽃이 찬란하게 쏟아진다
큰 숲과 숲의 모든 것이 불탄 여름이었다
잿더미 사이를 걸으며 흩날리다 더 깊은 데로 가라앉는 검은 잎들을 본다
미래 바깥에서 어린 마음이 낡고 있다
어린 마음은 무성한 유리 조각 속에서 자꾸 태어나는 것처럼 누워 있다
* 미국 건축가 필립 존슨이 설계한 사면이 유리로 된 주택. 그는 반세기 동안 파트너 데이비드 휘트니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낸 이 집에서 숨을 거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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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 같은 빛*
겨울에는 옷의 무게까지 견뎌야 해
팔짱을 끼려던 팔을 슬며시 내려 손을 잡는다 커다란
오리털 점퍼 끝의 손은 너무 작고 가볍다
작은 것들이 모여서 큰 게 된다는 말은 너무 흔하고 흔
한 말은 작은 일들끼리 흔해빠질 때까지 모여서 이룬 일
어깨를 맞대고 붙어 서서 맞댄 어깨가 무성해지도록
빛을 생각하면 빛이 거기 있다
강 건너 아파트의 하나 둘 환해지는 격자로부터 얼굴이
와르르 쏟아질 것 같다 얼어붙은 한강의 이편과 저편에
서 오리배 두 마리가 서로를 보고 있다
오리에게도 마음이 있다면 이 얼음은 모두 부서질 거야
지난 주말에도 광장에는 몇만 개의 불빛이 모였습니다
지워지는 사람들과 남는 빛들 사라지는 온기와 남는 불
들 사람들은 주말이면 오래된 궁전과 오래된 정원 오래
된 돌담 길을 따라 걷기도 한다 언제고 언제까지 이럴 건
지 모르겠습니다 유턴 차선에서 핸들을 꺾는 주름진 손
이 있다
시간을 견디며 점점 아름답게 완성되어 가는 장소와
지금을 갉아먹으며 점점 더 미숙해지는 시간이 함께
늙고 있다
선생님 천국이 준비되셨습니까
아주 먼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바로 지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란히 신호를 기다리고 있다
두 손을 잡으면 너무 좁은 골목만 가득한
옷깃이 다른 옷깃을 파고들 때
찢어진 옷 사이로 젖은 빛들이 쏟아졌다
* 아네스 바르다 감독의 「낭트의 자코」(1991)에서 어린 자크 드미가 본 영화 중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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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이미지가 세계에 뚫린 구멍이라면
그곳을 지나갈 빛이 있다면
김리윤 시인: 2019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시집 『투명도 혼합 공간』(2022)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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