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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무엇이 방어 자세인지 알아챌 수 있겠니?
눈 내리는 체육관
- 사라진 유치원
유치원이 사라진 자리에는
지하로 내려앉은 체육관뿐이었다.
-창문이 있어.
너와 나는 마법에 걸렸다.
창밖으로 뜨거운 눈이 내리고 있었다.
-알고 있어.
나는 예고된 카운터를 날릴 때에도 머뭇거리던 사람.
-알고 있어?
글러브를 단단히 조이며 네가 말했다.
-이것도 연습이야.
그녀의 비극적인 삶이 우스꽝스러운 자세로 떨어져 내렸다.
-무기력도 연습이지.
창밖으로 눈이 내리고 있었다.
흔들린 자세 위로 또다시.
아이들이 보이지 않자 울음도 없어졌다.
지운 걸까 사라진 걸까.
지웠다면 무엇을,
사라졌다면 어떻게,
여전히
왼쪽과 오른쪽을 혼동하며.
눈이 내리고 있었다.
내가 고장난 장난감을 고치는 동안.
저리 가서 다른 거 하고 있어!
작은 새처럼 기다리던 아이의 영혼이.
내가 무심코 쫓아 버린 침묵이.
무게를 잊은 채 일렁이던 체육관에서.
나는 어퍼컷을 말하며 여전히 잘못된 훅을 날리는 사람.
입이 하는 일들은 왜 모두 입술이 하는 일과 같이 느껴질까.
나는 고장난 장난감처럼 팔을 뻗어 존재하지 않는 공중
의 새들을 그러모아 다시 안았다.
'훅'이라는 말은 마음을 모두 끌어당겨 발음되는 자세 같아서.
너는 새가 되어 날아갔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불현듯 가슴이 뜨거워졌다.
여기서 무엇이 방어 자세인지 알아챌 수 있겠니?
유치원의 흔적이 남은 체육관에서.
실은 눈부신 햇살 같은 것은 들 필요가 없는,
내가 더듬더듬 말 대신 체력을 키워 가는 체육관에서.
실은 아름다운 문장을 기다리는 동안.
사각의 링 속에서는 무너지듯.
*
너의 오른쪽과 나의 왼쪽이
손과 발을 잃고 무너지는 무력한 세계에서.
'스파링'이라는 말은 심장에 내리는 눈 같아서,
나는 두렵고 설레고 부끄러웠다.
아주 느리게 너의 글러브가 내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공격도 방어도 없는 내 삶은, 너에게 어떤 타격감을 주었을까.
눈이 내리고 있었지.
꿈속에서는.
눈썹이 사라졌다.
그녀는 눈썹이 사라지는 꿈을 꾸었다.
먼저 기억되고 나중에 사라지는 삶이라면.
우리는 내리고 없었다.
폭력은 저주처럼 우리를 압도했으므로.
나에게는 수치스러운 자세가 있어요.
우리는 마법에 걸렸고
눈은 내리고 있었다.
살아 있어서 처음으로,
나는 너에게서 공격과 방어의 자세를 배웠다.
놀이와 공작을 배운다던 유치원에서 아이들은 문자와
셈을 배웠고
나는 유치원이 사라져서 행복했다.
자세한 표정을 가질수록
삶의 비참을 숨길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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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입을 찢었다. 입을 잊은 분노로 가득 찬 세계.나는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은 세계로 되돌아온다.
눈 내리는 체육관
-독감
꿈속에서 나는 꿈을 잊었어. 꿈에서 깨었어도 꿈을 찾
아 헤매는 중이었지.
어디에서 왔을까. 가장 처음 간판을 켠 사람의 처연한
얼굴빛이 아이의 얼굴을 적셨다. 서러움에 울먹이던 얼굴,
고열이 훑고 간 얼굴, 오랜 절망에 침윤당한. 서글프고 서
럽고 화창한 얼굴. 사실 그건 일요일을 지나오며 생긴 월
요일의 몸살. 나는 돌아온다.
육아는 미리 몸을 다 써서, 더는 마음은 채울 수 없는 일.
그날 아이의 유치원에서 나는 아이 셋을 낳고 우울증
으로 목숨을 끊은 누구의 이야기를 들었다. 아이를 두고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누구는 말했다. 혹시 당신은 그
런 일 생각할 수 조차 없이 가혹하게 몰아치는 당연한 희
생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나요. 존재하는 너덜너덜한
죽음의 살아 있음에 대해. 당신은 내게 화가 났느냐고 물
었다. 아이를 낳고 디스크에 걸린 누구는 드디오 피부가
괴사해 수술을 받았다고. 누구도 그 누구를 원망하지 않
았음을. 당신은 바랐지만. 제발 누구라도 원망해 봐요. 나
의 소망은 입을 잃었다.
그날 나는 아무렇지 않았어요. 유리에 갇힌 것처럼 지
나가는 사람들만 하염없이 바라보았고. 가지고 못하고 멈
추지도 못한 채 뭘 해야 할지 찾아 두리번거렸지만. 이상
했다. 유리 안에 있는 아이는 보호받는 중일까, 우리라는
밖으로부터 격리된 것일까. 우리를 따돌리려는 소망인 걸
까. 나는 웃었고 여느 때처럼 일을 마치고 갑자기 18층으
로 올라가 뛰어내렸어요. 나는 그런 누구의 이야기를 엿들
었어요. 이제 아무도 그 당연함을 생각하지 않은 채도, 누
구의 가장 가까운 사람부터 한 명씩 동정을 나누기 시작
하겠군요. 매 순간 내가 벌인 장례식에서, 나는 허기진 입
을 벌렸다. 먹고 싶은 게 아니라 단 한 번이라도 가지고 싶
었던 여유라는 상징을 향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입을 찢었다. 입을 잊은 분노로 가득 찬 세계.
나는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은 세계로 되돌아온다.
글러브를 끼면 시를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의 소망은, 약해짐으로써 강해지는 것.
사람들은 자기보다 약한 것들을 가두어 두고 보길 좋
아한다고.
나는 한없이 약해져야 했고 그래서 강해져야 했다.
기억할 수 없는 것들은 더는 기록할 수 없는 소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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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는 서서히 지워져 갔다.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우리는 오늘 하루만치의 먼지.
매일 치워지고 치워졌다.
눈 내리는 체육관
- 책장
언니가 떠나고 먼지 쌓인 책을 읽기 시작했다.
탁 트인 베란다와 눅눅한 거실 벽을 가득 채우고만 있던,
냉기 같고 냉소 같던, 냉랭하고 냉담한 표정의 책들.
아이들이 자리를 비우고, 마침내 우리가 서로가 되어
만나던 시간들을
언니가 모두 버렸다.
언니는 당당하게 가해자가 되어 놓고, 누군가 고의로
담아 놓은 뜨거운 물에 잘못 손을 담근 사람처럼 펑펑 놀
란 눈물을 흘렸다.
책의 깊은 한숨이 찢긴 마음의 모서리를 채웠다.
마음이 아파. 마음은 자신 모두를 버렸다.
언니는 서서히 지워져 갔다.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우리는 오늘 하루만치의 먼지.
매일 치워지고 치워졌다.
마음이 되어 버린 책들이 집을 비우자, 비어 버린 집은
체육관이 되었다.
남겨진 책장은 땀을 흘렸고.
끝끝내 마음을 버리지 못한 책들은 마음에 남겨져 짠
눈물을 머금었다.
지워진 문장의 어디쯤에선가
언니는 가해자의 마음이 되어 나타났다.
왜 그랬어요! 그런 변명은 통하지 않아요. 우리가 함께
했던 시간이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나는 바닥난 체력을
회복할 수 없었지만, 가해자의 일상은 아무렇지 않게 돌
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책들이 녹아 버린 집은 체육관이 되었다. 언니는 내게
체육관을 가져다주고 사라졌다.
언니를 버리고 나는 가끔
남겨진 마음은,
우리는 어디로 갈까.
나는 내게 네가 될 수 없었을까.
작게 불러 보았다.
언니.
언니.
이런 마지막이라니 너무 슬프잖아요.
오래된 네가 가끔 꿈에 찾아왔다.
죽을 만큼 크게 다치거나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나는 삶을 함께하고 싶었는데
너는 늘 죽음을 들고 찾아왔다.
쓸 때, 나의 숨은 한 걸음에 죽음을 향했다.
그 비좁은 한 권의 책이 머물 자리는 나에게 체육관철
럼 넓었다.
< >
목을 양손으로 감아 나를 넘어뜨리며 아이가 말한다.
엄마를 사랑해서.
설거지하고 있는 내 등 뒤에서 멋대로 ······
눈 내리는 체육관
-엄마의 일기
-네가 명치를 쳐서 죽는 줄 알았어.
-사람은 결국, 언젠가 한 번은 죽어.
남편과 통화를 하며 설거지를 하다가 물이 튀어 배를
적시고 결국, 바닥으로 피처럼 쏟아졌다.
무력감이.
바지를 벗어 바닥으로 넘친 물을 닦았다.
허리 아래로는 공격하면 안 됩니다.
나는 삶이 잘 되지 않을 때조차 공정해지려고 노력했
어요.
지난밤 남편의 명치를 친 건, 폭력을 사랑으로 둔갑시
킨 한 인간의 정신 착란에 대한 경고였을 뿐.
-한 번만 봐주는 거다.
-누가 할 소릴.
# 애처롭다
너는 왜 사랑할 수 있으면서 사람일 수 없는 걸까.
이해도 없이 연민하려 혀를 욱여넣는 징그러운 입처럼.
어떻게 그 무수한 공허와 동공을, 서로가 만든 허공에
내던질 수 있는 걸까.
하염없이 많은 것들이 하나도 없는 것들이 될 때까지.
사랑한다고 말해 봐.
그리고 죽도록 지겹다고 속삭여 봐.
누가 하는 소리인지 모를 때까지.
# 애달프다
더 이상 어떤 방식으로도 아름다울 수 없을 때
우리는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 걸까.
존재는 어떻게 우리여야 하는 걸까.
하얀 물방울무늬 잠옷을 입은 내게 딸이 속삭였다.
엄마, 엄마한테서 눈이 내려.
착란, 착란, 착란.
착한 남편처럼 내리는 세상에 없는 눈.
#애잔하다
양치질을 시킬 때와 밥을 먹일 때 아이는 입을 크게 벌
렸다.
우리는 더없이
입을 벌리고 울고 사랑하고
울렸다.
-엄마가 이제 죽어?
-그래도 되겠니?
# 애절하다
목을 양손으로 감아 나를 넘어뜨리며 아이가 말한다.
엄마를 사랑해서.
설거지하고 있는 내 등 뒤에서 멋대로 바지를 내려 손
가락을 하나씩 쑤셔 넣던 남편이 말한다.
엉덩이가 예뻐서.
열병처럼. 나를 뜯어먹으며 번지는 달뜬 추문. 눈은 저
주처럼 바지를 적셨다.
마음을 잡아먹은 사람처럼
웃었다.
# 애틋하다
아이들은 애써 만들어 준 눈사람을 부수고.
강해지면 마음도 단단해지는지 확인했다.
서로에게 이기지도 못할 주먹을 휘둘렀다.
어리석은 어른들처럼.
나는 글러브를 끼며 당신에게 묻고 싶었다.
몸속에도 눈이 오나요.
어느 날엔가.
# 어렴풋하다
너에게도 내가 필요하겠지.
나에게도 내가 절실해.
나의 마음속 가득 자라난 엄마들에게
강해지는 법을 가르쳤다.
< >
시인의 말
나는 항상 인생을 망치는 꿈을 꿨어요.
아름답지 않아서,
더 이상 아름다운 것에서 사랑을 구할 수 없을 때는
구걸하는 기분으로
누구도 온전히 사랑할 수 없다는 걸 알았을 때는
그 더러운 기분으로
내가 가진 환멸을 검열해야만
안심할 수 있는 나를 보았다.
2022년 9월
조혜은
조혜은 시인: 2008년 현대시 등단. 시집, 『구두코』 『신부수첩』 『눈 내리는 체육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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