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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시인들

■ 정현우 시인의 시 ■ 스콜 & 소멸하는 밤 & 마들렌 & 유리 숲

by 시 박스 2024. 4.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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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들렌

 

나열할 수 없는 슬픔은 왜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걸까, 모든 비는, 두 눈은.

 

 

스콜*

 

 

 

  옥상 위에서 유리를 껴안고 뛰어내리는

  사람,

  너는 이마에 빗물을 맞고 서 있다.

  인간이 가진 울음을 모두 흘릴 수 없다는 것을

  무심히 뛰어내린 철로 위에서 괴로움을 나눠도

좋을 너를

  그곳에 오래도록 세워두고 돌아온다.

 

  우리는 거대한 침엽수 아래

  빗소리를 듣는다.

  잠기기만을 기다리는 마을과

  수몰하는 나의 죄를,

  단 한 번 수거해가는 감긴 두 눈을

  신의 손이라 아름답다고 말하면

  어떻게든 이해가 되는 것,

  기도하는 만큼 내 것이 아니게 되는 것.

 

  왜 울고 난 뒤 두 눈은 따스할까

  그토록 뜨거운 심장을 가져본 적이 있다고 믿기

위해

 

  늘, 그 자리 없는 것들은 빗소리가 난다. 먼 구름

아래, 검은 빗물, 박수 소리 같은 것들, 소리가 나지

않는 것과 소리가 나는 것으로 세상은 나뉘니까. 소

리 없이 사람이 가고, 사랑하는 이들은 간밤의 꿈을

모두 써버리고 언 손을 녹이던 가장 추운 겨울은 짧

았다. 아, 두 뺨을 감싸며 빗속을 걸어가던 밤이여,

 

  잘 가, 라는 말 대신 차오르고 마는 강수, 슬픔이

표정을 지을 수 있다면 네 눈빛을 하고, 빈 의자에

앉아 창가를 보는 사람이 너라는 것을 나는 안다.

나열할 수 없는 슬픔은 왜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걸까, 모든 비는, 두 눈은.

  너는,

  이제 집에 가자,

  빗속에 마주 서서 아무 말이 없고

  빗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물끄러미 울고 있는 너를 본 것 같기도 한데,

  겨울 창가는 겨울 볕이 잘 든다.

 

* 기존의 커튼콜과는 달리 특정한 장면을 시연하고 관객이 그것을

촬영할 수 있게 하는 커튼콜.

 

< >

 

 

내가 없는 당신의 곁,
밤의 창가에는
너무 많은 슬픔이 유리알처럼 글썽이고.

 

소멸하는 밤

 

 

 

  흰 어둠이 잠들지 않는 거리, 

  나는 나를 만나러 가는 길, 

  지난 사랑이 모두 헐거워지는 창문 아래, 

  눈물은 들어 올리지 못하는 것, 

  그러니 우리를 울게 하는 것들은 

  힘껏 하늘을 올려다보게 하는 것입니까, 

  어둠을 지우려 우는 별자리들이 

  느리게 첫눈으로 떨어집니다. 

  겨울 구름 위로 숨 하고 내미는 입술, 

  흰 두 뺨이 젖듯이, 

  베갯잇에서 우우 하고 우는 얼굴, 

  가장 죽고 싶을 때와 가장 살고 싶을 때의 얼굴은 

  밤마다 꿈속에서 끝없이 다가오는 얼굴들, 

  죽은 아이들과 죽은 엄마들과 

  죽은 모두가 투명한 이파리처럼 흔들릴 때,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나의 추모는 내가 할 수 없어서 나는 슬퍼야 합

니까. 

  낯빛들이 피어오르는 숲, 

  별자리는 어둠 속에 죽은 나를 벗어놓습니다. 

  나를 사랑했던 만큼 당신의 얼굴에서 

  나는 잠시만 슬플 수 있겠습니까. 

  두 뺨에 떨어트리는 당신의 울음과 

  등 뒤로 쏟아지는 정오의 빛이 

  오래도록 눈매에서 머물다 갈 때, 

  나를 붙든 시간에 모두 울어버렸습니다. 

  어떤 슬픔은 머무르는 그대로 우리를 살게 하고, 

  그대로 내버려두고 싶은 슬픔이 있어, 

  그러나 당신은 한 번도 울지 않은 사람처럼,   

  한 묶음 목화를 들고 내게 와주세요. 

  나는 이곳에 서성이다 당신의 차례를 

  말없이 나는 기다릴 뿐이에요. 

  당신의 꿈속에서 서 있을 뿐이에요. 

  내가 없는 당신의 곁, 

  밤의 창가에는 

  너무 많은 슬픔이 유리알처럼 글썽이고.

 

< >

 

천사는 졸린 두 눈을 비비고 나와 가끔
네가 살았는지 엿보고 가지

 

 

마들렌

 

 

 

  엉망과 둥근 마음을 굽는 

  안녕,

 

  더 가벼운 쪽으로 새들의 목을 쥐는 

  오븐 위의 천사들,

 

  해변에서 자장가를 부르는 흰 그림자 

  조개껍질이 붙은 새장을 닫고 뒤쫓는 새들,

 

  너무 많이 부풀어서는 안 돼 

  인간은 너무 먼 것들로 반죽이 된 

  조개,

 

  기억 위에 올려두어 꿸 수 없는 

  흑진주, 

 

  그물에 흘러내린 빛들이 

  수초들의 물그림자를 감쌀 때 

  슬픔을 오래 유지하려는 

  물거품, 

  그걸 너는 숨이라고 해

 

  천사는 졸린 두 눈을 비비고 나와 가끔 

  네가 살았는지 엿보고 가지 

  먼 곳의 짓무른 마음을 문지르는 조가비.

 

  꿈에 붙어 두 팔을 자른 기억 같은 것들을 

  나란히 떠오르게 만든다.

 

  조개가 밀어낸 보드라운 하늘, 

  혈관에 빛을 푼 홍채 

  빼곡히 진주알이 홀수가 된 고백들.

 

< >

 

나는 언 발을 거두고, 아
직 해야 할 말이 남은 영혼을 물어온다. 반사되지
않는 빛은 투명하게 잠영해, 겨울이 들어갈 수 있는
빈 곳을 찾아 나를 끌어내리는,

 

 

유리 숲

 

 

 

  오르골, 인형의 관절에서 도는 빛, 흐르지 못한

시간까지 듣지, 발아래 흔들리는 겨울 수초, 창가에

턱을 괴면 푸른 발굽 소리, 나는 언 발을 거두고, 아

직 해야 할 말이 남은 영혼을 물어온다, 반사되지

않는 빛은 투명하게 잠영해, 겨울이 들어갈 수 있는

빈 곳을 찾아 나를 끌어내리는, 빛을 열고 가는 기

도, 말해요, 머리 위로 떠 있지 않은 새들의 높이를,

벽시계를 타고 오르는 나팔의 떠지지 않는 눈을, 겨

울 집은 모두 창문이 없다, 겨울나무가 짙푸르게 우

는 소리, 작은 우주 속의 한 톨, 내가 아는 주검들을

부르면, 존재는 멈추지 않고 모든 사랑의 순서가 사

라져, 흐르지 않는 요람, 하늘을 뒤덮은 폭설 위에

집을 짓고, 강수가 차오르면 무엇이 나를 대신할까,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쥔 투명한 얼음 편지, 달아

나는 유리의 빛, 빛에 쓸려가는 우리의 시간.

 

< >

 

정현우 시인: 201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나는 천사에게 말을 배웠지』 『소멸하는 밤』.
에세이, 『우리는 약속도 없이 사랑을 하고』가 있다. 2019년 동주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