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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시인들

■ 이해존 시인의 시 ■ 이물감 & 꼼치 & 벙커 & 쉰 & 四인칭

by 시 박스 2024. 4.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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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사장에 은박지를 깔고 눕다

 

무방비 상태에서 불현듯 솟아나는 것
온통 나를 골라내는 순간
남겨지는 것

 

이물감

 

 

 

  원숭이가 털을 고르듯

  쭈그려앉아 바닥에 놓인 신문을 읽듯

  쌀알을 휘저어 돌을 골라낸 적이 있다

 

  고르는 것과 골라낸 것을 갈라놓고

  같은 색깔이 될 때까지

  쌀알이 나를 집중할 때까지

 

  촉감이 파고든다

  모래사장에 깔아놓은 은박지

  앉은 자리를 향해 오므라드는 바닥

  모래사장보다 따갑다

 

  옷에 달라붙은 고양이 털을 떼어내다

  고양이 털로 짠 스웨터를 생각한다

 

  가장 가까웠던 사이가 핏기를 잃어가는 순간

  나늘 본뜬 차가운 손을 만질 때

  낟알 껍질이 목에 걸린 것처럼

  몸속에 돋아나는 촉감

 

  밥을 먹다 돌을 깨문다

  무방비 상태에서 불현듯 솟아나는 것

  온통 나를 골라내는 순간

  남겨지는 것

 

  식탁에 앉아 잠시 선명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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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날은 더 심각한 것을 떠올린다 
8천 미터의 극단적인 수압을 사는 꼼치는
물 밖으로 나오는 순간
녹아버린다

 

꼼치

 

 

 

  암막 커튼 사이로

  햇살이 방 안을 엿본다

 

  돌덩이를 뒤집으면

  깊은 잠에서 깨어나는 벌레처럼

  어둠을 찾아 몸을 숨긴다

 

  돌덩이는, 어둠은

  벗어날 수 없는 대기의 지붕

  저마다의 빛을 닫아걸고

  목숨을 쌓아온 것은 아닐까

 

  이런 날은 더 심각한 것을 떠올린다

  8천 미터의 극단적인 수압을 사는 꼼치는

  물 밖으로 나오는 순간

  녹아버린다

 

  끝없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상승이다

  일생의 시간대를 압축해 놓은

  층위를 벗어날 때

  나타나면서 사라지는

 

  거기까지가 한 목숨인 것들

  가쁜 호흡이 내 몸을 집어삼킨다

  천장이 두꺼운 장막처럼 위태롭고 안전할 때

  방 안으로 새어 들어오는 빛

 

  쓸려나가는 어둠이

  나를 발굴한다

  젖히면 이미 거기에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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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뜨고 감는다
당신은 있거나, 혹은 없다

 

벙커

 

 

 

  몸을 묻고 빛을 들이쉰다

 

  빈틈없이 가득 찬 밤이

  내일을 지탱할 공간을 만들었다

 

  눈을 뜨고 감는다

  당신은 있거나, 혹은 없다

 

  오늘의 동료는 어떻게 내일의 적이 되는가

  숨죽이고 있던 누군가가 문을 두드린다

 

  한줄기 햇살

  안에서 가슴을 치는 소리

  동공이 수축하는 순간 ···

 

  당신은 음화처럼 빛을 등지고 나타난다

  나는 어둠을 들킨 채

  눈을 뜬다

 

  당신은 있거나, 혹은 없다

 

  눈동자 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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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표정을 손에 쥐고 오랫동안 들여다본다

 

 

 

 

  죽어 있던 치아가

  나뭇가지처럼 힘없이 부러졌다

 

  멈춰진 식탁 위에 햇살이 번지고

  유리잔에 물방울이 맺힌다

 

  공중에 떠 있는 투망이

  물속을 향해 덮쳐 오는 줄도 모르고

 

  피가 돌지 않는 이물감을

  오랫동안 혀끝으로 두드렸다

 

  두려움과 나는 같은 자리에 서서

  남아있는 시간을 달아나다 얼굴을 마주치며

 

  밑동만 남은 뿌리를 단단히 붙들고 있는 살점

  그 살점도 물러지고

  구멍 속으로 어둔 시간이 고인다

 

  커다란 그물코 앞에서

  갇힌 줄도 몰랐던 시간

  거미줄처럼 촘촘히 눈을 뜬다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표정을 손에 쥐고 오랫동안 들여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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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나의 얼굴을 하나씩 몰아내는 일. 깨진 조각들
속에서 얼굴을 찾아가는 일.

 

四인칭

 

 

 

  내가 수많은 나로 나뉘어 미끄러지듯 옮겨 다니는 자

유로움.

 

  영가(靈駕)에게 몸과 마음이 허물어지면 또 다른 영가

들을 불러들이는 통로가 된다: 영가들의 들고나는 소리

가 점점 커진다. 한 사람의 몸속 어딘가에서 출몰하자

다른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고 엄마 뱃속에서 죽은 태아.

가슴과 다리에 칼을 맞고 죽은 깡패. 소홀한 제사, 노여

움으로 자리 잡은 시어머니.

 

  하나씩 불러내 어르고 달래고 꾸짖으며 가슴속 박힌

돌들을 끄집어낸다. 명치끝에서 끓어오른 응어리를 뱉어

낸다.

 

  아기 영가는 어르고 달래고, 깡패 영가는 존재를 드러

내려 일부러 싸움을 건다. 일단 존재가 드러나야 영가와

의 진정한 싸움이 시작된다.

 

  한몸이 되려는 영가와 四인칭의 내가 부르르 고개를

털고 또다시 격전장으로 돌아온다. 부서진 몸처럼 환해

질 때까지 어지러운 한판.

 

  수많은 나의 얼굴을 하나씩 몰아내는 일. 깨진 조각들

속에서 얼굴을 찾아가는 일.

 

  신장대의 댓잎이 일제히 다른 표정으로 소리 지른다.

 

이해존 시인: 201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으로 『당신에게 건넨 말이 소문이 되어 돌아왔다』 『이물감』이 있다. 제14회 한국시협 젊은시인상, 제5회 풀꽃문학상 젊은시인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