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그러므로 안 보이는 중심을 향해 집요하게 흙을 파고
드는
제 몸의 지하에 대하여.
편집증에 대해 너무 오래 생각하는 나무
밤새도록 점멸하는 가로등 곁,
고도 6.5미터의 허공에서 잠시 生長을 멈추고
갸우뚱히 생각에 잠긴 나무.
제 몸을 천천히 기어오르는 벌레의 없는 눈과
없는 눈의 맹목이 바라보는 어두운 하늘에 대하여,
하늘 너머의 어둠 속에서 지금
더 먼 은하를 향해 질주하는 빛들에 대하여,
빛과, 당신과, 가로등 아래 빵 굽는 마을의
불꺼진 진열장에 대하여,
그러므로 안 보이는 중심을 향해 집요하게 흙을 파고
드는
제 몸의 지하에 대하여.
텃새 한 마리가 상한선을 긋고 지나간 새벽 거리에서
너무 오래 생각하는 나무.
< >
난간들, 나는 온힘을 다해 아주 오래된 멜로디를
떠올렸으나 네거리의 저 거대한 주유소,
그리고 붉은 불빛의 편의점 앞에서
결국 뒤돌아보게 되리라, 결국 뒤돌아
보는 그 순간 나는 이번 눈빛을 지니게 될는지
절규
모든 것은 등뒤에 있다.
몇 개의 그림자, 그리고
거리의 나무들은 침묵을 지키거나 아무도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만 몸을 떨었다.
곧 네거리에 서 있는 거대한 주유소를 지나야
할 테지만 나는 아무래도 기나긴 페이브먼트,
이 낯선 거리의 새벽 공기가 다만 불안하였다.
천천히 붉은 구름이 하늘을 흐르기 시작했으며
흐릿한 전화 부스에는 이미 술 취한 사내들
어디론가 가망 없는 통화를 날리며 한량없었으므로
나는 길 끝에 눈을 둔 채 오 분 후의 세계를
다만 생각할 수 있을 뿐, 어느 단단한 담 안쪽
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믿을 수 없는 고음역의
레퀴엠, 등뒤를 따라오는 몇 개의 어두운
그림자, 쉽게 부러지는 이 거리의
난간들, 나는 온힘을 다해 아주 오래된 멜로디를
떠올렸으나 네거리의 저 거대한 주유소,
그리고 붉은 불빛의 편의점 앞에서
결국 뒤돌아보게 되리라, 결국 뒤돌아
보는 그 순간 나는 이번 눈빛을 지니게 될는지
두 손으로 두 귀를 막고 어떻게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를는지
다만 몇 개의 그림자, 그리고
등뒤의 세계.
< >
나는 바지 입은 구름, 물의 몸을 지녀
몇 번의 출렁임으로도 곧
쏟아질 듯한
나는 바지 입은 구름
바지 입은 구름*
나는 바지 입은 구름,
형체를 지니지 않습니다
때로 가을 하늘 선선히
산책하기를 즐기지만
나는 바지 입은 구름,
문득 어두워져 가는 몸과 더불어
그대 곁을 떠도는
황혼의 그림자입니다
때로 흐린 공기 저편으로
그대 여윈 손을 넣어보시길
그리고 천천히 그대 손가락 사이로
흘러다니는 구름의 몸,
몸의 구름,
아무런 형체를 지니지 못한
그 허랑한 마음을 바라보시길
바지 입은 구름과의 휘파람,
바지 입은 구름과의 노래
어느덧 한 사내의 일생이
흘러다니는 저녁 하늘
스스로를 이기지 못해
이제 그대 발목을 처연히 핥는
소슬한 저 가을비 속을
그대는 거닐어보시길
나는 바지 입은 구름, 물의 몸을 지녀
몇 번의 출렁임으로도 곧
쏟아질 듯한
나는 바지 입은 구름
* <바지 입은 구름>은 열혈 마야코프스키(1893~1930)의 장시 제목.
그와 완벽하게 무관한, 나의 형식. 바지 입은, 구름.
< >
문득 그의 일생을 관통한 납탄이
아주 오랜 세월의 오장육부를 지나 천천히
의탁할 무엇도 없는 황홀한 황혼으로 내리는 풍경을
그대는, 그대는 본 적이 있으십니까.
코끼리
- L에게, 마지막 엽서.
코끼리를 천천히 허물어지는 코끼리를
그대는 본 적이 있으십니까. 그날 저녁
14인치 브라운관을 황홀하게 적시던 사바나의 석양과,
코끼리의 한 생 너머에서 이제야 다른 생을 꿈꾸듯
너울거리던 코코야자수들의 풍경을
그대는 본 적이 있으십니까. 그의 거대한 육체가
황폐하지 말라 황폐하지 말라 중얼거리듯
무심하지만 지극히 섬세한 자세로 무너져가는
그 아늑한 풍경을,
멀리 있는 그대는 본 적이 있으십니까.
이제 천막 바깥은 간신히 기억해 낼 수 있는 이름들처럼
잦아들고 잦아드는 섬들. 그렇군요,
보도블럭을 들어보라 그곳에 해변이 있다,
라는 저 불란서 68세대의 구호에는 이상한
미신이 스며 있습니다. 迷信. 혹은 迷路.
헤매면서 붉어가는 바다에 일렁이는 섬들.
지금 인천에서 출항하는 바지선에 시선을 두고
온 밤을 침묵으로 소진하는 사내에게도
미신은 있습니다. 그의 술잔에 떨어지는
쓸모 없는 유성 하나. 그리고 그만두라, 그만두라,
중얼거리듯 황혼은 부두 쪽의 검을 공장들 뒤로
인천 하늘을 무심히 적십니다.
문득 그의 일생을 관통한 납탄이
아주 오랜 세월의 오장육부를 지나 천천히
의탁할 무엇도 없는 황홀한 황혼으로 내리는 풍경을
그대는, 그대는 본 적이 있으십니까.
그토록 강인하면서도 부드러운 다리가
그토록 섬세하게 구부러질 수 있다는 것을 믿기 위하여
누군가는 이 황혼녘의 부두로 스며든다는 것은.
그러므로 멀리 있는 그대여 그대 멀리 있는 이여,
가장 단순한 자세로 무너져가는 것들을
무심히 바라보시길. 서해 바다의 브라운관 속에서
처연히 무너지는 것들을, 무너져서, 무너짐으로써,
고요히 무너져가는 것들을.
< >
이장욱 시인, 소설가: 1994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내 잠 속의 모래산』 『정오의 희망곡』 『생년월일』 『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한』 『동물입니다 무엇일까요』 『음악집』 등이, 소설 작품으로 『기린이 아닌 모든 것』 『천국보다 낯선』 『캐럴』 『칼로의 유쾌한 악마들』 『트로츠키와 야생란』『뜨거운 유월의 바다와 중독자들』 등이 있다.
'한국의 시인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안미린 시인의 시 ■ 유령 기계 1 & 비미래 & 유령계 1 & ❄ & 양털 유령, 양떼지기, 아기 양, 아기 양 지킴 (1) | 2024.05.02 |
---|---|
■ 서대경 시인의 시 ■ 원숭이와 나 & 사유 17호 & 고아원 & 굴뚝의 기사 & 천사 (1) | 2024.05.01 |
■ 김석영 시인의 시 ■ 충돌과 반동 & 진짜 돌 & 선택 & 상상선 & 낮잠 속에서 꽃잎이 떠내려간다 & 가짜 돌 (1) | 2024.04.28 |
■ 이해존 시인의 시 ■ 이물감 & 꼼치 & 벙커 & 쉰 & 四인칭 (1) | 2024.04.27 |
■ 정현우 시인의 시 ■ 스콜 & 소멸하는 밤 & 마들렌 & 유리 숲 (1) | 2024.04.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