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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시인들

■ 서대경 시인의 시 ■ 원숭이와 나 & 사유 17호 & 고아원 & 굴뚝의 기사 & 천사

by 시 박스 2024. 5.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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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이클 크레이그-마틴, Untitled(Bra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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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와 나

 

 

 

  함박눈 내리는 밤

  원숭이와 나

  도깨비 선생 댁 처마 아래

  쪼그려 앉아 담배 피운다

 

  드르륵 창문 열리는 소리

  소복소복 쌓이는 흰 눈 위로

  도깨비 선생 뿔 그림자

  털북숭이 팔 그림자

 

  서 선생, 눈 구경 나오셨소

 

  원숭이가 내 어깨 위로 뛰어올라

  내 머리 위에 앉아

  도깨비 선생과 악수하고

  거 하늘 좋다, 저승길이 환하구먼!

 

  도깨비 선생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

  도깨비 선생 가래 뱉는 소리

  드르륵 창문 닫히는 소리

 

  한밤이 다 가도록

  나붓나붓 떨어지는 눈 그림자

  도깨비 선생 댁 처마 아래

  원숭이와 나

  쪼그려 앉아 담배 피운다

 

< >

 

사유 17호는 불붙이지 않은 담배를 입에 물고
차양 끝에 엉긴 물방울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때 절은 양복 차림에 비트겐슈차
인의 『철학적 탐구』가 옆구리에 끼어 있었다.
안녕
하십니까, 선생님 그가 말했다.

 

 

사유 17호

 

 

 

  사유 17호는 언제나 동네 17번 마을버스 정류장

을 떠나지 않았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내가 이 동

네에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비 오는 여름

날 정류소에서였다. 사유 17호는 불붙이지 않은 담

배를 입에 물고 차양 끝에 엉긴 물방울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때 절은 양복 차림에 비트겐슈차

인의 『철학적 탐구』가 옆구리에 끼어 있었다. 안녕

하십니까, 선생님 그가 말했다. 그곳엔 그와 나 둘

뿐이었으므로 나는 네, 안녕하십니까 대답해주었

다. 비가 내리는군요, 그가 말했다. 그렇군요, 내가

말했다. 어제도 비가 내렸습니다. 장마 기간이니까

요, 내가 대답했다.

 

  퇴근 후 정류장에 내렸을 때도 사유 17호는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불붙이지 않은 담배를 물고 차

양 끝을 바라보고 있었으나 그곳엔 더 이상 물방

울이 맺혀 있지 않았다.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그

가 말했다. 네, 안녕하십니까. 나는 그를 지나 구멍

가게에 들어가 담배를 샀다. 안녕하십니까, 선생

님. 가게 밖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자

네도 잘 있었나. 중학생쯤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가

낄낄거리며 말했다. 그 친구로 보이는 아이가 사유

17호의 입에 물린 담배에 불을 붙였다.

 

  다음 날도 비가 왔다. 사유 17호는 불붙이지 않

은 담배를 입에 물고 차양 끝에 엉긴 물방울을 보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네, 안녕하십니까.

내가 대답했다. 비가 내리는군요. 그렇군요. 어제도

비가 내렸습니다. 나는 말없이 버스에 올랐다. 차창

밖으로 차양을 올려다보는 그의 치떠진 눈을 바라

보았다. 그 눈을 바라보는 동안 나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동네 사람들이 왜 그를

사유 17호라 부르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존재에 익숙해진 지 반년쯤 지난 어느 날

사유 17호는 사라졌다. 동네 사람들 사이에서 그가

사라졌다는 소식이 잠시 떠돌다 곧 잠잠해졌다. 나

는 그가 앉아 있던 붉은색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보

았다. 차양 끝을 올려다보았다. 고드름이 맺혀 있었

다.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비가 내리는군요. 혼잣

말을 하다가 피식 웃음이 나왔다. 담배를 입에 물

고 라이터에 몸을 기울이는 순간 버스 차창 안에

서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그가 사유

17호임을 알아보았다. 그는 넥타이를 맸고 머리를

멋지게 빗어 올렸으며 한쪽 옆구리엔 검은 가죽가

방을 끼고 있었다. 버스가 출발했다. 나는 그의 무

표정한 시선 위로 빠르게 스쳐 가는 경멸 어린 미소

를 놓치지 않았다.

 

< >

 

이층에도, 삼층에도, 벽을 두드리고
고함을 지르는 우리가 있었어. 하지만 그 애는
우리가 아니었어. 그 애는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어.
침대 밑으로 드리운 우리의 그림자들이 일제히
쥐처럼 찍찍거렸어.

 

고아원

 

 

 

  어느 날 문이 열렸고, 그 애가 거기 서 있었어. 굴뚝의 기사. 안으로 들어선 그 애는 재빨리 벽을 기어오르기 시작했어. 침침한 형광등 불빛이 아이의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고 그것은 잿빛 벽 위로 망토 자락처럼 어둡게 일렁였어. 그 애는 천장 가로대위로 올라서더니 구석에 몸을 웅크린 채 우리를 내려다보았어. 우리는 그 애를 올려다보며 소리를 질렀어. 원장이 쾅쾅 벽을 두르렸고 경찰 제복을 입은사내가 공장 굴뚝에 숨어 있던 놈을 잡아 왔노라고원장에게 말하고 있었어. 우리는 계속 소리를 질렀어. 입 닥쳐, 원장이 소리쳤어. 더러운 고아 새끼들.고아 새끼들! 고아 새끼들! 우리가 합창했어.

 

  날마다 새로운 아이가 우리가 되기 위해 이곳에왔어. 날마다 새로운 잿빛 침대가 펼쳐졌고 원장은그것을 가리키며 누우라고 했어. 그러면 아이는 누웠고 곧 우리가 되었어. 우리가 전부 몇인지는 알수 없었어. 우리의 얼굴은 똑같아 보였고 우리의 목소리도 똑같게 들렸어. 똑같은 잿빛 침대 위에 우리는 누워 있었어. 이층에도, 삼층에도, 벽을 두드리고 고함을 지르는 우리가 있었어. 하지만 그 애는우리가 아니었어. 그 애는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어. 침대 밑으로 드리운 우리의 그림자들이 일제히쥐처럼 찍찍거렸어. 더러운 쥐새끼들! 원장은 소리쳤어. 그 애는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어. 천장 가로대의 어둠 속에서 그 애의 눈이 이따금 깜박이는 소리가 들렸어. 

 

  우리는 잠들어 있었어. 꿈속에서 그 애가 가로대를 붙잡고 살금살금 천장을 가로지르는 소리가 들렸어. 어느 순간 불길이 타오르는 굴뚝 안에 그 애는 있었어. 그 애는 기어오르기 시작했어. 차가운 재가 잠든 우리들의 머리 위로, 어깨 위로 내려앉았어. 아이의 숨죽인 웃음소리. 뜨겁지 않니? 꿈속에서 우리는속삭였어. 불길 속에서 그 애의 검은 망토가 펄럭였어. 그 애가 타오르는 손을 펼쳐 우리에게 손짓했어.굴뚝의 기사. 그 애는 굴뚝 내벽에 어른대는 작은 당나귀 그림자 위에 올라탔어. 당나귀의 갈기가 타오르고 있었어. 우리도 태워줘, 우리도 태워줘. 그 애의불타는 어깨가 굴뚝 아래로 노래하듯 떨어져 내렸어.멀어져가는 웃음소리. 그 애의 다리가, 타오르는 팔이 노래하는 새처럼 아래로 떨어졌어.

 

  다음 날 아침 차가운 복도를 맨발로 걸어가는 내가 있었어. 내 시린 발바닥이 있었어. 유리창에 비치는 내 얼굴이 있었어. 침대들 위에는 흰 천에 덮여 있는 내가 있었어. 나는 문을 나서며 마지막으로 고개를 돌려 그들을 바라보았어. 경찰차와 구급차가 고아원 마당에 모여 있었어. 바람에 날리는 눈가루가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어. 요나. 원장이내게 그렇게 말했어. 여덟 살. 여자아이. 나는 처음들어본 내 이름을 중얼거렸어. 굴뚝 그림자가 눈 위에 드리워 있었어. 굴뚝 꼭대기에 걸터앉아 다리를흔들고 있는 내가 있었어. 나는 고개를 돌렸어. 원장의 손을 잡고서 나는 내 부모가 될 사람들 앞으로걸어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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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뚝의 기사

 

 

 

  새벽

  도시의 잿빛이 옮겨 가는 소리

 

  허공은 나의 당나귀

  주둥이 내밀어 냄새 맡는다

 

  내 머리를 내 머리가 아닌

  머리들을

 

  나는 기어오른다

  다리 밑 졸졸거리는 폐수 위로

  사람들 그림자 하나둘 스쳐 지날 때

 

  어두운 철탑의 소리

  굴뚝 안으로 내 죽음의 쥐 떼가

  파고드는 소리

 

  그리고 일제히 공장 천장에 켜지는

  형광등의 깜박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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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의 몸에서 엷은 김이 피어올랐다.
그녀는 바닥에 쓰러져 꿈틀거리는 사내의 양쪽 어깨에 돋아 있는,
축축하게 젖은 앙상한
날개가 펼쳐진 채 힘없이 퍼덕이는 것을 내려다보았다.

 

 

천사

 

 

 

  

나직한,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그녀는 잠에서깨어났고, 누군가가 창밖에서 자신을 부르고 있음을 알았다. 엄습하는 고요 속에서 그녀는 홀린 듯침대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자신의 집이 아파트 10층에 위치해 있다는 사실은 그녀에게 떠오르지 않는다. 그녀가 창을 열고 뒤로 물러서자, 알몸의 사내가 얼음 무더기처럼 눈부신 냉기를 뿜으며 방 안으로 떨어졌다. 사내의 몸에서 엷은 김이피어올랐다. 그녀는 바닥에 쓰러져 꿈틀거리는 사내의 양쪽 어깨에 돋아 있는, 축축하게 젖은 앙상한날개가 펼쳐진 채 힘없이 퍼덕이는 것을 내려다보았다. 눈 녹은 검은 물이 지저분한 깃털 아래로 소리 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말없이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커피가담긴 머그잔을 양손으로 감싸 쥐고서 사내는 창턱에 걸터앉아 바깥을 바라보았다. 간간히 눈가루가유리창을 때리는 소리가 들렸다. 사내의 잿빛 눈동자가 자신에게로 옮겨 오자 그녀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녀는 불현듯 다가가 사내의 몸을 껴안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인다. 제 안에서 터져 나오려 하는, 비명인지 통곡인지 모를 소리를 그녀는 가까스로 억누른다. 「하마터면 얼어 죽을 뻔했네. 혹시 담배 가진 거 있어?」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사내가 말했다. 「걱정할 것 없어. 너는 곧 나를 잊게 될테니까」

 

  「너는 날 처음 본다고 생각하겠지만, 너는 날 잘알고 있어」 사내는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방 안을천천히 둘러보았다. 「예전에도 우린 여러 번 마주쳤지. 하지만 넌 모두 잊어버렸어. 네가 잊어버린다른 수많은 꿈처럼」 「넌 누구지? 왜 나를 찾아온거야?」 그녀가 속삭였다.

 

  사내는 창을 열더니 한 손으로 창틀을 붙잡은 채미소 지었다. 「지난겨울에도 넌 똑같이 물었었지.내가 떠나고 나면 넌 곧 잠에 빠져들 거야. 모든 인간이 그렇게 해.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하는 거야」 사내의 등 뒤로 어둡게 날개가 펼쳐졌다. 「그러니까 그게 너의 잘못은 아니지」 사내는 담배를 창밖으로 던지고, 눈을 찡긋해보인 다음 허공으로 몸을 떨어뜨렸다.

 

  그녀는 창으로 다가가 어둠 속을 노려보았다. 전신주 불빛 아래로 눈가루가 은빛 실처럼 흩날리고있었다. 그녀는 무거운 잿빛의 장막이 서서히 자신의 의식 위로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서둘러책상 위를 더듬어 백지를 펼치고 펜을 움켜쥐었고,그 순간 모든 것을 기억해냈다. 그녀는 쓸쓸히 미소지었다. 그녀의 팔이 힘없이 아래로 내려뜨려진다.의자에 몸을 기댄 채, 그녀는 가물거리는 의식 속에서 자신의 내면에 도사린 어떤 아득하고 눈부시게타오르는 존재의 눈을 마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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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경 시인: 2004년 ≪시와세계≫로 등단. 시집으로 『백치는 대기를 느낀다』 『굴뚝의 기사』 가 있다.
김준성 문학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