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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시인들

■ 김석영 시인의 시 ■ 충돌과 반동 & 진짜 돌 & 선택 & 상상선 & 낮잠 속에서 꽃잎이 떠내려간다 & 가짜 돌

by 시 박스 2024. 4.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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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 돌, 돌, 돌, 돌


무거움은 오브제로 단순하게 들고 있기. 미
신이었던 때가 있었지요. 죽은 자의 혼령이 떠돌아다닌다
고 믿었던 무당은 돌을 들어야 했지요.

 

충돌과 반동*

 

 

 

  할머니는 돌이 없는 곳에서 돌을 들고 있다. 모두가 돌

은 아니지만 돌이 존재하는 곳. 할머니는 꼿꼿이 서서 밖

을 내다본다. 나는 할머니의 돌을 바라본다. 사진 속의 할

머니는 하반신이 없다. 하반신이 있음에도. 돌이 할머니의

상반신을 들고 있다. 나는 그렇게 이해한다.

 

  돌은 바깥으로 떨어지지 않는다.

  액자 속의 두 손을 한 번 더 들여다보게 된다.

  반복이다.

 

  들고 있는 사물은 이제는 잊혔지만 돌이라 불렸던 것이

라고. 지구의 유물처럼 남은 거라고.

 

  거기는 돌이 없구나. 내가 손을 내밀자 거기에 돌이 있

다. 59세에 돌아가신 할머니는 30년생. 92세에 돌아가신

할머니도 30년생. 둘은 이제 동갑이 아니다. 

  "왜 돌을 들게 했어? 할머니가 무슨 힘이 있다고 저 커

다란 돌을 들었어?" 

  내 돌은 할머니의 돌보다 먼저 죽을 것이다.

 

  돌이 반복된다. 할머니가 액자에 들어 있어서. 돌을 든 

할머니가 액자가 쳐다봐서. 돌은 영영 눈을 맞추지 못할

텐데. 

  두 개의 액자를 나란히 걸어 놓은 곳. 

  먼저 죽은 할머니와 방금 죽은 할머니와 무거운 돌과

더 무거운 돌. 무거움은 오브제로 단순하게 들고 있기. 미

신이었던 때가 있었지요. 죽은 자의 혼령이 떠돌아다닌다

고 믿었던 무당은 돌을 들어야 했지요.

 

  이제 돌은 액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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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을 쥐려는 사람에게

  돌을 수집하는 사람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에게

 

진짜 돌

 

 

 

  나는 겉모습입니까 내부입니까

 

  풍화를 겪으면

  어떤 것이 상처인지 본질인지 알 수 없게 됩니다

 

  돌을 쥐려는 사람에게

  돌을 수집하는 사람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에게

 

  나는 언제부터 나를 갖게 되었습니까

 

  최초의 기억은 흔들리는 사람들입니다

  흰 가운을 입은 자가 뺨을 때렸습니다

 

  처음 몇 초간은

  나를 흔들면서

 

  자신이 흔들릴 줄은 몰랐을 겁니다

 

  돌을 던지고

 

  돌의 항로를 따라 활주로는 길어지고

  앞과 뒤가 똑같은 출발선에

  나는 서 있어요

 

  비행운을 바라봅니다

 

  지나간 것은 모두 아군

 

  방금 이륙한 것처럼

  발밑이 뜨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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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 (철창을 두 손으로 붙잡고) 꼼짝없이 갇혀 있군요.

        당신은 덥지 않나요?

    나: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열대야······

 

선택

 

 

 

  Day

 

  간밤에 네가 다녀갔지

 

  현관에 신발이 수십 켤레 있었는데도

  발에 맞는 건 하나도 없더라

 

  창문 너머 화단, 때늦게 만개한 장미들 때문에

  발바닥까지 뜨거워졌다

  잘못 번역된 자막처럼

  고장 난 틈새

 

  장미: (철창을 두 손으로 붙잡고) 꼼짝없이 갇혀 있군요.

        당신은 덥지 않나요?

    나: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열대야······

 

  조그만 창문에는

  우리를 부추기는 습기도 있지

 

  내가 열어 놓고 간 곳으로 쏟아지는 빛

  발목이 아파 잠에서 깼는데

 

  그 장면만 빠져 있는

  스크린 위

 

  벌거벗은 밤과 더 많은 발가락

 

  나의 독립영화가 비로소 상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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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시아가 오기 전부터 구원받은 선민들처럼

  스스로 선택하는 견고함

 

  그게 벽이라고

 

상상선*

  

 

 

  문을 연다

 

  손잡이를 잡아당기면 가까워지는 당신의 거리

 

  비릿한 쇠 냄새가

  내 손을 포박한다

 

  깊숙이 파고드는 문 없는 방의 내부

 

  열려 있으므로

  열릴 필요 없는 구멍

 

  메시아가 오기 전부터 구원받은 선민들처럼

  스스로 선택하는 견고함

 

  그게 벽이라고

 

  문의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나를 돌린다

  당신에게 돌려주지 못한 칼로

 

                                           장미가

                                      떨어져 있다

 

 

* 180-디르리 룰(degree rule). 영화 문법에서 카메라가 상상선 한쪽에 머

물러 있어야 한다는 180도 규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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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겨진 기억대로

 

  서서히 접히고 서서히 펴지는 종이의 모양

 

 

낮잠 속에서 꽃잎이 떠내려간다

 

 

 

  죽음이 빠져 있는 사전을 본 적 있다

 

  잠을 많이 자면 계속 졸리다  어딘가로 자꾸 쏟아지는 것처럼  액체처럼  계속해서 생겨나는 점의 세계

 

  허물은 어디에 있나  내가 들어가야 할 곳에

 

  지우개의 감정이 차곡차곡 쌓이는 중이다

 

  초점을 잃고 흔들리는 한 사람  얼룩으로 걸어 나가고    구겨진 기억대로

 

  서서히 접히고 서서히 펴지는 종이의 모양

 

                     *

 

  장미는 여러 겹의 불면증으로 감싸여 있다

 

  잠을 다 썼으니까

 

  불가능할 것 같던 낮과

  가능할 것 같던 밤이 화투 패처럼 섞여 있는

 

  한 잎씩 떨어뜨리며

  빚을 갚듯 잠을 끌어다 쓴다

  빌리는 것만으로도 꿈이 생긴다

 

                     *

 

  처음부터 내 옆에 앉아

  종이꽃을 만들던 사람

 

  잘 접으려면

  접힐 방향으로 미리 접어야 했다

  직선으로

  반듯하게 접힌

  미로를 따라가면

 

  한 번쯤 와 본 곳 같아

  종이가 닫히기 전에

 

  얼마쯤 누워 있었나

  꼬깃꼬깃한

  무릎을 폈을 때

 

  책 속에서 오래전 잃어버린 개를 발견한다

 

  개는 납작하게 끼워져 있다

 

  구겨진 개의 털을 하나하나 펴 주었더니 목줄을 물고

온다

 

  손금은 

  오래 목줄을 쥐었던 자국

 

  개가 나를 끌고 산책 간다

 

  내가 얼마나 늙어 버린 줄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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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일 때만 벗어나는

  돌의 상상 속에서

 

가짜 돌

 

 

 

  어제 나는 당신을 스쳐 지나갔다

  당신은 흰 가운을 입었다

 

  처음 몇 초간은

  몸이 마구 흔들렸고

 

  시끄러운 굉음이 났다

  두 귀를 닫았다

 

  아주 잠시 하늘을 날았던 것

 

  정지한 사람들을 본다

  돌처럼

 

  쥐고

  던지고

  빠뜨리고

  차 본다

 

  움직일 때만 벗어나는

  돌의 상상 속에서

 

  나는 적군

  매복 중이다

 

김석영 시인: 2015년 시와반시 신인상 등단. 시집, 『밤의 영향권』 『돌을 쥐려는 사람에게』가 있다.

『돌을 쥐려는 사람에게』로 제41회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