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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시인들

■ 장수진 시인의 시 ■ 목숨, 대머리 여인, 띄엄띄엄 말하기, 가위 바위 보, 그러나 러브스토리

by 시 박스 2024. 4.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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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즈를 취한 여인

 

일생에 한 시간
천사가 될 수 있다면

날개는 한 권의 책일지 모른다

 

 

목숨

 

 

 

  일생에 한 시간

  천사가 될 수 있다면

 

  날개는 한 권의 책일지 모른다

 

  일생을 나방 같은 존재로

  살아왔다면

 

  미움을 받게 되겠지

 

  빛을 삼켜봐

  북회귀선을 두 동강 내며 날아온

 

  작고 예쁜 너의 목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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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장 밖에서 슬피 우는 것이 누구인가, 내 누이
의 착한 애인인가." 사내가 조등을 내건다.

 

 

대머리 여인

 

 

 

  황망한 얼굴이 담을 넘어 그늘 속으로 숨어든다.

몸이 없는, 붉고 놀란 얼굴. 두서없는 유언처럼 흩

어지는 벌레의 행렬들.

 

  검은 옷을 입은 여인이 기웃거린다.

 

  "담장 밖에서 슬피 우는 것이 누구인가, 내 누이

의 착한 애인인가." 사내가 조등을 내건다.

 

  등 아래 화분이 어른거린다.

 

  "장미, 장미네."

 

  여인이 줄기를 쥐고 힘껏 당기자 흙 속에서 쥐가

딸려 나온다.

  " 이 작은 이빨로 신의 젖꼭지를 깨물다니."

 

  쥐가 찢어지는 소리를 내며 여인의 어깨 너머로

날아간다. 여인은 손에 통증을 느낀다. 바람이 분다.

휘파람이 한 움큼 딸려 온다.

 

  이것은 누구의 노래인가. 내가 멀리서 따라 부르

길 원하는가.

 

  솨······ 솨 ······ 

 

  여인의 머리칼이 여름 소낙비처럼 쏟아져 내린다.

 

  두리번거리던 여인은 창백한 그늘을 주워 머리에

쓴다.

 

  좁고 긴 골목. 끝날 골목. 저만치엔 빌딩과 관공

서가 있다.

  집집마다 내놓은 종량제봉투 속에서는 구구절절

구정물이 흘러나온다.

 

  여자는 골목 밖으로 걷는다. 한 올의 수수께끼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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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역은 화정 화정역입니다 디스 스톱 이즈
화정 화정 내리실 문은

 

 

띄엄띄엄 말하기

 

 

 

  죽었다는 거는 나도 알고 있고 들은 거 같은데

  백혈병으로 죽었더구먼 아니 개는 살아 있고

  살아 있어 그래

  어 어 그래

 

  이번 역은 화정 화정역입니다 디스 스톱 이즈

  화정 화정 내리실 문은

 

  여보세요 나야 하여튼간

  가만 있어봐 자네가 부영초등학교

  부영초등학교 옆에 사는

  맞지

 

  노약자와 어린이는

  보호자의 손을 잡고 다니십시오

  장난치지 마십시오

 

  어 어 죽었다는 거는 나도 알고 있고

  들은 거 같은데

 

  오늘 빵 세일합니다

  흰 눈 사이로 썰매를 타고 달리는 기분

  상쾌도 하다아

 

  아니 나는 살아 있고

  살아 있어 아직 그래

  날씨가 추워

  부길아

  밥은 먹었냐

  양말 두꺼운 거 신고 아무튼

 

  나도 이따가 죽을 거 같은데

  여보세요 부길아

  팥빵 좀 사 갈까 너 당뇨 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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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마지막 말은 가위였다

주먹을 쥐고 있던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든다
커다란 포대를 끌고 사내에게 다가가
내용물을 쏟아붓는다

 

가위 바위 보

 

 

 

  저벅 저벅

  설탕 밭을 가르며 지나가는 것들

 

  조경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영등포의 아파트에는

  손에 책을 든 아이가

  발코니에 잠들어 있다

  나방으로 뒤덮인 아이의 얼굴

  더듬이가 아이의 입안을 향해 있다

 

  거리에선 지독한 단내가 난다

  두통에 미간을 찌푸리는 행인들

 

  찐득찐득한 걸음들

  사내 고궁에

  파충류가 자주 출몰하지만

  아무도 반응하지 않는다

 

  이상하다

  이상한 하루가 반복되고

  이상한 일상이 지속된다

  누구든 나를 쏘면

  이 게임이 끝날 텐데

  이것이 게임이라면

 

  신경이 예민한 한 사내는

  퇴근길에 자주 넘어진다

 

  네눈박이 도마뱀과 두눈박이 사내가

  서로 응시한다

  사내의 입안에

  도마뱀이 천천히 머리를 넣는다

  사내는 벌벌 떨며 웃는다

 

  (뭔지 모르겠어 우히히히)

 

  어느 신경이든

  끊어버리고 싶은 충동과

  구토와

  신물과 거품

  사내의 몸속으로

  제 온몸을 밀어 넣는 도마뱀의 의지와

  이명을 일으키는 단내 속에서

  그는 구역질하듯 외친다

  가위

 

  남자의 마지막 말은 가위였다

 

  주먹을 쥐고 있던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든다

  커다란 포대를 끌고 사내에게 다가가

  내용물을 쏟아붓는다

  사내의 벌어진 입으로

  흰 설탕이 한없이 쏟아져 들어간다

  그의 몸은 설탕에 잠긴다

 

  이 모든 장면을 그리는 화가가 있고

  그 화가의 그림을 바라보며 혼절하는 아이가 있고

 

  붕붕 날아드는 도시의 나방들

  설탕에 취해 주저앉는 나방들

  저벅 저벅

  설탕 밭을 밟으며 지나가는

  저 버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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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 두 마리가 서로의 목을 감아 조른다
증오가 사랑이 아닐 리 없다는 듯

 

 

그러나 러브스토리

 

 

 

  비늘이 없는

 

  절벽과

 

  파도가 없는

 

  퉁퉁 불은 발목과

  뛰어오는 아이가 없는

 

  잠듦

 

  아무도 없는

  물속 벤치에서

 

  청년 차이코는 프스키를 연주한다

 

  털이 무성한 동물의 목을 어루만지듯

  물이 털이 아닐 리 없다는 듯

 

  기린 두 마리가 서로의 목을 감아 조른다

  증오가 사랑이 아닐 리 없다는 듯

 

  연거푸

 

  차이코의 열 손가락이

  작은 원을 그린다

  원은 곧 소멸하고

 

  그렇게 파도

  그렇게 음악

  그렇게 해변

 

  깊은 바다로부터 밀려 나온 손잡이들

 

  잠든 사람들의 귓속으로

  푸른 모래가 끝없이 들어간다

 

  누군가는 근처 병원을 가고

  누군가는 무의식에 음악을 둔다

 

  그들 코끝의 소금

  한 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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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진 시인: 2012년 문학과사회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사랑은 우르르 꿀꿀』 『그러나 러브스토리』 『순진한 삶』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