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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시인들

■ 박연준 시인의 시 ■ 불사조 & 나는 당신의 기일(忌日)을 공들여 잊는다 & 다이빙 & '멍청하게 과격하게' 연주할 것-머리카락을 잘라버린 자화상

by 시 박스 2024. 5.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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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닉스 구름

 

"사랑이 죽었는지 가서 보고 오렴.
며칠째 미동도 않잖아."

내가 말하자 날아가는 조약돌

 

불사조

 

 

 

  당신에게 부딪혀 이마가 깨져도 되나요?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날았고

  이마가 깨졌다

 

  이마 사이로, 냇물이 흘렀다

 

  졸졸졸

  소리에 맞춰 웃었다

 

  환 한

  날 들

 

  조약돌이 숲의 미래를 점치며 졸고 있을 때

 

  나는 

  끈적한 이마를 가진 다람쥐

  깨진 이마로 춤추는 새의 알

 

  이곳에서는 깨진 것들을 사랑의 얼굴이라 부른다

  깨지면서 태어나 휘발되는 것

  부화를 증오하는 것

  날아가는 속도로 죽는 것

  누군가 숲으로 간다

 

  나는 추락이야

  추락이라는 방에 깃든 날개야

  필사적으로 브레이크를 잡다

  꺾이는

 

  나는 반 마리야

  그냥 반 마리.

 

  죽지도 않아

 

  "사랑이 죽었는지 가서 보고 오렴.

  며칠째 미동도 않잖아."

 

  내가 말하자 날아가는 조약돌

 

  돌아와서는

  아직이요-, 한다

 

  아직?

 

  아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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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사세요
한 묶음 더 드릴게요
바짝 말렸어요 가져가기 좋게요

 

 

나는 당신의 기일(忌日)을 공들여 잊는다

 

 

 

  나를 사세요

  한 묶음 더 드릴게요

  바짝 말렸어요 가져가기 좋게요

  무겁진 않을 거예요

  더는 시들 일도 없어요

 

  구기면 구겨지고

  접으면 접힙니다

  날리면

  날아가죠

 

  가져가세요

 

  뜨거운 물에 넣은 뒤 한나절 잊으면

  순하게

  사라질 거예요

 

  끓여서, 잊는 거죠

  질긴 시간이 부드러워질 때까지

  감각이 액체로 녹을 때까지

 

  입에 맞으면 마시고

  비위가 상한다면

  뿌려주세요

  늙은 왕비들이 숨어 죽은 화단 같은 데,

 

  봄이 되면 묽게

  묵음으로

 

  날아다닐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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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 곳에 두어야 할 것들을 생각한다
식지 않거나 쉽게 식는 것

 

 

다이빙

 

 

 

  눈 속에 뛰어들기 위해 시작하는 일

  

  이마가 차가워진다

  벌써부터 눈은 창밖에서 기다리는데

 

  할 수 있다면

  녹아내리는 결정이고 싶다

  멀리서는 하얗게 보이고

  손대면 투명으로 흘러내리는

  즐거운 뱀 새끼,

 

  주황으로 물든 지붕을 갖고 싶어서

  마음을 용광로에 떨어뜨리고

 

  까치발로 눈 쌓인 창문 앞에 서 있다

 

  바람에 뿌리 뽑힌 나무처럼 시끄러운

  내 머리통을,

  쥐고

  살금살금

 

  눈 속으로 뛰어든다면

  눈 속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찬 곳에 두어야 할 것들을 생각한다

  식지 않거나 쉽게 식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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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방을 자르고, 어제를 자르고, 장미를 자르고, 흐르는 선
율을 자르고, 머리카락을 자르니 완성됐다 나무의 어제, 오
늘, 내일을 자르니 밤이 오듯이, 사방에 널린 죽음, 지렁이
를 닮은 상처, 몸에 감긴 수많은 당신은

 

 

'멍청하게 과격하게' 연주할 것

- 머리카락을 잘라버린 자화상

 

 

 

  등뒤에서 내 코를 향해 배반!

  이라고

  허리 아래에서 정수리를 향해 배반!

  이라고

  떠들고 웃는 사이 입술을 비집고 도망가는 미소를 향해

배반!

  이라고

 

  얘기하기도 지치지만 이 비스듬한 각도가 배반!

  이라고

  노래하던 종이 떨어졌다

 

  유방을 자르고, 어제를 자르고, 장미를 자르고, 흐르는 선

율을 자르고, 머리카락을 자르니 완성됐다 나무의 어제, 오

늘, 내일을 자르니 밤이 오듯이, 사방에 널린 죽음, 지렁이

를 닮은 상처, 몸에 감긴 수많은 당신은

 

  입술을 거짓말로 접어놓고,

 

  나를 삼킨 입술이 나를 뱉어내는 순환 속에서

  다시 태어나리라

 

  가장 높은 음을 머리카락이 항변하리라 열렬하게

  살아남으리라, 잘린 채,

  썩지 않으리라

 

  내가 이토록 상심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나는 나를 이해하기가 그를 이해하기보다 어렵습니다

 

  악보를 그리는 사냥꾼들이 속삭인다

 

  누가 잡힌 그물에 대가리를 또 밀어넣지?

 

  사냥감은 나빠, 사냥감이 제일 나빠

  왜 자꾸 사냥을 부추기냔 말이야!

 

  노래를 부르다 총구를 쓰다듬고, 총알을 입술로 감싸도

  흘러가는 구름을 밀어내며

  냉큼,

  또 죽으러 가는!

 

  나는 가장 나쁜 사냥감이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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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준 시인: 2004년 중앙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등단. 시집, 『속눈썹이 지르는 비명』 『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 『베누스 푸디카』 『밤, 비, 뱀』 『사랑이 죽었는지 가서 보고 오렴』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