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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시인들

■ 김이강 시인의 시 ■ 나와 클레르의 오후 & 서머타임 & 휴가 계획 & 데이빗 안젤라 티리에 & 여름 정원

by 시 박스 2024. 5.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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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트램

 

 

트램을 타고 외곽으로 간 우리는
어느 황량한 정거장에서 잠시 머물렀다
낮게 이어진 콘크리트 외벽들이 푸르게 잠기어간다

 

 

 

나와 클레르의 오후

 

 

 

  성당이나 서점을 지나 걸었다

  오래된 다리 위에서 클레르가 뒤를 돌아보았다

 

  빨리 와.

  응. 빨리 갈게.

 

  클레르의 운동화 바닥은 안쪽부터 닳는구나

  걷는 사람들의 오른뺨이 석양을 받고 있다

 

  트램을 타고 외곽으로 간 우리는

  어느 황량한 정거장에서 잠시 머물렀다

  낮게 이어진 콘크리트 외벽들이 푸르게 잠기어간다

 

  돌아가는 트램을 기다리다 클레르가 말한다

  눈을 깜빡이더니

  크게 웃는 클레르

 

  가로등과 가로등 사이였기 때문에 클레르의 얼굴엔

  빗금처럼 어둠이 쏟아졌다

 

  잠시 후 우린 잊고 있던 도시락 가방을

  클레르의 배낭에서 꺼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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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인 줄 몰랐는데
밥상을 들고 나오는 평희의 목과 얼굴에
해가 기울어 비추었다
멈추어 서로를 바라보던 일

 

 

서머타임

 

 

 

  평희의 밀짚모자가 걸어간다

  밭이랑을 따라 해안선까지 닿는 것

  모자를 쓴 평희뿐이다

 

  둘이서 마루에 누웠다가

  저녁을 해 먹었다

 

  저녁인 줄 몰랐는데

  밥상을 들고 나오는 평희의 목과 얼굴에

  해가 기울어 비추었다

  멈추어 서로를 바라보던 일

 

  저 해가 가는 곳은 어디일까

 

  마루로 돌아와서 지도를 다시 펼치고

  손가락을 짚어 해안을 따라 걸었다

  끝나지 않았다

 

  이런 것이 백야구나

 

  평희 것과 같은 모양의 모자가

  벽에 걸려 석양을 받는다

 

  밀짚모자를 쓴 평희가

  해안선을 따라 걷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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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타, 요트를?
그러니까 어디 좋은 데로 가야지.
어디가 좋은데?
어디가 좋을까?

 

 

휴가 계획

 

 

 

 

  상점 창틀에 팔꿈치를 풀어두고

  아이들이 길거리에 서서 맥주를 마시고 있다

 

  모두 아는 애들이다

  어젯밤 경기에서 누가 이겼는지 물으려는데

  아이들이 들뜬 목소리로 말한다

  요트 타러 가지 않을래?

 

  어디서 타, 요트를?

  그러니까 어디 좋은 데로 가야지.

  어디가 좋은데?

  어디가 좋을까?

 

  어디가 좋을지

  아이들 옆에 서서 맥주를 마신다

  여기가 아니면 풀어둘 곳이 없다는 듯

  정박해 있는 여러 개의 팔들

 

  유리컵 표면에 물방울들이 매달렸다 흐른다

  집에 가자.

  누군가 이야기하면

  바닥에 내려놓았던 가방이나 재킷을 들고 나선다

  빌딩 불빛은 아직 환하다

 

  어디가 좋을지

  어디 좋은 데가 있을지

 

  모두들

  내일 보자고 인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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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에게는 지나간 과거가
없다. 모든 게 현재형인 상태로, 언제나 덜덜 떨고 있는
상태로, 커다란 눈을 부릅뜬 상태로,

 

 

데이빗 안젤라 티리에

 

 

 

  폭포수 같은 겨울 지방의 한 소도시에서 데이빗과 안

젤라와 티리에는 모자를 푹 눌러쓰고 머플러를 칭칭 감

은 채 추위에 덜덜 떨고 있다. 그들에게는 지나간 과거가

없다. 모든 게 현재형인 상태로, 언제나 덜덜 떨고 있는

상태로, 커다란 눈을 부릅뜬 상태로, 

  데이빗은 안젤라의 아파트 앞까지 따라왔다. 티리에를

만나러 이곳 도시에 왔지만 밤이 되자 마치 안젤라를 위

해 온 것처럼 그 집 앞에 당도했다. 그에겐 잘 곳이 없다.

화장실에서 자겠다니, 데이빗, 말도 안 돼. 상가 건물의

화장실 앞에서 둘은 한동안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안젤

라의 아파트 불빛은 노랗다. 그런 시간이 흐른다. 

  안젤라는 곧 누군가에게 전활 건다. 데이빗을 재워줄

누군가. 이곳에서 너를 재워줄 사람이 있을 거야. 너를

아주 잠시. 네 몸을 단 몇 시간 동안 눕게 하는 거잖아. 데

이빗이 잊고 있었다는 듯 목소리를 내어 말한다: 원래 그

런 게 어려운 거야. 단지, 나를 단, 몇 시간, 그저, 눕게 하

는 것. 

  여러 해 가운데 손에 꼽을 정도의 행운이었을 것이다.

따뜻한 잠자리에서 밤을 보낸 데이빗은 다음 날 아침 안

젤라의 아파트 앞으로 돌아와 있다. 머플러 위로 솟아 있

는 얼굴. 안젤라는 그 얼굴을 본다. 아직 따뜻한 손처럼.

아직 녹지 않은 얼음처럼. 안젤라가 몸을 돌린 쪽으로 데

이빗도 몸을 돌려 걷는다. 이렇게 가면 어디가 나올 것

같아? 데이빗은 대답하지 않는다.

 

  먼바다을 향해 서 있다. 기차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

다. 안젤라도 바다를 향해, 티리에도 바다를 향해. 모두

가 바다를 보고 있다. 등 뒤에 안젤라의 아파트가 조그

맣게 보인다. 누군가 등을 돌리자 나머지도 등을 돌린다.

도시는 추위에 익숙해져버린 북쪽 마을처럼 고요하고 하

얗다.

 

  셋이서 떨고 있는 바다. 이 바다를 건너 기차는 당도할

것이다. 

  티리에는 지난밤의 일들에 대해 얘기한다. 데이빗과

안젤라를 그렇게 둘 수밖에 없었던 사정에 대해. 티리에

를 안심시킬 행운에 대해 데이빗과 안젤라가 얘기한다.

티리에의 밤과 안젤라의 밤과 데이빗의 밤이 서로 다른

불빛에 어른거린다. 티리에는 데이빗과 동행하지 못한

다. 안젤라는 학교로 간다. 도시는 산산이 갈라질 것이다. 

  머플러 위로 솟은 그림자들. 

  그들의 형체가 얼어붙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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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기어진 달팽이를 오래 구경한다
그가 내게 손을 뻗을 것이다

 

 

여름 정원

 

 

 

  그의 허리에 묶여 있던 리본이

  잎사귀 그림자들과 함께 흔들리고 있다

 

  벤치에 앉아 그런 걸 보고 있으면

  오래전에 지나가버린 장마 같고

 

  우린 산더미처럼 쌓인 이야기들을 향해 걷는데

  그런 것들은 항상 비가 온 후의 물방울들 같고

 

  가까운 미래들이 반음계씩 내려가면

  다시 이 숲에 이르게 된다

 

  그가 돌아서서 벤치로 왔을 때

  작고 꿈틀거리는 달팽이 같은 걸 상상하며 손 내밀었

을 때

 

  내게 올려줄 것이

  그저 맨손인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꿈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다시 온 여름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손을 맞잡은 숲의 계단은

  기하학적으로 겹치었다 분열하는 것이었는데

 

  사뿐히 늘어나고 나면

  다른 세계의 무릎 위로 옮기어질 일만 남은 것 같고

 

  여름은 오고

  잎사귀는 검고

 

  벤치에 앉아 이런 걸 생각하고 있으면

  아직 이르지 못한 이야기 같고

 

  옮기어진 달팽이를 오래 구경한다

  그가 내게 손을 뻗을 것이다

 

 

김이강 시인: 2006년 시와 세계를 통해 작품 활동 시작. 시집으로 『당신 집에서 잘 수 있나요?』 『타이피스트』 『트램을 타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