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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시인들

■ 황인찬 시인의 시 ■ 이미지 사진 & 받아쓰기 & 호프는 독일어지만 호프집은 한국어다 &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 & 이걸 내 마음이라고 하자

by 시 박스 2024. 5.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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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풀

 

사진관에 모이는 것으로 마음을 남기던 시절의 기억 속으
로 내려오는 저녁이 하나 휘어지는 빛이 둘

 

 

이미지 사진

 

 

 

  아름다움 하나

  나무의자 둘

 

  잠시 찾아와서 내려앉는 빛

 

  이 장면은 폐기되었고

 

  이해하자 좋은 마음으로 그런 거잖아 하나

  서양 난 화분이 쓰러진 모양이 둘

 

  너는 그런 걸 어떻게 다 기억하니(다 날아가고 눈 코 입만

남은 사진 그것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날들의 기억)

 

  사진관에 모이는 것으로 마음을 남기던 시절의 기억 속으

로 내려오는 저녁이 하나 휘어지는 빛이 둘

 

  (이 순간을 어떤 영화에서 본 것만 같다고 잠시 느꼈을 

때, 그것이 어떤 시절에만 가능한 착각이라는 점을 뒤늦게

알아차리고 나서의 부끄러움)

 

  죽은 아름다움 하나

  부서진 나무 의자 다섯

 

  자꾸 뭘 기억하려고 그래(여전히 떠나지 않고 남아 있는

빛) 예전에는 이렇게 많이들 날려서 찍었지?

 

  (작은 강의실이 젊은 옛날 사람들로 가득하다 이미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 귀를 기울이세요 말하는 사람과

이미지인데 왜 귀를 기울여요 말하는 사람)

 

  웃으세요

  친구끼리 왜 그렇게 멀찍이 서 있어요

 

  그 말을 듣고 그냥 웃는 사람의 얼굴이 하나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의 사라짐

 

  그 장면은 경험하지 않은 것으로 하고

 

  빛이 들어가면 다 상하니까

  어둡고 서늘한 곳에 보관하세요

 

  불 꺼진 실내에 웅크리고 앉은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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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사람 멋있네요"
"죽었어요"

 

 

받아쓰기

 

 

 

  받아쓰기가 뭐냐고 묻는 사람이 있었다

 

  "이거 삼십 년 전 필름인데 인화할 수 있나요?"

  "뽑아봐야 알 것 같은데요"

 

  사진관에 앉아 기다리는데 그런 말이 들려왔다

  나는 바다를 쓰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지만

 

  " 이 사람 멋있네요"

  "죽었어요"

 

  겨울 바다는 너무 적막해서 아무것도 받아 적을 말이 없

었다 바닷바람은 자꾸 뭐라고 떠드는데 이해할 수 없었고

 

  받아쓰기요

  받아쓰기

 

  매년 바다가 넓어진다고 했다

 

  "이 사람은 누구 동생인데 죽었어요"

 

  나는 흰 벽을 뒤로 두고 사진을 찍고 있었다

 

  턱을 당기세요 이쪽을 보세요 미소, 아주 조금만요

  지시를 따르며 가만히 앉아 있었다

 

  "나는 죽은 사람이 웃고 있으면 너무 이상해"

 

  터지는 소리가 나고

  빛이 보이고

 

  화면 위로 보이는 얼굴은 모르는 사람

 

  바다를 어떻게 써요

  왜 쓰는데요

 

  바닷가에서 그런 말을 들은 것 같았다

  겨울 바다 위를 물새들이 돌고 있었고

 

  "조금 돌아갔어요 이 사진은 안 되겠는데요"

  그런 말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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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더 멀리 나가야 해 노인들은 나가는 게 무서운가봐 선
생은 개가 나오는 내 시 이야기를 했다 젊은 친구가 내가 쓸
것 같은 시를 썼어 그곳에도 멸치는 없었다

 

 

호프는 독일어지만 호프집은 한국어다

 

 

 

  꿈을 꾸니 이승훈 선생이 앉아 있었다 선생님 장례식에 가

질 못해 죄송해요 군에 있느라 그랬어요 선생은 멸치가 어디

있느냐고 묻는다 마른안주에는 멸치가 있어야 하는데 그게

없군 선생의 장례식장은 선생이 주인이다 하지만 선생님

여기 과일도 드셔보셔요

 

  그날도 선생은 멸치를 찾았다 어느 저녁 중흥하파트(선생

님 사시던 곳) 단지 내의 호프집에서 선생은 맥주를 마셨다

시는 더 멀리 나가야 해 노인들은 나가는 게 무서운가봐 선

생은 개가 나오는 내 시 이야기를 했다 젊은 친구가 내가 쓸

것 같은 시를 썼어 그곳에도 멸치는 없었다

 

  인사동 어느 술집에도 멸치가 없었다 일행이던 신동옥 시

인이 멸치를 사러 밖으로 나갔는데 한참을 돌아오지 않았다

이것은 이승훈 선생의 시 「모든 것은 잘 되어간다」에 적힌

나는 처음에는 그 시를 읽고도 거기서 말하는 동옥이 신동

옥 시인을 가리키는 줄을 몰랐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내 착

각이고 둘이 다른 인물이라는 경우도 있겠지

 

  그러나 여전히 꿈속이다 멸치도 없고 선생도 없고 선생의 

장례식장에서 선생의 장례식장에 가지 못해 죄송하다 선생

에게 거듭 사과하고 선생은 여전히 멸치를 찾고 있다 이런

일은 꿈속에서나 가능하다 아니면 시에서나 이 모든 일은

다 시에 적힌 일이다

 

  멸치도 없이 맥주를 다 마시고 선생은 흥이 나셨는지 강

남역까지 배웅을 나왔다 괜찮아요 선생님 아무리 말해도 아

냐 괜찮아 선생은 그후로 며칠을 앓아누웠다고 한다 그게

선생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뵌 것이었고 이후로 다시는 뵙

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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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불이 처음 보는 이불이었대 그게 너무 포근하
고 좋더래 머리를 대자마자 잠이 들었고 너무 깊이 잠들어
서 깨고 보니 자기 집이었대 그러니까 그게 다 꿈이었단 얘
기지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

 

 

 

  

한밤중에 친구가 갑자기 연인이 너무 보고 싶더래 그래

서 연인에게는 아무 말도 없이 다짜고짜 연인이 사는 곳엘

찾아갔대

 

  그래서 거기서 뭘 본 건데?

 

  너는 이상한 질문을 하는구나, 연인이 사는 곳에 갔으니

연인을 봤겠지 무슨 괴담도 아니고 귀신이라도 나왔겠니 하

지만 친구는 봐야 할 것을 보지 못했다고 했어

 

  (머나먼 곳까지 문학기행을 온 우리는 잠들지 못하고 해

야 할 말도 찾지 못했으므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잘 알지도

못하고 사실 궁금하지도 않은 일들에 대한 이야기를)

 

  밤은 깊어가고 친구는 무슨 말이든 꺼내야겠다 싶었는

데 이상하게 말이 안 나왔대 연인도 별말 않고 영화나 봤다

나 친구는 불쑥 찾아간 게 미안해져서 가만히 영화만 봤고

 

  영화는 무슨 영화였는데?

 

  그게 중요하니? 그건 나도 모르지 내가 거기 있던 것도 아

니고 아무튼 영화가 다 끝나고 연인이 갑자기 돌아누워서

잠들어버렸대 같이 누워 있던 친구도 그걸 보고 벙해져서는

곧 따라 잠들었대

 

  그런데 이불이 처음 보는 이불이었대 그게 너무 포근하

고 좋더래 머리를 대자마자 잠이 들었고 너무 깊이 잠들어

서 깨고 보니 자기 집이었대 그러니까 그게 다 꿈이었단 얘

기지

 

  그게 끝이야?  대체 이게 무슨 이야긴데

 

  (문학기행의 밤은 깊어가고 이미 눈감은 사람이 많았다

살아남은 사람은 모두 고개를 들고 서로를 확인해주세요)

 

  그러나 대답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텅 빈 방에는

홀로 목소리만 떠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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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뜨니 토끼풀 하나가 자신이 토끼인 줄 알고 머리를
긁고 있었네

 

 

이걸 내 마음이라고 하자

 

 

 

  눈을 뜨자 사람으로 가득한 강당이었고 사람들이 내 앞

에 모여 있었다 녹음기를 들고 지금 심경이 어떠시냐고 묻

고 있었다

 

  사람들은 자꾸 말을 하라고 하고 그러나 나에게는 할말이

없어요 심경도 없어요 하늘 아래 흔들리고 물을 마시면 자

라나는 토끼풀 같은 삶을 살아온걸요

 

  눈을 다시 뜨니 바람 부는 절벽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

고 있었다 지금 뛰어내리셔야 합니다 지금요 더 늦을 순 없

어요 자칫하면 모두가 위험해져요

 

  무서워서 가만히 서 있는데 누가 나를 밀었고

 

  눈을 뜨면 익숙한 천장, 눈을 뜨면 혼자 가는 먼 집, 눈

을 뜨면 영원히 반복되는 꿈속에 갇힌 사람의 꿈을 꾸고 있

었고

 

  그러나 어디에도 마음 둘 곳이 없군 

  애당초 마음도 없지만

 

  눈을 뜨니 토끼풀 하나가 자신이 토끼인 줄 알고 머리를

긁고 있었네

 

  좋아, 이걸 내 마음이라고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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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찬 시인: 2010년 현대문학 신인추천을 통해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 『구관조 씻기기』 『희지의 세계』 『사랑을 위한 되풀이』 『여기까지가 미래입니다』 『이걸 내 마음이라고 하자』 가 있다. 김수영 문학상, 현대문학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