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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시인들

■ 이소호 시인의 시 ■ 플라스틱 하우스 & 홈 스위트 홈 &어느 고독한 게이트볼 선수의 일대기 & 컴백홈

by 시 박스 2024. 5.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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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 파티

 

우리는 가만히 누워

  티브이 속 다른 가족의 웃음소리에 귀 기울였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았다

 

플라스틱 하우스

 

 

 

  조심해요 엄마

  하얀 선에서 떨어지면 죽어요

  닳은 무릎으로 4층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런 집이라도 있는 게 어디야

 

  한쪽 다리가 끊긴 개미는 기어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는 배를 깔고 누워 잘린 천을 모아

  꽃잎을 만들며 말했다

 

  여름에는 쥐가 없어서 좋아

 

  우리는 가만히 누워

  티브이 속 다른 가족의 웃음소리에 귀 기울였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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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방 안에 꼼짝 않고 밤새 노안은 절대로 살필 수

없을 만한 크기의 글씨로 빈 바닥을 조용히 채웠다

 

  살려주세요

 

홈 스위트 홈

 

 

 

  가정주부로 살아온 자는

  죽을 때도 주부로 죽는다

 

  집안일에는 은퇴가 없으니까

 

  내 꿈은 가정주부

  사계절 일용직

  시인은 비정규직이에요

  저는 집이 없어요

  재산도 없어요

 

  저는 남편을 찾으러 여기 나왔어요

 

  지금 가족은 너무 낡았어요

 

  그러니까 내 꿈은 

  은퇴 없이 살고 싶어요

 

  말을 더 덧붙여야 할까요?

 

  엄마는 주부, 아버지는 교편을 잡고

  동생은 호주에서 커피를 내려요

 

  라고 결혼 정보 회사에 솔직하게 썼다

 

  몇 번째인지 모를 그 남자는 내가 화장실에 간 사이 이

름을 검색했고

 

  도망쳤다

 

  무슨 문장이 그를 달아나게 했을까?

 

  나는 

 

  오늘의 진귀한 불행을 잊을까

  타자기 앞에 손을 올린다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빠는 소리쳤다

  딸년은 고고하게 앉아 글이나 쓰고 있는데

  내가 저 돈을 다 대야 한단 말이야?

 

  당신도 희망을 버려

 

  아빠는 늘 그랬던 것처럼 내 얼굴 앞에서 거칠게 거수

했고, 모서리를 향해 발길질하겠다고, 겁을 줬다 단지 겁

을 줬을 뿐인데 내 펜은 부러졌고, 혀로

  휘둘렸다

 

  그날

 

  나는 방 안에 꼼짝 않고 밤새 노안은 절대로 살필 수

없을 만한 크기의 글씨로 빈 바닥을 조용히 채웠다

 

  살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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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프리다 칼로의 말을 빌려 할머니의 죽음을 애도한다.
"이 외출이 행복하기를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기를."

 

어느 고독한 게이트볼 선수의 일대기*

 

 

 

안녕 나는 전국, 노래자랑을 좋아해 어린 시절 배웠/던 노래를 따라 부르는 것은 나의 주특기야 노랫말에 일/본어 가사를 붙이다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어 살았어 죽/었어? 안부를 종종 물어 받으면 살고 받지 않으면 죽었/다는 것을 난 알아 요즘은 색다른 일이 없어서 늘 뉴스/를 봐 뉴스는 시시각각 사건 사고가 다양하니까 세상은/무너지고 세상은 전염병으로 말이 많더라 '뉴스에서 그/러던데', 이 말을 붙일 수밖에 없어 노인에게 뉴스는 세/상이니까 근데 살아보니 알겠더라 어차피 세상은 독립/을 해도 전쟁이 나도 똑같아 무너지고 일어서는 게 다 똑/같다고. 그래 전쟁도 이겨낸 나인데, 전염병 따위가 무슨 소용이겠어 나에게는 삶이란 하루하루가 붙어 있는 날들/의 연속일 뿐인데 그래서 너무 지루해서 이불을 푹 덮고 가끔 베란다로 나가서 어린아이들이 그네 타는 것을 본/단다 아이들은 하늘을 향해 높이 날아오르면 나와 조금/은 가까워지지 가족보다 더 가까이 내 곁으로 다가오지/어두운 밤 모구가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 소등을 하더/라도 거실의 불은 꺼지지 않아 나는 물끄러미 소파에 앉/아서 사람들이, 그러니까 가족이라고 불리는 것들이 지/나다니는 것을 볼 뿐이야 나는 아직 라면도 혹자 끓여 먹/을 줄 알아 걷기 힘들 뿐이지 아직 요리도 할 줄 알아 그/래도 미숙이가 있으니까 오늘은 미숙아 도토리묵 해줘/해서 도토리묵 먹었고 내일은 청포묵을 먹자고 말할 거/야 이 집은 내 집이니까 미숙이는 내 딸이라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잘 알아 사실 나는 먹는 것 말고는 좋아하는 것을 다 잊었어 잊었지만 내가 여자라는 사실은 잊지/않았어 난 여자지 노인이 아니야 매일매일 알로에 크림/을 덧바르지 오늘은 몇 년 만에 가장 예쁜 옷을 입고 밖/에 나갔다 왔어 보행기 워커가 없으면 단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지만 걸음걸음 나가 게이트볼장에서 친구들과 치킨/도 먹었어 몇 년 만의 봄이었어 코로가 따위가 뭔데. 난 당뇨 50년 차인데도 굳건하잖아 그래서 괜찮아 뉴스에/서 그랬어 코로나 생각보다 별것 아니라고 난 오늘 죽어/도 괜찮아 그뿐이야 나는 나갈 거야 그걸로 된 거야 오/늘 날씨는 너무 아름다워 지금 밖으로 나간다면 꼬마들/이 옹기종기 모여 노는 것을 조금 더 가까이 두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도 만날 수 있지 덕분에, 나는 내가 제일/좋아하는 보라색 옷을 입었지 보라색 옷에 썩 어울리는/회색 모자도 썼지 돈도 조금 챙겼지 깔깔 콜록 웃었지/콜록 인슐린 주사를 맞지 않아도 콜록 될 정도로만 콜록/먹고 마시고 놀다 왔지. 콜록 그런데 자꾸 기침이 콜록/멈추질 않아 콜록 콜록콜록 안녕 이제야 인사를 건네 나/는 이순정이야 34년생 올해로 게이트볼 운동장의 모래/한 줌이 된

 

* 2022년, 1934년생의 할머니는 단 한 번의 외출로 코로나에 걸리셨다. 더불어 함께 거주하던 우리 모녀 역시 줄줄이 코로나에 걸렸다. 할머니는 코로나에 걸린 지 이틀 만에 돌아가셨으므로 살아 있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본 것도, 마지막을 함께할 수 없는 것도 우리였다. 우리 모녀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할머니의 유언은 이것이었다. "못 된 것들." 그러나 할머니에게 코로나를 안겨준 외출은 필히 행복했다. 나는 외출은 다녀온 할머니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몇 년 만의 미소였다. 죽음을 감수할 만큼의 행복을 무엇일까? 우리는 그렇게 억지로 이 상황을 받아들이고 있다. 원망의 말은 다 잊고, 웃음만 기억하기로. 그러므로 프리다 칼로의 말을 빌려 할머니의 죽음을 애도한다. "이 외출이 행복하기를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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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우리는 이방인의 슬픔을 이미 알고 있다

  이렇게 길게 말하지 않아도

 

컴백홈

 

 

 

  동생이 피었다

  진 자리에 가만히 눕는다

 

  등 떠밀려 물어본 안부는 늘

  같다

 

  호주는 너무 지긋지긋해

  언니 여기 올래?

 

  돈 없어

 

  일이나 열심히 해

  세상이 좋아지면 우리가 갈게

 

  그날은

 

  동생이 플리즈라는 단어를 문장 뒤에 붙이지 않아서

  혼난 날이었다

 

  시진아, 그래도 영어로만 말하니까 살 만하지?

 

  고작 플리즈로 욕을 먹은 게 다잖아?

 

  수화기 너머의 동생은

  플리즈 플리즈를 모든 단어와 음절마다 붙이면서

 

  산다

 

  그렇게까지 부탁해야 하는 거야?

 

  언니

 

  나는 내 잘못을 모르겠어

 

  우리가 아주 어릴 적에 제일 처음 배운 단어는

  쏘리와 땡큐였다

 

  땡큐 없이 쏘리만 남은 날

 

  외국인이 영어를 모른다고

  쏘리를 입에 달고 살았던

  뉴욕을 생각해본다

 

  나는 뭐가 그렇게 다 미안했던 걸까

 

  길가에서 어깨를 치며 빨리 걷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던 사람들을 생각한다

 

  최대한 빨리 걷고 있었는데

 

  그들은

  뛰듯이 걷는다

  저렇게 바쁘게 살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구나

  뉴욕은

 

  나는 스트리트와 애비뉴의 사이사이를 걷는다 아주

나이 든 건물과 아주 젊은 가게마다 하나하나 묻지 않으

면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었던 그 시간을

  생각한다

 

  그때

 

  한때 친구였던 친구는 전화를 걸어

  한국어로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

 

  죽었다

 

  나는 너를 용서할 일이 없는데

 

  어째서 내게 마지막으로 사과했던 걸까

 

  미안했다 미안하다 죄송하다 사죄한다 잘못했다 용서

해주세요

  이 말을 다 알면서도

  나는

 

  쏘리

 

  그리고 플리즈

  포기브

  미

 

  납작 엎드려 사는 법밖에 몰랐다

 

  시차를 둔 우리는

 

  서로의 낯익은 침대에

  피다 진 자리를 손가락으로 살포시 걸어본다

 

  서로의 하루를 훔치며

 

  이국의 불행에 대해 짐작한다

 

  사실

 

  우리는 이방인의 슬픔을 이미 알고 있다

 

  이렇게 길게 말하지 않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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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호 시인: 2014년 현대시를 통해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 『캣콜링』 『불온하고 불완전한 편지』 『홈 스위트 홈』, 영역 시집 『Catcalling』. 산문집 『시키는 대로 제멋대로』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서른다섯, 늙는 기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