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의 시인들

■ 강혜빈 시인의 시■ 커밍아웃 & 미니멀리스트 & 일곱 베일의 숲 & 바깥의 사과 & 밤의 팔레트

by 시 박스 2024. 5. 11.
728x90

< >

 

색을 섞고 있는 팔레트

 

옷장에서 알록달록한 비밀이 흘러나와
자라지 않는 발목 아래로, 말은 잊은 양탄자 사이로
기꺼이 불가능한 토마토에게로

 

 

커밍아웃

 

 

 

  축축한 비밀 잘 데리고 있거든

  일찌감치 날짜가 지난 토마토 들키지 않고

  물컹한 표정은 냉장고에 두고

  나는 현관문을 확인해야 해

  아픈 적 없는 내일을 마중 나가며

 

  취한 바람이 호기롭게 골목을 휘돌아 나갈 때

  나뭇잎이 되고 싶어 아무 데서나 바스러지는

  우리가 서로를 껴안을 때 흔들리는 그늘

  더 낮은 곳으로 자리를 옮겨 가는데

 

  아무도 모르는 놀이터에서 치마를 까고 그네를 탔어

  미끄럼틀과 시소의 표정

  낮지도 높지도 않은 마음을 가지자

  혼자라는 단어가 낯설어지면

 

  얼음 땡,

  크레파스 냄새 나는 빨주노초 아이들

  웃음먼지를 풍기며 뛰어나가고

  배 속에선 만질 수 없는 부피들이 자란다

  누가 우리를 웅크리게 하는 걸까

  웃지 않는 병원에 가야겠어

  문 닫은 교회에서 기도를 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여관에 하루 정도 재울까

  창문이 많은 복도에서 자꾸만 더러워질까

 

  뉴스는 토마토의 보관법을 알려주지 않는다

  설탕에 푹 절여지고 싶어

  사소한 기침이 시작된다

  내 컵을 쓰기 전에 혈액형을 알려줄래?

 

  옷장에서 알록달록한 비밀이 흘러나와

  자라지 않는 발목 아래로, 말은 잊은 양탄자 사이로

  기꺼이 불가능한 토마토에게로

< >

 

어디든 누가 살다 간 자리
어디든 누가 죽어간 자리

 

 

미니멀리스트

 

 

 

나는 말들이 스스로 하고 싶어 하고해야만 하는 걸 하는 것의 느낌을 좋아한다- 거트루드 스타인

 

  찢어진 이불을 덮고 잤다

 

  오랫동안  찢어진 마음에 골몰하였다

 

  깨어날 수만 있다면  불길한 꿈은 복된 꿈으로

 

  빛 속으로 풀쩍  뛰어든 고라니가 무사하므로  오래된 건물이 무너짐을 마쳤으므로  돌아가신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으므로

 

  기지개를 켜듯 이불의 세계는  영원히 넓어지기  모름지기 비밀이란 말하지 않음으로  책임을 다 한 것으로

 

  어디든 누가 살다 간 자리  어디든 누가 죽어간 자리

 

  오랫동안 비어 있던 서랍은  신념을 가지게 된다

 

  "가끔 우리가 살아 있는 게 기적 같아"

 

  이 세계에서는 매일매일 근사한 일이  무화과 스콘 굽는 냄새가  누군가  3초에 한 번씩 끔찍하게

 

  복선을 거두어 가지 않으면서  한 줌의 사랑을 꿰매어주면서  "혹시 사람을 좋아하세요?"

 

  더는 버틸 수 없는 질문에 대해  대답하지 않기로

 

  내가 나인 것을 증명하지 않아도 될 때  긴 잠에 빠진 나를 흔들어 깨울 때

 

  아래층에서 굉음이 들렸다

 

< >

 

나의 몸이 자라는 동안 나는 모르는 내가 되어
주머니가 많은 소문이 되어가고 있으니까요

 

 

일곱 베일의 숲*

 

 

 

  그런 눈으로 나를 바라보지 말아요  당신을 망치는 일은 너무나도 간단하니까요

 

  누군가 치렁치렁 매달렸던 버드나무 아래  여러 겹의 그림자를 밟고 섰습니다

 

  시침이 다시 움직이면 저주가 시작되니까요

 

  눈꺼풀에 커다란 눈을 덧그린 사람들  서로의 엉덩이를 걷어차며 깔깔깔 울타리를 넘어가고  진실은 눈꺼풀 속에서 세모 네모 너울거리겠지요  진짜 슬픈 게 뭔지 모르는 사람들만이 더 크게 웃습니다

 

  콧소리로 말하면 들리지 않는 이야기

 

  돌로 변해버린 아빠들은 마음속에 진열하다 보면  없는 아이의 보드라운 무릎이 스쳤다 가는 것 같으니까요  나의 몸이 자라는 동안 나는 모르는 내가 되어  주머니가 많은 소문이 되어가고 있으니까요

 

  우리의 기나긴 춤이 끝나면 소원을 말해보세요  은쟁반에 당신의 머리만 담을 수 있다면······

 

  우리는 이불을 털다가 울지 않을 것이며  부케를 받은 사람이 가장 먼저 이곳을 떠날 것이며  춤의 시작을 기억할 것이며  발로 쓸어내린 이름들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눈으로 나를 바라보지 말아요  나의 이름은 이 세상에서 발음할 수 없으니까요

 

* 헤로디아의 딸보다 먼저 살로메였던 그들에게.

 

< >

 

태연히 몸속을 건너가는 엄마, 엄마를 부르지만
나와 나의 투명한
팔다리가 상상한 모습이 아니어서 그랬니

 

 

바깥의 사과

 

 

 

  꿈이 나를 갉아먹을 때 엄마, 엄마를 부르지만  나와 나의 커다란  괘종시계만이 살아 있는 이곳

 

  시계추는 거실을 서성이며 살 타는 냄새를 풍기고

 

  발들이 반복되는 계단을 번복하는 소리  저녁의 목구멍이 팽팽하게 잠겨오는 소리  흑흑, 흑흑, 눈에 박힌 태엽이 잘 감기지 않는 소리

 

  태연히 몸속을 건너가는 엄마, 엄마를 부르지만  나와 나의 투명한  팔다리가 상상한 모습이 아니어서 그랬니

 

  문이 혼자서 열린다면 안녕, 너도 내가 보이니

 

  물을 뚝뚝 흘리면서 널려 있는 이웃들  발바닥을 내놓고 말라가는 바지들  머리카락을 한 올 두 올 뜯어 먹으며 커지는 개미들

 

  아냐, 한눈에 알아보는 건 가짜 가족  우리는 늘 액자 속에서만 창백하고 검었는데  이불의 겉과 속은 덮는 사람이 정하는 것  썩은 껍질들처럼

 

  자다가 울면 잠꼬대처럼 넘어갈 수 있으니까  그런 얼굴로 나를 기다리면 못써  누구라도 목소리를 따라할 수 있으니까

 

  아냐, 우리는 아직 아무도 입지 않은 옷  밀려난 얼굴 위로 똑같은 얼굴이 겹쳐진다면  어젯밤 누군가 성냥 한 개비를 던졌기 때문에  잠 속에서 몸집이 커다래진 시간은 깨어나지 않아

 

  그렇다고 아주 살아 있는 것도 아닌  문고리는 곧 살금살금 돌아갈 테지만

 

< >

 

물방울무늬야 착하지
동그라미는 동그라미인 척도 잘하지
무지개보다 레인보우에 가깝다는 이야기
만져보면 비슷할 수도 있어

 

 

밤의 팔레트

 

 

 

  노랑과 옐로는 언니였다가 누나였다가  원피스를 바꿔 입다가 넘어지기도 하지  그런 언니는 이미 샀는데  그런 누나는 이미 옷장에

 

  물방울무늬야 착하지  동그라미는 동그라미인 척도 잘하지  무지개보다 레인보우에 가깝다는 이야기  만져보면 비슷할 수도 있어

 

  견딜 수 없는 색깔을 골라보자  수염 난 축구공이 굴러간다  보건실에서 몰래 기다리는 짝꿍  남자애들이 웃으며 뺑뺑이를 타는 동안  지그재그 반복되는 재채기

 

  생일에는 가족사진을 다시 그릴 수밖에  아무도 귀가 없어서 댜행이야

 

  노랑과 옐로는 너무 많은 밤을 오렸다  성별이 다른 별을 꿰매는 건 위험해  우리는 틀린그림찾기처럼 조금만 달랐는데  왜 아들은 두 글자일까

 

  살아 있는 물방울들은 방금 다 외웠어

 

  나와 언니를 섞으면 하얗게 된다  나에게 누나를 바르면 까맣게 된다

 

  내가 나를 동그랗게 벗고 굴러간다

 

< >

 

강혜빈 시인: 2016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밤의 팔레트』 『미래는 허밍을 한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