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의 시인들

■ 하재연 시인의 시 ■ 양양 & 화성의 공전 & 너의 라디오 & 양피지의 밤 & 우주 바깥에서

by 시 박스 2024. 5. 13.
728x90

< >

화성 탐사 로봇

 

물고기는 눈을 감지 못하니까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한다고

 

양양

 

 

 

  열 마리 모래무지를 담아두었는데

  바다로 돌려보낼 때

  배를 드러낸 채 헤엄치지 못했다고 했다.

 

  집에 와 찾아보니

  모래무지는 민물고기라고 했다.

 

  누군가의 생일이라 쏘아 올린 십 연발 축포는

  일곱 발만 터져 행운인지 불운인지 모르겠다고

 

  노란 눈알이 예뻤는데

 

  물고기는 눈을 감지 못하니까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한다고 했다.

 

< >

 

인간의 죽음과는 연관하지 않고
아름다운
푸른 불꽃의 석양 쪽으로 가산되는

 

화성의 공전

 

 

 

  암뿌우르에 봉투를 씌워서 그 감소된 빛은 어디로 갔는가

-이상, 「지도의 암실」

 

 

  지구에서 지낸 밤이 깊어질수록

  나는 점점 더 부족해진다.

 

  더 많은 나의 숨이 필요하다.

 

  뒤집어져 불길로 타오르는 것

  망가진 고요를 통해서만

  나는 너를 조금 이해한다.

 

  오래전의 미래를 향해 침식되는 대기

 

  두 개의 영혼 사이에서 부서지는 인간의 마음

 

  인간의 죽음과는 연관하지 않고

  아름다운

  푸른 불꽃의 석양 쪽으로 가산되는

  꿈의 시간들

 

  이제 나는 화성의 고리가 되어가고

 

  발생하는 

  희미한 빛

 

< >

 

라디오는 라디오가 아닌 이름으로
불려본 적이 없으니까
자신의 검고 수많은 구멍이 이제 무엇에 소용되는지
알지 못한다.

 

너의 라디오

 

 

 

  주파수를 영원히 맞출 수 없는 라디오는

  아직 라디오라고 불리고 있다.

  라디오로 남아 나의 머릿속에 작은 구멍들을 낸다.

 

  라디오는 내가 사랑하는

  라디오는

  검고 수많은 구멍이 뚫린 라디오였는데

  검고 수많은 뚫린 구멍들의 라디오로 남아

  나에게 현실의 음악을 들려주지 않는다.

 

  라디오는 라디오가 아닌 이름으로

  불려본 적이 없으니까

  자신의 검고 수많은 구멍이 이제 무엇에 소용되는지

  알지 못한다.

  영원히 알지 못할 것이다.

 

  개의 꿈을 대신 꾸고

  나는 도둑개를 내쫓았지만,

  그건 진짜 개의 꿈은 아니었고,

  소시지를 훔쳐 간 것은 개가 아니었고,

  나는 진짜 도둑이 아닌 개의 가짜 꿈을 꾼

  개 주인이었고,

 

  쫓겨난 개는 한없이 나라는 주인의 오두막 주위를 떠

돌고 있었다.

  이상하게 끝나지 않는 겨울에.

 

< >

 

네가 도착할 수 있는 거리를
처음으로
발명하기 위해

 

양피지의 밤

 

 

 

  이런 밤마다

  나의 시간이 얇아지고 있다.

  짐승의 가죽과 같이  늘어나는 것 헤어지는 것 결국 구멍이 나버리는 것들.

 

  구멍 너머로  먼 세계가 보인다.

 

  우주의 커다란 손가락으로 토성의 고리를 만지는 것은어떤 느낌일까.

 

  아름답고 얼얼하게  투명한 글자를 쓴다.

 

  시간을 이어 붙여 생긴 삼각지대에  너의 이름 앞으로 초대장을 쓴다.

 

  안녕, 하는 입술의 벌어지는 ㅇ과 닫히는 ㅇ을  소리 없이 흉내 내며 눈이 그칠 줄 모른다.

 

  그 눈 속에 나는  꿈속의 네 집 앞을  발바닥으로 무용하게 쓸고 있었다.

 

  토성의 고리가 되어버린 어떤 죽음을 생각하며

 

  네가 도착할 수 있는 거리를  처음으로  발명하기 위해

 

< >

 

어둠이 완벽하게 얼어붙어 있다.
나의 호흡이 매 순간 사라질 것만 같다.

 

우주 바깥에서

 

 

 

  추위가 없었다면 우리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살아 있다는 것은  꼭  이런 방식이어야 할까.

 

  외계인에게 손가락이 주어진다면  다른 생물에게 온도를 전달하며 생명을 유지하게 될까.

 

  뜨거운 열역학적 죽음들 사이로  시간이 흐른다.

 

  어둠이 완벽하게 얼어붙어 있다.  나의 호흡이 매 순간 사라질 것만 같다.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서의 나

 

  손아귀 속의 따뜻함은  너와 나의 .삶을 손상시키지 않고  이곳 건너편의 이곳으로 옮겨 갈 수 있을까.

 

  상처 난 아이의 발가락이 조개껍데기 안에 담기듯이.

 

< >

 

하재연 시인: 2002년 제1회 《문학과사회》 신인상으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으로, 『라디오 데이즈』 『세계의 모든 해변처럼』 『우주적인 안녕』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