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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시인들

■ 허수경 시인의 시■ 이국의 호텔 & 너무 일찍 온 저녁 & 내 손을 잡아줄래요? & 사진 속의 달 & 빙하기의 역

by 시 박스 2024. 5.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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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 문

 

자연을 과거 시제로 노래하고
당신을 미래 시제로
잠재우며
이곳까지 왔네 이국의 호텔에 방을 정하고

 

이국의 호텔

 

 

 

  휘파람, 이 명랑한 악기는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우리에게 날아온 철새들이 발명했다 이 발명품에는

그닥 복잡한 사용법이 없다 다만 꼭 다문 입술로 꽃

을 피우는 무화과나 당신 생의 어떤 시간 앞에서 울

던 누군가를 생각하면 된다

 

  호텔 건너편 발코니에는 빨래가 노을을 흠뻑 머

금고 붉은 종잇장처럼 흔들리고 르누아르를 흉내낸

그림 속에는 소녀가 발레복을 입고 백합처럼 죽어

가는데

 

  호텔 앞에는 병이 들고도  꽃을 피우는 장미가 서

있으니 오늘은 조금 우울해도 좋아 

  장미에 든 병의 향기가 저녁 공기를 앓게 하니 오

늘은 조금 우울해도 좋아

 

  자연을 과거 시제로 노래하고 당신을 미래 시제로

잠재우며 이곳까지 왔네 이국의 호텔에 방을 정하고

밤새 꾼 꿈 속에서 잃어버린 얼굴을 낯선 침대에 눕

힌다 그리고 얼굴에 켜지는 가로등을 다시 꺼내보는

저녁 무렵

 

  슬픔이라는 조금은 슬픈 단어는 호텔 방 서랍 안

성경 밑에 숨겨둔다

 

  저녁의 가장 두터운 속살을 주문하는 아코디언 소

리가 들리는 골목 토마토를 싣고 가는 자전거는 넘

어지고 붉은 노을의 살점이 뚝뚝 거리에서 이겨지는

데 그 살점으로 만든 칵테일, 딱 한 잔 비우면서 휘

파람이라는 명랑한 악기를 사랑하면 이국의 거리는

작은 술잔처럼 둥글어지면서 아프다

 

  그러니 오늘은 조금 우울해도 좋아 그러니 오늘은

조금 우울해도 좋아,라는 말을 계속해도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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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옷을 입은 여자가 검은 물을 길어 창문을 넘
어오기 전
누군가는 태양을 과도로 깎았다
태양 한 조각 입안에 넣고 우물거렸다

 

 

너무 일찍 온 저녁

 

 

 

  누군가 이 시간에 자리를 내주고 떠났다 

  아무도 세속의 옷을 갈아입지 못한 시간 

  태양은 한 알 사과가 된다

 

  사과와 사과 

  뉘우치지 못해 어떤 이는 깊게 울었다

 

  검은 옷을 입은 여자가 검은 물을 길어 창문을 넘

어오기 전 

  누군가는 태양을 과도로 깎았다 

  태양 한 조각 입안에 넣고 우물거렸다

 

  그 방 안에 같이 사는 거미에게 

  태양 한 조각 거미줄에 걸어주며 

  점점 컴컴해지는 내장을 태양 조각으로 밝히고

있다

 

  내장의 구멍은 후세로 난 길 

  안이 밟아지고 바깥이 어두워질 때 

  태양을 대신할 천체의 둥근 공들은 

  태양 한 점씩 먹고 거미줄에 걸려 환하다

 

  그 저녁, 너무 빨리 와서 

  나를 집어먹은 짐승은 나다. 

  태양의 마지막 조각을 구멍 뚫린 하늘에 올렸네 

  젖은 내장도 어둠 속에 걸어두었네

 

  그렇게 한 저녁은 모래뻘 속 바지락처럼 오고 

  바지락껍데기를 뭉개고 가는 

  트럭의 둥근 바퀴 밑 어둠 속

 

  쓰게 쓰게 그렇게 

  조개들은 먼 무덤을 부르다가 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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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손을 잡아줄래요?
피하지 말고 피하지 말고
그냥 아무 말 없이 잡아주시면 됩니다

 

 

내 손을 잡아줄래요?

 

 

 

  어느 날 보았습니다 

  먼 나라의 실험실에서 생의학자가 내가 가진 인간

에 대한 기억을 쥐가 가진 쥐의 기억 안에 집어넣는

것을

 

  나와 쥐는 이제 기억의 공동체입니다 하긴 쥐와

나는 같은 별에서 오랫동안 함께 살았습니다 

  사랑을 할 때 어떤 손금으로 상대방을 안는지 우

리는 아주 오랫동안 생각했지요 쥐의 당신과 나의

당신은 어쩌면 같은 물음을 우리에게 던질지도 모르

겠습니다

 

  내 손을 잡아줄래요? 

  피하지 말고 피하지 말고 

  그냥 아무 말 없이 잡아주시면 됩니다

 

  쥐의 당신이 언젠가 떠났다가 불쑥 돌아와서는 먼

대륙에서 거대한 목재처럼 번식하는 고사리에 대해

서 말을 할 때 

  나의 당신은 시간이 사라져버린 그리고 재즈의 흐

느낌만 남은 박물관에 대해서 말할지도 모릅니다

 

  쥐의 당신이 이제 아무도 부르지 않는 유행가를

부르며 가을 강가를 서성일 때 

  나의 당신은 이 계절, 어떤 독약을 먹으며 시간을

완성할지 곰곰히 생각합니다

 

  푸른 별에는 당신의 눈동자를 가진 쥐가 산다고

나는 말했지요, 당신, 나와 쥐의 공동체를, 신화는

실험실에서 완성되는 이 불우한 사정을 말할 때

 

  내 손을 잡아줄래요? 

  피하지 말고 피하지 말고 

  내가 왜 당신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지 

  그 막연함도 들어볼래요?

 

  이건 불행이라고, 중얼거리면 

  모든 음악이 전쟁의 손으로 우리를 안아주는 그런

슬픈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건 사랑이라고, 중얼거리면 

  모든 음악이 검은빛으로 변하는 그런 처참한 이야

기도 아닙니다

 

  다만 손을 잡아달라는 간절한 몸의 부탁일 뿐입

니다 

  내가 하지 않으면 내 기억을 가진 쥐가 당신에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내 손을 잡아줄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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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네가 떠났는지 말해줄 수도 없다
다만 사진 속의 달이다 
달을 기다리며 저 언덕에 서 있다가

 

사진 속의 달

 

 

 

  이것은 슈퍼문이다 

  이것은 언젠가 슈퍼문이 있었다는 증거다 

  그리고 이것은 네가 내 옆에서 

  달을 보았다는 증거는 아니다 

  왜 얼굴 없는 바람은 저렇게 많은 손가락을 가져서 

  네가 떠난 자리를 수천 개의 장소로 만드는지 

  왜 네가 떠났는지 말해줄 수도 없다 

  다만 사진 속의 달이다  달을 기다리며 저 언덕에 서 있다가 

  우리가 나누어 마셨던 녹차의 흔적도 없다 

  술 대신 마셨다 

  네 건강의 슈퍼문이 다쳤다고 했다 

  구운 고기도 짠 김치도 없는 녹차 잔 속의 슈퍼문 

  다만 사진 한 장 

  그 앞에서 널 생각하는 것은 지병이어서 

  지난밤 베개에 옴폭 파인 홈처럼 

  이유가 있을 리 없다 

  지병의 기원을 슈퍼문 사진 한 장이 

  알려줄 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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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우리는 만났다
얼어붙은 채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빙하기의 역

 

 

 

  오랜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우리는 만났다 

  얼어붙은 채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내 속의 할머니가 물었다, 어디에 있었어? 

  내 속의 아주머니가 물었다, 무심하게 살지 그랬니? 

  내 속의 아가씨가 물었다, 연애를 세기말처럼 하기도 했어? 

  내 속의 계집애가 물었다, 파꽃처럼 아린 나비를

보러 시베리아로 간 적도 있었니? 

  내 속의 고아가 물었다, 어디 슬펐어?

 

  그는 답했다, 노래하던 것들이 떠났어 

  그것들, 철새였거든 그 노래가 철새였거든 

  그러자 심장이 아팠어 한밤중에 쓰러졌고 

  하하하, 붉은 십자가를 가진 차 한 대가 왔어

 

  소년처럼 갈 곳이 없어서 

  병원 뜰 앞에 앉아 낡은 뼈를 핥던 

  개의 고요한 눈을 바라보았어

 

  간호사는 천진하게 말했지 

  병원이 있던 자리에는 죽은 사람보다 죽어가는 사

람의 손을 붙들고 있었던 손들이 더 많대요 뼈만 남

은 손을 감싸며 흐느끼던 손요

 

  왜 나는 너에게 그 사이에 아무 기별을 넣지 못했을까?

 

  인간이란 언제나 기별의 기척일 뿐이라서 

  누구에게든 

  누구를 위해서든

 

  하지만  무언가, 언젠가, 있던 자리라는 건, 정말 고요한

연 같구나 중얼거리는 말을 다 들어주니

 

  빙하기의 역에서 

  무언가, 언젠가, 있었던 자리의 얼음 위에서 

  우리는 오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아이처럼 

  아이의 시간 속에서만 살고 싶은 것처럼 어린 낙

과처럼 

  그리고 눈보라 속에서 믿을 수 없는 악수를 나누었다

 

  헤어졌다 헤어지기 전 

  내 속의 신생아가 물었다, 언제 다시 만나? 

  네 속의 노인이 답했다, 꽃다발을 든 네 입술이 어

떤 사랑에 정직해질 때면 

  내 속의 태아는 답했다, 잘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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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경 시인: 1987년 《실천문학》 등단. 시집으로 『슬픔만 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혼자 가는 먼 집』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등. 산문집으로 『모래도시를 찾아서』 『너 없이 걸었다』 『그대는 할 말을 어디에 두고 왔는가』 등이 있다. 동서문학상, 전숙희문학상, 이육사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나, 2018년 10월 지병으로 별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