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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시인들

■ 김언 시인의 시 ■ 백지에게 & 가족 & 나는 원했다 & 계속되는 마지막

by 시 박스 2024. 5.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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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백지가 놓인 이미지

 

 비어 있다고 백지는 아니다.
백지로 차 있다고 해서 백지는 아니다.
백지는 백지답게 불쑥 튀어나온다.
백지였다는 생각을 잠시 잊게 만드는 백지 앞에서 백지를 쓴다.

 

백지에게

 

 

 

  백지가 되려고 너를 만났다. 백지가 되어서 너를 만나고

백지처럼 잊었다. 너를 잊으려고 백지답게 살았다. 백지가

저기 있다. 백지는 여기도 있다. 백지는 어디에나 있는 백

지. 그런 백지가 되자고 살고 있는 백지는 백지답게 할 말

이 없다. 대체로 없소 한 번씩 있다. 백지가 있다. 백지에

서 나오는 말들. 백지에서 나와 백지로 돌아가기를 거부하

는 말들. 도무지 백지가 될 수 없는 말들이 한마디로 그치

지 않을 때 두 마디로도 그치지 않고 모자랄 때 모자란 만

큼 잠식하는 백지의 운동은 백지를 갉아먹는다. 백지를 지

워 나간다. 백지를 삭제하는 방식으로 말하는 백지의 운동

은 점점 더 백지를 떠난다. 백지가 되지 않으려고 너를 만

난 것 같다. 백지가 되지 않아서 너를 만난 것 같기도 하

다. 백지는 충분한데 백지는 불충분한 사람을 부른다. 백

지는 깨끗한데 백지처럼 깨끗하지 못한 사람을 다시 부른

다. 백지는 청소한다. 백지에 낀 백지의 생각을. 백지는 도

발한다. 백지처럼 잠든 백지의 짐승을. 으르렁대는 소리도

으르렁대다가 눈빛만 내보내는 소리도 백지는 다 담아 준

다. 백지가 아니면 담기지 않는 소리를 백지가 담으니까 이

렇게도 어수선하고 시끄럽고 그걸 다 모아서 백지는 입을

다문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백지 한 장이 있

다. 너무 소란스러운 가운데 백지 한 장을 찾는다. 백지가

어디로 갔을까? 비어 있다고 백지는 아니다. 백지로 차 있

다고 해서 백지는 아니다. 백지는 백지답게 불쑥 튀어나온

다. 백지였다는 생각을 잠시 잊게 만드는 백지 앞에서 백지

를 쓴다. 백지라는 글자를 쓰고 또 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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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서도 활력이 넘치는 사람들이

  나의 가족이다. 가족들이 있어

  내가 살아왔다는 말···

 

가족

 

 

 

  자고 일어나니까 가족들이 모두 죽어 있었다.

  나만 빼고 모두 죽어 있는 가족들이 안방에도 있고

  거실에도 있고 부엌과 화장실에도 있었다.

  우리 가족이 이렇게나 많았나 싶게

  모두 아는 얼굴을 하고 친근한 표정까지 덮어쓰고서

  죽어 있다. 죽을 때도 나만 쏙 빼놓고 죽은 사람들이

  어떻게 나의 가족이 되었는지

  잠을 깨고서도 나는 알지 못한다.

  깨달을 수 없는 일이 자꾸 벌어지는데

  오늘 아침의 이 시체들 말고도 허다하게 널린 것이

  죽음인데 죽음의 목격이고 참상인데

  다들 밝은 표정이다. 심지어 웃고 있는 것 같다.

  한 명은 아예 툴툴 털고 일어나서

  곧 걸어 나갈 사람처럼 씩씩해 보인다.

  죽어서도 씩씩하고 죽어서도 왕성하고

  죽어서도 활력이 넘치는 사람들이

  나의 가족이다. 가족들이 있어

  내가 살아왔다는 말

  틀리지 않다. 부정하고 싶지도 않다.

  다 가족들 덕분이다.

  가족들이 있어 지금껏 살고 있고

  무사히 살고 있고 아직도 보고 있다.

  오늘 아침의 이 시체들을

  파리한 낯빛이 되어 혼자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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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없는 것.
그것이 네가 원하는 것이냐 묻는다면 그렇지 않다고 말하면서 원했다.
그럴 수는 없다고 말하면서 원했다.
원하지 않아도 원하는 것을 원하지 않고서는 결코 원할 수 없는 것

을 함께 원했다

 

나는 원했다

 

 

 

  나는 원했다. 무얼 원했고 어떻게 원했고 얼마나 원했는

지 다 잊어버렸지만 내가 원했다는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

고 원했다. 원하는 것을 갖기 위해서가 아니라 원하는 것

을 원하기 위해 내가 있었고 네가 있었고 누구라도 있었을

테지만 아무도 없더라도 나는 원했다. 아무도 없는 것. 그

것이 네가 원하는 것이냐 묻는다면 그렇지 않다고 말하면

서 원했다. 그럴 수는 없다고 말하면서 원했다. 원하지 않

아도 원하는 것을 원하지 않고서는 결코 원할 수 없는 것

을 함께 원했다. 나는 원했다. 그것이 무엇이냐고 원했고 그

것이 어떻게 가능하냐고 원했고 얼마든지 원했다. 그래서

행복한가? 그래서 망각했다. 그래서 편안한가? 그래서 쉬고

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얼마든지 원하는 것을. 어떻게든

원하는 것을. 왜 원하는가 묻고 있는 것을. 묻다가 정말로

파묻어 버리는 것을. 그것은 땅속에 없다. 지상에도 없다.

물속에도 없고 어디에도 없다. 어디에도 없는 그것을 웃다

가 울다가 그치다가 말다가 끝내는 원하는 것. 원해서 더

원하고 더 원해서 올라가는 연기를. 먼지를. 모래를. 그리고

바윗덩어리를 더 크게 더 크게 그려 넣으면서 나는 원했다.

하늘에 혹성이 떠 있는 날에도 원했다. 하늘에서 모든 행

성이 지워진 날에도 원했다. 빛은 무겁고 모든 것을 쓸어

가 버린다. 어둠과 함께 그것을 원했다. 그것이 네가 원하

는 것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다시 원하겠다. 그것이 무엇이

냐고.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냐고. 그리고 얼마든지 물어보

시라고. 내가 원하는 것을. 어쩌면 당신이 원하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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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로운 삶. 외로운 삶. 그리고 계속되는 죽음.

  계속되는 마지막.

 

계속되는 마지막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이고도 그는 죽었고

  그렇게 많은 사람을 살리고도 그는 죽었다.

  아무런 차이도 없는 이 죽음을 변별하기 위해

  역사가 끼어든다. 윤리하고 해도 좋다.

  의로운 삶. 외로운 삶. 그리고 계속되는 죽음.

  계속되는 마지막.

 

  청중들은 지루해하고 있다.

  관객들도 지루해하고 있다.

  독자들도 미친 듯이 다음 결말을 기다리지 않고

  서성이게 되었다. 신간 서적 앞에서

  곧 나올 책의 목록을 눈여겨보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다음 호를 손에 넣었다.

  이듬해 나올 창간호도 미리 넣었다.

  각자의 호주머니 속에서

  무엇이든 꺼내고 도로 집어넣는다.

  그렇게 많은 책을 사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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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언 시인: 1998년 《시와사상》으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으로 『숨 쉬는 무덤』 『거인』 『소설을 쓰자』 『모두가 움직인다』 『한 문장』 『너의 알다가도 모를 마음』 『백지에게』.
산문집으로 『누구나 가슴에 문장이 있다』 『오래된 책 읽기』.
시론집  『시는 이별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비평집 『폭력과 매력의 글쓰기를 넘어』 등.
미당문학상, 박인환문학상, 동료들이 뽑은 올해의 젊은 시인상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