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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시인들

■ 김지녀 시인의 시 ■ 정착 & 쿠바에서 방배동으로 가는 버스 &누군가 내 창문을 다 먹어 버렸다 & 개미에 대한 예의 & 도그 워커

by 시 박스 2024. 5.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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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 , 노트북

 

방금 기이한 새소리를 들었다
새가 보이지 않아서
음악과 같았다

 

 

정착

 

 

 

  노트에 배 안에서 읽은 책의 제목을 적었다

  이것이 기록의 전부다

  노트는 열려 있고

 

  한 달이 지났을 때의 일이다

  이 섬이 나에겐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묘사하기가 어렵다

  너무 단순하기 때문에

  해안선이 복잡했다

 

  이 섬으로 들어오는 일은 좋았다

  내가 기억할 수 없는 시간을 간직한

  좁고

  비천한 골목을 내고

  난파 직전의 배처럼 바다에 떠 있는

  섬이

  이미 있었다는 것이, 나를 일렁이게 했으므로

 

  방금 기이한 새소리를 들었다

  새가 보이지 않아서

  음악과 같았다

 

  한 달이 넘도록 책의 제목만 적힌 노트에 섬, 이라고 적었다

  조금 일그러진 모양으로 섬이 커졌다

  길어졌다고 하는 것이 정확하다

  이 섬은 무한한 점들로 이루어져 있다

  노트에 줄 하나가 그어졌다

 

  한 달이 지났을 때

  창문의 테두리 하나를 나는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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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방 주둥이를 닫고
외로움은 이런 식이었지
내릴 곳은 많은데 내릴 마음이 없는
사람들이 올라탄다

 

 

쿠바에서 방배동으로 가는 버스

 

 

 

  때도 모르고 터져 나오는 눈물 같은 것으로 나는 옆길로 빠지고

  코를 풀면서 아무렇지 않게 돌아온다

 

  옷이 많아서

  우유부단하고

  땀을 많이 흘렸지만 정거장마다 사람들은 버스에 올라탄다

  그리곤 잠에 빠진다

  옆자리에 앉은 남자가 내 어깨로 자꾸 쏟아진다

  햇살이 따가웠어 그날

  애인처럼 내 어깨에 기대서 곤히 잠들었다가

  남자는 갑자기 눈을 부릅뜨고 두리번거리더니 뛰쳐나간다

 

  외로움은 이런 식이었지

  정거장이 참 많아 옆자리 남자가 바뀌고 때론

  여학생이 앉아 화장을 고치고

  들뜬 기분으로 낭비된 하루는 섰다 가다를 반복한다

  다름 정류장은 마흔

  오르막이 있는 곳

  떫은 열매가 떨어진다 잎사귀만 무성한 곳

  마흔에 나는 내리지 못하고

  그릇에 말라붙은 음식 찌꺼기를 생각한다

 

  옷이 많은데 옷을 사고

  가방 속에 가방과 더 작은 가방을 넣고

  더 큰 가방을 찾아다닌다 옆자리에 가방이 앉아 입을 크게 벌리고 있다

  햇살이 따가웠어 그날

  쓸데없이 젖은 휴지를 찢으면서 열정은 좋지 않은가?

  약소국의 비애를 간직한 나라에서 사는 건

  좋지 않은가? 좋지 그렇지 좋지

  않지

 

  가방 주둥이를 닫고

  외로움은 이런 식이었지

  내릴 곳은 많은데 내릴 마음이 없는

  사람들이 올라탄다

  다 내릴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올라탄다

  나는 나를 엿보면서 새로운 도시에 진입한다

  다른 색으로 얼굴을 칠하고 마르기를

  콧물과 우연이 마르기를

  기다린다

  < >

 

 

당신이 먹고 있는 포도알 속에 나의 창문이 있다
당신 손톱 밑에 물든 먹자주색이
나의 창문을 뺀 나머지다
한 개씩,
껍질로 남은 것들은 퉤, 뱉어진 이야기의 테두리

 

 

누군가 내 창문을 다 먹어 버렸다*

 

 

 

  맴돌기만 하고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 단어 있잖아

  같이 생각해 줄 수 없는데

  누군가에게 계속 던지는 있잖아 그거,

 

  포도 한 송이

 

  당신이 먹고 있는 포도알 속에 나의 창문이 있다

  당신 손톱 밑에 물든 먹자주색이

  나의 창문을 뺀 나머지다

  한 개씩,

  껍질로 남은 것들은 퉤, 뱉어진 이야기의 테두리

 

  속없이 

  나는 다 말했다

  블라인드를 내리는 기분으로

  차분하게

  억울했지만 나보다 더 억울한 사람들이 많았다는 걸 알았으므로

  열었다 닫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오랫동안 열지 않으면

  잘 열리지 않아

  창문을 잃게 된다는 것도

 

  당신은 알고 있다 알고도 모른 척 입 다문

  당신은 창문이 얼마 남지 않았다

  당신을 책을 쓴다

  새로운 애인

  새로운 연필

  새로운 포도알을 따서 정말 새로운 것처럼

 

  관리 사무소에서 알립니다

  오늘 아파트 외벽 크랙 및 페인트 공사를 진행합니다

  입주민들께서는 되도록 창문을 열지 마시고

  갑자기 놀라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포도의 계절에

  당신과 나는 갑자기 헤어졌다

  알고 있다

  당신은 배가 부르다

  당신이 다 먹은 포도알 속에 나의 창문이 있다

 

  단어는 결국 떠오르지 않았다

  그거 있잖아,

  그거,

 

  당신의 책이 배달됐다

  열리지 않았다

 

 

* 훈데르트바서의 그림 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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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미의 움직임을 보고 있으면
삶은 더듬이를 세운 앞이 아니라 뒤나 옆에서
느닷없이 불구가 된다는 것

 

 

개미에 대한 예의

 

 

 

  개미로 태어나지 않았지만

  나는 개미만큼 작아져

  마음을 받치고 있는 얇은 다리

  종일 방향을 바꾸다

  김밥 한 줄이 왜 이렇게 긴가, 하고 멈췄다

 

  거리엔 바삐 다니는 사람들

  그 대열에 합류하자 나는 개미보다 구멍을 잘 팔 것 같아

  안녕하세요. 저는 시를 쓰는 개미입니다

  예의 바르게 인사할 뻔했다

 

  다음 날 놀이터에는 역시 나와 개미 그리고  가끔 우는 새뿐이었다

  개미가 발등을 타고 내게 기어오를 때

  내 다리가 살아 있어

  내 귀가 간지러워

  그리고 가끔 아이들은 개미 밟는 일을 즐거워하며 뛰어다녔다

  개미의 움직임을 보고 있으면

  삶은 더듬이를 세운 앞이 아니라 뒤나 옆에서

  느닷없이 불구가 된다는 것

 

  나는 밟혀 죽은 개미들을 모아

  아무도 모르는 구멍 속에 넣어 주었다

 

  파묻히는 기분으로 잠들었다 땅이 움직인 날에, 구멍은

사라졌다 구멍은 구멍으로 어디로 가든 구멍, 꿈에서 개미

보다 많은 발로 기어 다녔다 아무 일도 안 하고 수개미처

럼 교미 후 죽었다

 

  사람으로 태어났지만

  내 하루하루는 개미가 물고 가는 나뭇잎 쌀알보다 작고 가볍다

  내가 정말 깨어난 걸까

  내가 정말 사랑한 걸까

  정말

  정말 내가 사람일까

  어제 먹다 남은 김밥에선 벌써 상한 냄새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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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한 페이지를 읽을 정도의 시간이 목줄에 묶여 있다
그러나 책은 열지 않는다
지금 누군가의 생각을 엿본다는 것은 좀 지성적이다

 

 

도그 워커

 

 

 

  라떼를 데리고 공원으로 간다 수도원만큼 따분해서

  공원으로 간다 라떼는 평소만큼 먹질 않는다

  커다란 선인장나무 냄새를 맡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라떼는 달린다 아름다운 날이다

  라떼 라떼 나직하게 부르면 라떼는 라떼인 것처럼

  멈춘다 나는 나인 것처럼

  고독하다 나와 만난 지 두 달하고 엿새

  라떼는 공원으로 간다 나를 데리고

  언덕이 많다 오르다 보면 다른 오르막으로

  나뭇가지처럼 뻗어 올라간다

  오르막 중간에 공원이 있다

  라떼는 잘 깎인 잔디가 따분해서 잔디에 앉는다

  책의 한 페이지를 읽을 정도의 시간이 목줄에 묶여 있다

  그러나 책은 열지 않는다

  지금 누군가의 생각을 엿본다는 것은 좀 지성적이다

  공원은 라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라떼는 워킹이 요염하다

  나와 성향이 잘 맞지 않지만 따분함을 깨는 발자국이 있다

  나보다 작지만 나보다 까칠한 발바닥이 있다

  라떼는 부쩍 짖지 않고

  죽음처럼 잔다

  깨어 있는 시간이 줄어드는 것은

  나도 마찬가지 스케줄러에 빈칸이 늘어 간다

  공원으로 간다

  라떼처럼 방광이 약해졌는지 소변이 조금씩 샌다

  책을 읽지 않기 위해 책을 산* 오후가 오르막에 걸려 잘 넘어가지 않고 있다

 

김지녀 시인: 2007년 《세계의 문학》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시소의 감정』 『양들의 사회학』 『방금 기이한 새소리를 들었다』 등이 있다.

 

* 페르난두 페소아의  『불안의 책』에서 빌려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