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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시인들

■ 서효인 시인의 시 ■ 백 년 동안의 세계대전 & 가정집 & 그의 옆집 & 핍진성

by 시 박스 2024. 5.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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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에 따뜻한 가정집

 

 

명령을 기다리며 전쟁의 뒤를 두려워하

는 당신은 사람이었다. 백 년이 지나 당신의 평화는 인간적

으로, 계속될 것이다. 당신이 사람이라면.

 

백 년 동안의 세계대전

 

 

 

  평화는 전투적으로 지속되었다. 노르망디에서 시베리아

를 지나 인천에 닿기까지, 당신은 얌전한 사람이었다. 검독

수리가 보이면 아무 파티션에나 기어들어 둥글게 몸을 말

았다. 포탄이 떨어지는 반동에 당신은 순한 사람이었다. 늘

10분 정도 늦게 도착했고, 의무병은 가장 멀리에 있었다.

지혈하는 법을 스스로 깨치며 적혈구의 생김처럼 당신은

현명한 사람이었다. 전투는 강물처럼 이어진다. 통신병은

터지지 않는 전화를 들고 울상이고, 기다리는 팩스는 오지

않는다. 교각을 폭파하며 다리를 지나던 사람을 헤아리는

당신은 정확한 사람이다. 굉음에 움츠러드는 사지를 애써

달래며 수통에 논물을 채우는 당신은 배운 사람이다. 금

연 건물에서 모르핀을 허벅지에 찌르는 당신은 인내심 강

한 사람이다. 허벅지 안쪽을 훔쳐보며 군가를 부르는 당신

은 멋진 사람이다. 노래책을 뒤지며 모든 일을 망각하는 당

신은 유머러스한 사람이다. 불침번처럼 불면증에 시달리는

당신은 사람이다. 명령을 기다리며 전쟁의 뒤를 두려워하

는 당신은 사람이었다. 백 년이 지나 당신의 평화는 인간적

으로, 계속될 것이다. 당신이 사람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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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은 진득하게 늘어지고 더위는 엿같이 풍성할 것이다

  가정집을 찾아야 하는데

  대답이 없다

 

가정집

 

 

 

  그런 게 있습니까

  겨울에 따뜻하고 여름에 시원한 집

 

  그곳에는 가정집이 있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말했다 집주

인 아줌마, 요크셔레리어, 부동산 중개업자, 형광등, 길 고

양이, 마을버스가 모두 그랬다 잠 속에서 나는 용달차를

불렀고 귀히 여기던 양장본들을 버렸다 게슴츠레한 요의에

잠의 손을 뿌리치면 창이 없는 방에서 또 다른 골목이 둥

그런 지도를 그렸다 습기였다 나는 최대한 건조해지기 위

해 입을 다물고 기지개를 켰다 겨울은 늦여름 엿처럼 늘어

지고 있다

 

  오래오래 잘 수 있는 방이었다 골목에 줄을 긋고 있노라

면, 엎드린 자세 뒤로 누가 쫓아오는 것 같았다 잠이었다

잠에서 깨어나면 밤은 여전히 어두웠다 해진 칫솔처럼 머

리가 아팠다 어둠의 호위를 받는 그를 방에서 쫓아내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잠과 잠이 손에 손을 잡고 방과 방을 차

지했다 집이 아니기 때문일까 나는 잠자코 있어야만 했다

늦은 눈이 내린다 골목의 뒤가 퉁퉁 붓고 있다

 

  이 모든 게 가정집 때문이다 앞으로는 불가능에 관해서

만 논하기로 한다 역에서 걸어 3분, 공화당의 금연 선언,

착한 어린이, 수리한 싱크대, 단식하는 개, 친절한 이웃, 그

런 게 있습니까?

 

  겨울은 진득하게 늘어지고 더위는 엿같이 풍성할 것이다

  가정집을 찾아야 하는데

  대답이 없다

   < >

 

 

우리는 계속해서 늙었다. 옆집은 그대로다.
보이지 않는 것은 보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남은 음식이 뒤섞인 그릇을 오늘 자 신문으로 덮는다.
악마의 행복도 이렇게, 치밀하지 못했다.

 

그의 옆집

 

 

 

  그의 옆집에서 우리는 커피를 나눠 마셨다. 늙은 시인,

더욱 늙은 시인이 입술을 둥글게 하고 액체의 표면을 후후

불었다. 그의 옆집에서 우리는 장기를 두었다. 늙은 시인과

더 늙은 시인이 마주 보았다. 더욱 늙은 시인이 여러 가지

를 참견하였다. 옆집은 조용하다. 그의 옆집에서 우리는 중

국 음식을 주문했다. 짬뽕과 짜장면과 탕수육이 왔다. 늙

은 시인이 침을 흘리고 더 늙은 시인이 랩을 뜯었다. 더욱

늙은 시인이 나무젓가락을 비대칭으로 갈라놓았다. 그의

옆집에서 북방의 냄새가 번져 나갔다. 담을 넘어가는 빨간

냄새를 늙은 시인은 황망히 쳐다보았다. 덜 늙은 시인이 큰

일 났다는 시늉을 하며 손을 휘적거렸다. 더욱 덜 늙은 시

인이 스프레이 모기약을 뿌렸다. 그의 옆집에서 우리는 커

피를 나눠 마셨다. 옆집은 조용하다. 물을 끓이고 종이컵에

프림을 부었다.  젊은 시인은 조용히 장기판을 다시 편다.

덜 젊은 시인은 담배를 물고 라이터를 찾는다. 더욱 덜 젊

은 시인은 그러모은 침을 화분에 뱉는다. 옆집에서 사이렌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옆집에서 총소리가 나는 것 같다.

옆집에서 살이 터지고 뼈가 부러지는 것 같다. 우리는 늙

었으니까 잘못 들을 수 있다. 우리는 젊으므로 행복할 권

리가 있다. 우리는 그의 옆집에서 그의 발소리를 숨죽여 기

다린다. 급기야 시인들은 서로를 몽둥이로 때리며 점점 분

명해지는 옆집의 소리를 외면한다. 우리는 계속해서 늙었

다. 옆집은 그대로다. 보이지 않는 것은 보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남은 음식이 뒤섞인 그릇을 오늘 자 신문으로 덮는

다. 악마의 행복도 이렇게, 치밀하지 못했다.*

 

* 김남주의 「학살 2」에서 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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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집에서, 옆집에서, 세계 곳곳에서

  더 이상의 폭로는 자제하겠습니다

  저는 상대방과 틀립니다, 아니 다릅니다

  도대체 뭐가 다르다는 거요

  물론 정책이죠, 성격이거나

 

핍진성

 

 

 

  존경하는 주민 여러분

  상대방은 거짓말의 달인입니다

  저와는 완전히 틀립니다 아니, 달라요

  성격 차이입니다 아니, 정책 차이죠

  저는 정직합니다 아니, 일을 잘합니다

  이번 선거는 인물로 선택하세요

  저는 잘생겼고,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렇습니다만, 인물의 구성 요소를 아시오?

  주제, 구성, 문체 혹은 리듬, 감각, 심상

  어쩐지 생각이 나지 않지만

  당신 하나를 사랑하는 일꾼이 되겠습니다

  지역 경제와 서민을 사랑으로 챙기는

  당신은 벌써 거짓말을 하고 있소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것들만 이야기하잖아!

  그것이 바로 입체적 인물입니다

  거짓말은 늘 어디선가 일어날 것 같으니까요

  상대방은 소설을 쓰고 있습니다

  아침 신문을 보며 겨드랑이를 끌끌 차고

  우유를 마시며 설사처럼 부드러워집니다

  국민의 권리를 포기하지 마세요

  여자가 나오는 술집에 가서

  작가입네 교수입네 지지를 호소합니다

  상대 후보가 식목일 산행에서 벌인 일을 아십니까

  가정집에서, 옆집에서, 세계 곳곳에서

  더 이상의 폭로는 자제하겠습니다

  저는 상대방과 틀립니다, 아니 다릅니다

  도대체 뭐가 다르다는 거요

  물론 정책이죠, 성격이거나

  그것들을 합해 인물이라고 부른다면

  저는 잘생겼습니다

  존경하는 주민 여러분

  거짓말은 늘

  있을 법한 일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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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효인 시인: 2006년 《시인세계》로 등단. 시집으로 『소년 파르티잔 행동 지침』 『백 년 동안의 세계대전』 『여수』 『나는 나를 사랑해서 나를 혐오하고』 『거기에는 없다』가 있다.
산문집으로 『잘 왔어 우리 딸』『이게 다 야구 때문이다』『그림책 생활』 등이 있다.
천상병 시 문학상, 김수영문학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