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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시인들

■ 안희연 시인의 시 ■ 백색 공간 & 줄줄이 나무들이 쓰러집니다 & 파트너 & 각자의 코끼리 & 너의 명랑

by 시 박스 2024. 5.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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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란히 빗속을 걸어간다

 

" 왜 당신은 행복한 생각을 할 줄 모릅니까!"

                    [···]

내가 궁금한 것은 가시권 밖의 안부

 

 

백색 공간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다고 쓰면

  눈앞에서 바지에 묻은 흙을 털며 일어나는 사람이 있다

 

  한참을 

  서 있다 사라지는 그를 보며

  그리다 만 얼굴이 더 많은 표정을 지녔음을 알게 된다

 

  그는 불쑥불쑥 방문을 열고 들어온다

 

  지독한 폭설이었다고

  털썩 바닥에 쓰러져 온기를 청하다가도

  다시 진흙투성이로 돌아와

  유리창을 부수며 소리친다

  " 왜 당신은 행복한 생각을 할 줄 모릅니까!"

 

  절벽이라는 말 속엔 얼마나 많은 손톱자국이 있는지

  물에 잠긴 계단은 얼마나 더 어두워져야 한다는 뜻인지

  내가 궁금한 것은 가시권 밖의 안부

 

  그는 나를 대신해 극지로 떠나고

  나는 원탁에 둘러앉은 사람들의 그다음 장면을 상상한다

 

  단 한권의 책이 갖고 싶어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밤

  나는 눈 뜨먄 끊어질 것 같은 그네를 타고

 

  일초에 하나씩

  새로운 옆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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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줄이 나무들이 쓰러집니다
어제 죽은 내가 전하는 안
부 같아서 양팔을 벌리고 검은 해일을 안아요
다음 장면에
선 비가 오고 철골만 남은 건물들이 유령처럼 서 있습니다

 

 

줄줄이 나무들이 쓰러집니다

 

 

 

  키 크는 일에 관해서라면 나도 조금은 할 말이 있어요 허물

어지는 계단을 달려와 단숨에 뛰어내리는 일 공중에 떠오를

때마다 나는 킥킥 비행기가 된 것 같지만 폭죽처럼 온몸이

터지고 바닥엔 흩뿌려진 색종이들 나는 아름다운 착지를

꿈꿔요 옥상은 매일밤 높아져요

 

  누군가 나를 찢고 달아날 때마다 나는 매번 다른 사람이 

되지요 뺨이 붉은 소년이었다가 잇몸만 남은 노인이었다

······ 지금은 철길 위에 꼼짝없이 묶여 있네요 경쾌한 기

적을 울리며 기적 없이 다가오는 것들 바퀴가 끌고 갈 나는

어떤 모습일까요 토막 난 허리를 상상하면 거짓말처럼 배

가 고파요 얼굴을 뒤적이다 가는 고양이들

 

  줄줄이 나무들이 쓰러집니다 어제 죽은 내가 전하는 안

부 같아서 양팔을 벌리고 검은 해일을 안아요 다음 장면에

선 비가 오고 철골만 남은 건물들이 유령처럼 서 있습니다

이곳에선 내가 주인공이에요 모자를 썼다 벗었다 쓰며 스

러져가는 불빛을 흉내 내죠 목소리가 나오지 않지만 괜찮

아요 가위를 든 손이 불현듯 나타났다 사라져도

 

  꽃병에 꽂혀 있는 흰 뼈들 성냥으로 만든 집은 자주 흔들

립니다 방문을 열고 들어오면 방금 전 내다 버린 상자들이

도착해 있고 창문은 추락을 보여줄 때 가장 선명해지지요

창밖의 아이들은 온종일 머리통을 공처럼 굴리며 놀아요

소매가 더러워지도록 땅을 파면 몸통들이 웃고 있고

 

  나도 따라 환하게 웃어봅니다 누군가 또 나를 찢고 달아

나요 나는 다시 빛나는 눈을 가진 맹인이 되어 ······ 맹렬한

불 속에서 ······ 진짜 죽음이 와도 완성하지 못할 긴 편지를

쓰고 있어요 벽에서 태어난 새들의 날갯짓 소리가 들려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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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을 벗듯이 색색의 모래들이 흘러내리는 벽
그렇게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
나의 두 손으로 너의 얼굴을 가려보기도 하는

 

 

파트너

 

  너의 머리를 잠시 빌리기로 하자

  개에게는 개의 머리가 필요하고 물고기에게는 물고기의 

머리가 필요하듯이

 

  두개의 목소리가 동시에 터져나오더라도 놀라지 않기로 하자

  정면을 보는 것과 정면으로 보는 것

  거울은 파편으로 대항한다

 

  잠에서 깨어나면 어김없이 멀리 와 있어서

  나는 종종 나무토막을 곁에 두지만

 

  우리가 필체와 그림자를 공유한다면

  절반의 기억을 되찾을 수 있겠지

 

  몸을 벗듯이 색색의 모래들이 흘러내리는 벽

  그렇게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

  나의 두 손으로 너의 얼굴을 가려보기도 하는

 

  왼쪽으로 세번째 사람과 오른쪽으로 세번째 사람

  손목과 우산을 합쳐 하나의 이름을 완성한다

  나란히 빗속을 걸어간다

  최대한의 열매로 최소한의 벼랑을 떠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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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눈을 안대로 가리는 방식으로
오른쪽을 실감할 수 있게 되었다면

 

 

각자의 코끼리

 

 

 

  자루가 꿈틀거렸다

 

  B는 잔뜩 힘이 실린 뒷다리의 근육을, K는 뿔처럼 솟아

난 두개의 이빨을, Y는 바닥을 쿵쿵 울리며 다가오는 검은

그림자를 떠올리고 있었다

 

  테이블은 발을 숨기기에 좋은 장소였다 셋을 센 뒤에 각

자의 패를 꺼내놓기로 하지

 

  칼을 뒤집으면 꽃이 되었다 다시

  꽃을 뒤집으면

 

  없었다

 

  우유를 유우로 읽어도

  쏟아지는 것은 쏟아지는 것

 

  왼쪽 눈을 안대로 가리는 방식으로

  오른쪽을 실감할 수 있게 되었다면

 

  성냥은 누구를 위한 타협일 것인가

 

  불타오르는 자루를 바라보면서 그들은

  당분간과 결국의 차이에 대해 골몰하기 시작했다

  < >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멍울이 망울이 되는 기적
너의 눈은 동화 속 비밀의 숲처럼
오려두고 싶은 슬픔으로 반짝인다

 

 

너의 명랑

 

  너는 저녁 내내 철봉에 매달린다

  어둠이 내리면

  손을 두고 터벅터벅 돌아온다

  너의 손은 밤새도록 흔들린다

 

  너는 사자 한마리를 기른다

  이제 그만 내게서 도망치라고

  윽박질러도 엎드려 꼼짝 않는 사자

  너는 매일 그애 곁에서 잠든다

 

  아침은 네가 가장 사랑하는 시간

  커다란 여행가방 안에 짐을 꾸리며

  모닝 글로리 풀은 세상에서 가장 황홀한 호수

  사람이 빠지면 곧바로 녹아버린대

  호주머니에 고이 접어둔 사진을 두번 세번 들여다보며

  가지 않는다

 

  깨진 거울을 조각조각 들여다본다 오월

  치우지 않은 밥이 꾸덕꾸덕 말라간다 유월

  칠월에는 죽은 화분을 버리러 가는 산책

  매일 더 멀어지는 집

 

  간신히 그림자를 앞세우고 돌아오면

  어느새 팔월이 된다

 

  그래 죽자 차라리 죽어버리자

  식칼을 집어 들고서

  어머 이 자두 빛깔 참 곱다

  큭큭거리는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멍울이 망울이 되는 기적

  너의 눈은 동화 속 비밀의 숲처럼

  오려두고 싶은 슬픔으로 반짝인다

  < > 

 

 

안희연 시인: 2012년 《창비신인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밤이라고 부르는 것들 속에는』. 산문집으로 『흩어지는 마음에게, 안녕』 『단어의 집』 『당신이 좋아지면, 밤이 깊어지면』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