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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시인들

■ 류근 시인의 시 ■ 어떻게든 이별 & 고달픈 이데올로기 & 명왕성 이후 & 1991년, 통속적인, 너무나 통속적인 & 박사로 가는 길

by 시 박스 2024. 5.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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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과 나무들

 

 

이별이다 아아, 어떻게든 이 별!

 

어떻게든 이별

 

 

 

  어제 나는 많은 것들과 이별했다 작정하고 이별했

다 맘먹고 이별했고 이를 악물고 이별했다 내가 이

별하는 동안 빗방울은 구름의 자세와 이별했고 우산

은 나의 신발장과 이별했고 사소한 외상값은 현금지

급기와 이별했다 몇몇의 벌레들은 영영 목숨과 이별

하기도 하였다 어제는 어제와 이별하였고 오늘은 또

어제와 이별하였다 아무런 상처 없이 나는 오늘과

또 오늘의 약속들과 마주쳤으나 또 아무런 상처 없

이 그것들과 이별을 결심, 하였다

 

  아아, 그럴 수 있을까 우리 동네 가난한 극장은 천

장이 무너져 결국 문을 닫고 수리 중, 이다 로터리

에서 사라질 것 같다 그것은 어쩌면 극장에서 극장

이 이별당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옛날 애인은 결국

초경 후 폐경하였다 이별이다 아아, 어떻게든 이 별!

 

  나는 황소표 빨랫비누로 머리 감던 시절을 기억한

다 머리카락이 담벼락과 잘 결합하던 시절이었다 노

란 곰인형을 팔아서 우리 노란 전구를 살까 애인은

남영역으로 천천히 걸어간다 그때 인천행 전동차는

서울역과 이별하는 것이고 내 친구 김세연이는 망을

보는 것이고 삼표 국숫집 리어카는 나를 태우고 한

낮의 전봇대와 충돌하는 것이다 선생님, 더 이상 학

교 다니고 싶지 않아요, 부산항에서 민들레를 봤어

요. 노랗던데,

 

  그러니 나의 이별을 애인들에게 알리지 마라 너

빼놓곤 나조차 다 애인이다 부디, 이별하자

< >

 

 

 

오늘은 오래 걸었습니다 머리가 걷기를 원했으므
머리를 가지지 못한 다리는 하는 수 없이 온종일

 

고달픈 이데올로기

 

 

 

  오늘은 오래 걸었습니다 머리가 걷기를 원했으므

로 머리를 가지지 못한 다리는 따라 걸어야 했지요

처음부터 다리가 걷기를 원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

만 머리가 가자는 대로 가다가 더 이상은 걸을 수 없

다고 머리가 생각하게 만들었을 뿐입니다 다리는 그

래서 걷기를 멈추고 그 자리에 가만히 구부린 채 머

리의 다음 생각을 기다렸습니다

 

  다리는 머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꿈꾸는지 알 수

없습니다 제가 아플 때 제 아픔을 아파하고 제가 더

러워졌을 때 제 더러움을 더러워할 뿐이지요 머리가

아플 때 제 다리 아프지 않고 머리가 세상의 일로 더

럽혀졌을 때 제 다리 하나도 더럽지 않습니다 머리

가 없으므로 다리는 알지 못합니다 제가 아프면 머

리가 먼저 그 아픔 때문에 아프고 제가 더러워지면

머리가 더 먼저 제 더러움에 소스라친다는 것

 

  오늘은 오래 걸었습니다 머리가 걷기를 원했으므

로 머리를 가지지 못한 다리는 하는 수 없이 온종일

머리를 얹고 멀리멀리 걸어야 했습니다

 < >

 

 

죽은 별들의 추억처럼 따뜻해서

  이 별에선 얼마든지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명왕성 이후

 

 

 

  잊혀진다는 건

  좋은 일이다

  봄날 네 가슴에 처음 온 꽃잎으로 피었다가

  오는 비 가는 세월에 남김없이 스러져

  저물어간다는 건

 

  내가 먼저 이 별에 가자고 했다

  눈 덮인 지붕들 밑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이

  죽은 별들의 추억처럼 따뜻해서

  이 별에선 얼마든지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내가 먼저 왔고

  너 나중에 왔고

  내 기억이 기억나기 전에

  꽃들이 먼저 피었다

 

  우리 이 별에서

  너무 늦게 만났다

  아무런 뜻도 없이

  꽃이 피고 비가 오는 날들이 지나갔다

 

  너무 늦게 이 별에서

  너를 만났다

  < >

 

 

전업주부에 지나지 않으면서
내가 다닌 대학을
얕잡아보는 버릇이 있다
하지만 뭐 남들보다 몇 년
학교 다니고도 취직 못 하는 내 처지도

  결코 내세울 만한 건 못 되기 때문에

 

1991년, 통속적인, 너무나 통속적인

 

 

 

  어머니는 시집간 누이 집에 간신히 얹혀살고

  나는 자취하는 애인 집에 안간힘을 쓰며

  매달려 산다 그러므로 어머니와 나는 살아 있는 자세가

  근본적으로 다르다 세상의 그 무엇과도

  닮지 않으려고 억지로 몸을 비트는 나무들에게

  어째서 똑같은 이름이 붙여지는지 하루 종일

  봉투를 붙이면 얼마나 돈이 생기는지

  생활비를 받아오면서 나는 생활도 없이 살아 있는

  내 집요한 욕망들에 대해 잠깐 의심하고

  의심할 때마다 풍찬노숙의 개들은 시장 쪽으로

  달려간다 식욕 없는 나는 술집으로 슬슬 걸어간다

 

  나는 술에서 깨기 전에 잠부터 깨는

  나쁜 버릇을 가지고 있다

  내가 일어나는 시간은 오후 2시에서 3시 사이이므로

  내 안면방해의 주범은 언제나 햇살이거나 싸다고

  싸다고 외치는 야채트럭 확성기 소리이기 십상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것들을 미워하지 않는다

  정작 내가 미워하는 놈들은 따로 있는데

  그림 그리는 내 친구 후배가 지국장으로 있는 한겨레

  신문을 내가 보기도 전에 잽싸게 훔쳐가는

  308호나 408호에 사는 대학생 놈들

  밤도 새벽도 없이 술 취한 여자들을 끌고 들어와

  또 한바탕 술판이나 벌이는 그놈들과

  얼굴을 몇 번 마주쳤을 텐데도 내 기억에는

  술집에서 만나는 이웃들과 별로 다르지 않고

  그래서 쉽게 기억 안에서 놓쳐버리게 된다

  내 눈에는 모든 길이 술집으로만 이어져 있고

  맨 정신일 때에는 외출하고 싶지 않았다

 

  영어도 못하고 도대체 뭘 배웠냐? 내가 매달려

  사는 애인의 어머니는 내가 그 귀한 딸에게 매달려

  사는 줄은 꿈에도 모르고 가끔씩 전화해서 기를 죽이곤 하는데

  일본서 대학까지 마치고 온 이력에 비하면 형편없는

  전업주부에 지나지 않으면서 내가 다닌 대학을

  얕잡아보는 버릇이 있다 하지만 뭐 남들보다 몇 년

  더 학교 다니고도 취직 못 하는 내 처지도

  결코 내세울 만한 건 못 되기 때문에

  나는 전화벨 소리만 나면 죽은 시늉을 하게 된다

  취직을 하고 넥타이를 매고 환속한 승려처럼

  양주 아니면 안 마시는 지조를 갖추면 그때는

  좀 크게 숨 쉬며 살 수 있을까?

 

  내가 일없이 취해서 날마다 취해서

  숙취와 악취를 지병처럼 앓고 살 때

  어머니는 햇살을 피해서 잠만 자꾸 주무시고

  그 바로 옆 벽 하나를 지나서

  매형과 누이는 자주 늦잠을 잔다 그러나

  들여다볼 수 없는 꿈 밖의 세월은

  한 걸음만 나서도 우리들에게 벼랑이라는 것을

  조카들만 빼놓고는 다들 알고 있다 알면서도

  눈 뜨고 잃어버린 집이 생각날 때마다

  나는 또 누군가에게 빨리 들켜버려서

  편안한 마음으로 절망하고 싶어진다 평화롭게

  항복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어느 적군을 향해서

  나는 나의 순결한 백기를 흔들어야 하는가

  비틀거리며 돌아올 때마다 더 수직으로 빛나는

  세상이여 나는 왜 이렇게 너희와 다른가

  이렇게 닮지 않으려

  몸을 비틀어야만 하는 건가

  < >

 

 

교수가 될 어림도 미래도 없으면서

  학교라도 안 가면 술집 귀신이나 될 터인데 싶어

  또 비틀비틀 박사 들으러 간다

 

박사로 가는 길

 

 

 

  교수가 될 어림도 미래도 없으면서

  학교라도 안 가면 술집 귀신이나 될 터인데 싶어

  또 비틀비틀 박사 들으러 간다

  강의실에 앉으면 비로소 숙취가 좀 헹궈지는 것이

  타고난 박사 체질인가 싶어 싱겁다가도

  남몰래 창밖 구름과 잎사귀나 훔쳐보고 있는 퇴행을 보면

  아, 갈데없는 바깥 체질이구나 싶어 곧 안심이 된다

  나는 너무 많은 것들을 배우고 익히느라

  정거장이 지나가고 작년의 나무가 더 자라고

  담쟁이가 진짜로 담을 넘는 소식에 멈춰 있지 못하였다

  남편 있는 여자와 옛날 애인들의 소식이 간간이 그리웠을 뿐

  술집 너머의 연애 같은 것에 등록금을 납부할 수 없었다

  박사가 깊어질수록 뼛속의 시가 가벼워져서

  나는 자주 강물까지 날아가 내 하얀 발목을 베고 눕고

  누워서 어떤 전생을 배신해 버릴까 궁구하였다

  돌이켜보면 과거가 깨끗한 여자가 한 명도 없었던 것처럼

  몇 번의 나쁜 전생이 나를 여기까지 엎질러놓았을 뿐이라는 걸

  에필로그처럼 읽는 날은 즐거웠다 뻔한 것은

  얼마나 느리고 안락한가 남자가 원해서 거기 털을 밀어주었다는

  남쪽 후배가 내미는 술잔은 따뜻하고 나는 사막과

  머리 두 개 달린 염소와 주인 잃은 소녀가 통정하는 소설을

  박사로 가는 길에 깔아두면 좋을 거라고 조언한다

  그러나 박사는 멀고 내 구두엔 편지를 박지 않았으니

  너무 쉽게 닳아버리는 열망과 맹목 같은 것도 쉽게 전생이 되고

  가슴을 흔드는 구름과 잎사귀는 늘 바깥에 있고

  나는 이제 9만 9천 년째 마지막 학기

  술집 건너 다시 비틀거리는 내생 저쪽에

  박사로 가는 길이 뻔히 보인다

  < >

 

 

류근 시인: 1992년 『문화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하였으나 18년간 공식적인 작품 발표를 하지 않았다. 대학 재학 중에 쓴 노랫말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이 김광석에 의해 불렸다.
시집으로 『상처적 체질』 『어떻게든 이별』. 산문집으로 『사랑이 내게 말을 거네』 『함부로 사랑에 속아주는 버릇』 『진지하면 반칙이다』. 방송 활동으로 《역사저널 그날》 《김어준의 겸손은 힘들다 뉴스공장- The 살롱》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