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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시인들

■ 장이지 시인의 시 ■ 졸업 & 책갈피kryptonite & 나를 찾아서-기형도 & 기대

by 시 박스 2024. 5.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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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앞서고 너는 내 뒤를 따르고 나는 가르치고 너는 배우고
그런 평범한 날들이 있었지 너를 보지 않겠다고 한 건 보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야 너는 손끝에 매단 실을 놀리고 나는 인형
처럼 꽃처럼 흔들린 날이 있었지

 

졸업

 

 

 

  너는 그것을 몰라 너를 보지 않겠다고 한 건 보고 싶지 않

아서가 아니야 너에게 주려던 편지를 흐르는 강물에 버린

것을 네가 알까 너는 모르지 그것은 흐르고 흘러 지하세계

에 이르고 지하세계 구중궁궐의 아흔아홉겹 그늘 속으로 가

게 돼 머리가 둘, 팔이 넷인 괴이(怪異)가 그곳을 지켜서 힘

이 센 괴이가 그곳을 지켜서······ 끝까지 너는 네가 모른다

는 것을 모르지 내가 너를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나는 앞

서고 너는 내 뒤를 따르고 나는 가르치고 너는 배우고 그런

평범한 날들이 있었지 너를 보지 않겠다고 한 건 보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야 너는 손끝에 매단 실을 놀리고 나는 인형

처럼 꽃처럼 흔들린 날이 있었지 네가 떠나면 나는 무엇이

될까 너는 손가락으로 가리켰지 내가 그 이름을 알 수 없는

뉘앙스의 구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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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항상 광주로 되돌아가지만 광주를 졸업할 수는
없어요 노란 우산을 쓴 인파 그리고 피 흘리는 소녀,
······

 

 

책갈피kryptonite

 

 

 

  당신과 함께였을 때 저는 스무살이었고 어느 날 깨어보

니 서른살이 되어 있었어요 친구들이 편지를 읽어주러 왔어

요 우리가 주고받은 편지를 ······ 시간이 저를 비눗방울 불

듯 불어댔어요 손을 뻗어도 잡을 수 있는 것이 없었어요 손

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바람,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한

숨······ 우리는 항상 광주로 되돌아가지만 광주를 졸업할 수

는 없어요 노란 우산을 쓴 인파 그리고 피 흘리는 소녀, 피

흘리는 양곤, 블루 사이공, 꽃잎 꽃잎 사랑의 시간, 우리가

완전히 잃어버린 것이 있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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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으로 가자 환등기가 돌아간다
외투 속의 아이는 식물처럼 자라 어른이 되고 
어른은 다시 영원한 소년이 된다 등신대의 거울 속에서
소년은 잉크가 번져 읽을 수 없게 된 편지를 받는다 

 

 

나를 찾아서

기형도

 

 

 

  눈의 궁전이 있는 검은 페이지가 말소된다 적막이 짙어지

면 가로등은 빛의 결계를 만들고 저마다 자기만의 하얀 방

에 틀어박혀 고개를 떨군다 술꾼이 걸어온다 봉분처럼 외투

의 등이 불룩하다 그 속에서 칭얼대던 아이는 잠들었다 뜨

내기의 서러운 눈이 잠든 혹에 잠시 가닿는다 고단한 발을

동동거리며 그는 열심히 구름을 만든다 편의점의 빛을 등지

고 마지막 담배를 태우고 죽지 않는 도시의 허름한 방으로

그는 돌아가리라 지면에 붙어 날아가는 검은 허수아비······

저만치, 매캐하게 멀어진다 눈의 여왕의 썰매가 엇갈리듯

지나간다 탈색된 시(詩)의 파편이 바람을 타고 하얗게 솟아

오른다 자, 집으로 가자 깊은 골목에는 깊은 눈이 쌓인다 숙

직을 서던 고양이가 눈을 헤집고 죽은 쥐 한마리를 찾아낸

다 죽은 쥐의 속에서 편지를 꺼내 밤의 회랑을 따라간다 북

국의 흰 빛 속으로 술꾼은 눈 맞은 그림자를 고쳐 입고 비틀

거리며 간다 자신의 구불구불한 내부로, 집으로 가자 환등

기가 돌아간다 외투 속의 아이는 식물처럼 자라 어른이 되

고 어른은 다시 영원한 소년이 된다 등신대의 거울 속에서

소년은 잉크가 번져 읽을 수 없게 된 편지를 받는다 나는···

(독순술로 읽는 말소된 페이지) ···너다 "나는 불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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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플란드의 집배원이 커다란 가방에서 당신 편지를 찾아 초록색 지붕의 집 귀
에 넣어둘 것이네 오, 나는 그것을 소리 내어 읽어야지 소리
높여 읽어야지 그러면 이미, 내 귀 안에 있는 당신의 혀,

 

 

기대

 

 

 

  당신의 편지가 오네 오고 있네 내가 그것을 소리 내어 읽

으면 당신의 혀가 내 귓불에 닿고 당신의 부드러운 혀가 내

귀 안에 이미 있네 당신의 편지는 오고 있네 오네 동구 밖까

지 왔을까 잡화점 앞을 무사히 지났을까 라플란드의 집배원

이 커다란 가방에서 당신 편지를 찾아 초록색 지붕의 집 귀

에 넣어둘 것이네 오, 나는 그것을 소리 내어 읽어야지 소리

높여 읽어야지 그러면 이미, 내 귀 안에 있는 당신의 혀, 당

신 혀의 무수한 미뢰들, 하나하나 벙그는 말의 꽃봉오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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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이지 시인: 2000년 《현대문학》으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 『안국동울음상점』 『연꽃의 입술』 『라플란드 우체국』 『레몬옐로』 『해저의 교실에서 소년은 흰 달을 본다』 『편지의 시대』 등.
문학평론집, 『환대의 공간』 『콘텐츠의 사회학』 『세계의 끝, 문학』. 영화평론집, 『극장전: 시뮬라크르의 즐거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