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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죽을 때까지 내려다볼게
떠나면서 너는 그렇게 말했지만
엘리노어, 정말로 보고 있어?
아이들 타임*
보고 싶어, 엘리노어
이렇게 조용한 지구를 상상해 본 적 있어?
인쇄된 글자처럼 쓸쓸해
내가 죽었다는 사실이
내게 너무 늦게 전해지는 건지도 몰라
손바닥만 따뜻해지는 불 앞에 모여 앉아서
가늠되지 않는 오후 속에서
후, 후 숨 쉬는 연습을 하고 있어
재를 터는 것처럼
뜨거운 것을 부는 것처럼
열기가 불행을 미뤄주는 것처럼
우리가 잠깐 잡았던 손처럼
끝난 것의 끝을 기다리면서
오래 헤어지는 연애를 하는 것 같다
불행하지 않아
자 따라해봐
불행하지 않다
지구가 버퍼링에 걸린 것 같지
빌린 책은 마지막 두 장이 잘려 있었어
나는 영원히 결말을 알 수 없는 사람이 됐다
이봐, 로드리게즈
앞주머니에 뭐가 들었나?
잠겼어
하지 못했던 말이 생각나서
밤새 이불을 찼다
망가진 건 천천히 정확해져서
별이 많다
너무 밝은 건 인공위성이라고
만화책에서 봤어
네가 죽을 때까지 내려다볼게
떠나면서 너는 그렇게 말했지만
엘리노어, 정말로 보고 있어?
아무도 태우지 않은 전철이 이 시간이면 지나가
같은 자리를
성냥은 그으면 꺼지고
그으면 꺼져서
뭐가 변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어
왜 처음 겪는 불행도 익숙한 걸까?
사람 키우는 게임을 했지
집을 짓고 직장을 구하다가 정말로 사는 모습 같아지면
일시 정지하고 섹스를 했다
이렇게는 살지 말자고
무서운 표정
벌써 다 자라서 부서진 사람의 얼굴
그래서 우린 눈을 감았나 봐
이런 표정은 유전자에 이미 있었던 걸까?
때가 되면 밖으로 나오는 걸까?
네가 뭘 더 알고 있는지 궁금했다
게임으로는 언제든 돌아갈 수 있었지
얌전히 서 있던 사람들에게 다시 일을 주고
집을 짓게 했지
너를 상상해, 엘리노어
하얀 옷자락을 펄럭이면서
둥둥 떠다니겠지
가끔 거기 있는 것 같아
네 눈으로 나를 보는 것 같아
그럴 때면 나는 너무 작은 점이고
그러면 덜 가엾고
따뜻해
정적 속에서는 모든 게 직선으로 이어지겠지
순환선처럼
엘리노어,
너는 미래의 시간에 살고
나는 과거의 빛을 보지
여기 있어
여기 있어
어떤 말들은 이제 알 것 같다
오늘도 전철이 지나가
같은 시간에
너의 아이는 어떤 표정을 짓는 어른이 될까
엘리노어, 아직 보고 있어?
* 2888년 지구에서 발견된 일기장으로 2500년대에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 글씨가 매우 비뚤고 군데군데 얼룩이 져 있어 일부는 추측으로 메웠다. 기록자는 지구의 거의 마지막 생존자로 보이며, 때문에 기록은 상상으로밖에 채울 수 없었던 지구의 마지막을 복원하는 일에 매우 귀중한 사료가 되었다. 기록자도 도시 빈민이었기에 적절한 때 우주로 떠나지 못했을 것이라고 연구가들은 덧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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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곳에서 벌어지는 일들
어쩌면 생각에 다리가 달린 것 같아
지금 소릴 내는 이게 내 생각인가요?
인사이드 아웃
벌레가 귀로 들어갔을 때 손전등을 대고
가만히 기다리면 된다
복도는 깨끗하고 밝다
누군가 꼼꼼하네, 말한 것을 듣고
꼼꼼하네, 생각하게 됐다
기쁨이 뭔지 아는 사람을
얌전히 저녁 식사를 기다린다
쌀은 물을 삼키며 물렁해진다
영혼을 끌어안은 살처럼
무른 과일은 계속 골라내줘야 해요
붙어 있는 것까지 상해버려서
공기에 닿으면 썩기 시작한대서
많은 말을 삼켰다
머리에 기대거나 팔뚝을 맞대고 돌아가던 버스
꽁무니를 쫓아 잠기던 노을
가장 예쁠 때 죽고 싶었는데
출구가 많은 건물에서는 곧잘 헤맸다 한참을 걷다 잘
못 왔다는 것을 깨달아 돌아가야 했다 결정이
지나가고 있었다
머리는 이미 다 썩어버렸는지도 모르지만
소금물에 브로콜리를 거꾸로 담가두면 깨끗하게 씻을
수 있어요 이십 분 기다리면 봉오리가 열리면서 좁쌀만
한 흰 벌레들이 떠오릅니다 그렇게 많이 먹는 줄 미처 몰
랐을걸요 정말 깜짝 놀랄걸요
때때로 자면서도 벌레를 삼키는걸요
악취 없이
직원은 멍든 과일만 담은 카트를 밀고 사라졌다
관계자 외 출입 금지 구역
삼키고 싶은 것이 많아질 땐
식탁 아래 웅크리면 된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벌어지는 일들 어쩌면 생각에 다
리가 달린 것 같아 지금 소릴 내는 이게 내 생각인가요?
그게 움직이는 소리를 듣고 있나요? 그래도 나 생각하고
있는 거군요 아무 생각 없는 것보단 나은 거겠죠 물구나
무를 서면 봉오리가 열릴까? 새하얀 벌레들이 쏟아져 나
올까? 생각이 계속
기어가고 있는데
그 초록색 대가리를 후려쳐줄까?
사방에서 꽃이 핀다 짓무르는 딸기 터져봐야 방구벌레
웃고 있는 양말을 뒤집으면 도깨비였다
지금
무슨 생각해?
전화벨이 울린다
어디로 기어 나가도
거실이었다
개미굴에 끓인 알루미늄을 부어 넣으면 개미굴을 본뜰
수 있대
환한
모델 하우스
하늘 이 붉다
너 지금
정말 예쁘다
뒤집어 빤 것이 마르면
뒤집어 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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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문의 공간에 석고를 부어 넣은 뒤 주변의 흙을 긁어
내자 폼페이 최후의 날 죽어간 사람들의 모습이 드러났
습니다. 한 쌍의 연인은 손을 맞잡고 재앙으로부터 달아
나려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오래된 사랑과 미래
지구의 나이는 46억 살로 추정됩니다. 지구의 나이를
24시간으로 환산하면 인류는 11시 59분에 출현했습니다.
약 3초 전의 일입니다.
처음의 3초가 평생의 인상을 결정합니다.
마리나 아브라모비치는 맞은편에 앉는 낯선 관람객과
서로의 눈을 응시하는 퍼포먼스를 벌였습니다. 의자에
앉는 관람객은 짧게는 1분, 길게는 7시간 내내 그와 시선
을 교환했습니다.
사람이 태어나 사랑하고 죽습니다.
먹어치우기 직전의 케이크를 정성껏 장식하는 것처럼
의문의 공간에 석고를 부어 넣은 뒤 주변의 흙을 긁어
내자 폼페이 최후의 날 죽어간 사람들의 모습이 드러났
습니다. 한 쌍의 연인은 손을 맞잡고 재앙으로부터 달아
나려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사랑하고 헤어집니다.
화단에서 꽃이 핍니다.
내일은 뭘 할까?
11시 59분에 내가 묻습니다.
함께 있자.
12시가 되면 내가 대답합니다.
우리는 내일도 함께 있습니다.
너의 눈은 가끔 너무 늙은 것 같습니다.
전부 이상하다, 이상해 중얼거리면서
저녁을 만듭니다.
우리가 사랑을 합니다.
몇 사람이 죽고 몇 사람을 행복해지는
영화를 봅니다.
떠나기 직전의 방을 둘러봅니다. 다음 사람이 궁금하
지 않습니다.
인류는 3초 동안 채집하고 수렵하고 불을 발견하고 농
경을 시작하고 정착하고 시장을 형성하고 도시를 만들었
습니다. 우리는 3초 동안 눈을 맞추고 상대에 대한 인상
을 결정합니다. 새해 직전의 10초를 함께 셉니다.
문이 열려 있습니다.
멀리서 보면 문자 같다는
미스처리 서클이 나오는 영상을 함께 봅니다.
멀리서 보면 다 점이잖아.
책장을 넘기는 네 몸의 점을 셉니다.
성인의 몸에는 평균 99개의 점이 있습니다.
우주의 별자리를 전부 합성하면 사람의 모양입니다.
마지막 3초 동안 지구에서는 그동안 벌어진 어떤 일보
다도 많은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우리는 매일 눈을 마주
칩니다.
외계인이 있으면 좋겠다.
선반의 먼지를 떨어냅니다.
모래성을 만들고 떠납니다.
오늘의 몇 번째인지 궁금하지 않습니다.
내일 같은 자리에서 시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가끔 이 모든 것을 너무 오래 한 것 같은
서로를 끌어안고 잠듭니다.
내일 다시 만나, 인사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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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시현 시인: 2018년 실천문학 신인상에 단편 소설 「동양식 정원」이, 2019년 현대시 신인상에 「섬」이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