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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시인들

■ 안미린 시인의 시 ■ 유령 기계 1 & 비미래 & 유령계 1 & ❄ & 양털 유령, 양떼지기, 아기 양, 아기 양 지킴

by 시 박스 2024. 5.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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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이미지

 

백골색 머리띠를 부러뜨리고 이마에 입을 맞추는 너의
어떤 면.

 

유령 기계 1

 

 

 

  하얀 연골의 크리처가 오고 있다.

 

  빛과 불을 밝힐까.

 

  악천후에는 유령물을 찾곤 했지. 따뜻한 미래물을 찾

곤 했지.

 

  빛 속에서 눈을 감으면 가까운 뼈를 가졌다고 생각했어.

 

  얼린 티스푼을 두 눈에 올리면 그 차갑고 환한 기분이

유령의 시야였지.

 

  유령의 등뼈는 더 부서지려는 이상한 반짝임.

 

  크리처가 오고 있어. 들것에 실려 오는 시간.

 

  백골색 머리띠를 부러뜨리고 이마에 입을 맞추는 너의

어떤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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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빈 맛이어도 빛의 일부였다는, 어제의 불편함이 외
로웠다는 세대로부터

 

비미래

 

 

 

  멜론 껍질의 그물 무늬는 속력과 전속력이 교차하는

흔적이었다

 

  그리드를 살짝 벌리는 것만으로 들어오는 빛이 있었다

 

  이 겨울에 열리기도 그 여름에 닫히기도 했던 이른 과

일들

 

  후숙을 기다리는 동안 아이들은 미래감을 느꼈다

 

  텅 빈 맛이어도 빛의 일부였다는, 어제의 불편함이 외

로웠다는 세대로부터

 

  빛이 잘 드는 쪽으로 웃자라는 아이들의 발목

 

  키 높이가 표시된 문틀은 문을 닫으면서 부정할 수가

없다

 

  넝쿨이 벽을 통해 본 것만으로는 이 빛을 가둘 수가 없다

 

  열린 문이 서는 어둠조차 양 문의 양쪽이 가득했다

 

  텅 빈 온실마저 그 문을 열었을 때 하얀 끈이 풀리는

흰 운동화

 

  두 발목에 흰 꽃을 걸어 잠그는, 유령의 동선을 가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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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한 일을 더 원하면 어린 유령에게서 잠든 아기 냄
새가 나겠지.

 

 

유령계 1

 

 

 

  물기 없는 욕실에서 베이비파우더를 쏟았다.

 

  하얀 치약으로 콧수염을 만들다가. 어두운 거울에 입

김을 남겨보다가.

 

  파우더 입자가 뿌옇게 퍼지며 가라앉았다. 그런데······

 

  꿈속 어디에도 가루가 묻지 않는다.

 

  이 꿈은, 이 벽은 투명했다. 투명한 사람이 꾸는 꿈 같

았다.

 

  투명한 일을 더 원하면 어린 유령에게서 잠든 아기 냄

새가 나겠지.

 

  희고 깨끗한 속옷이 된 영혼과, 멍든 발등을 스치는 헛

디딤.

 

  따뜻한 물을 틀자 따뜻한 빛이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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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빈 곳일수록 문이 짙을까. 꿈속에서 문이 닫히면 시
차가 깊을까.

 

 

 

 

  사라진 문이 열려 있었다.

 

  꿈속이었고 외국이었다.

 

  환한 입구의 고스트 하우스.*

 

  섣불리 풀을 심지 않았다. 물을 끌어오지 않았다.

  물을 주는 일보다 문을 닫는 일이 먼저일 테니.

 

  텅 빈 곳일수록 문이 짙을까. 꿈속에서 문이 닫히면 시

차가 깊을까.

  이 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싶어 하다가도

 

  눈이 부셨다.

  잠든 자를 잠시 닫아두는 일상의 빛. 일상이 된 비일상

의 빛.

 

  꿈속에서 인사를 나누었지만, 꿈 밖에서도 인사를 나

누었던 것.

 

  타인의 미래를 기다리면 다시 겨울이었다.

 

  고개를 숙이고 눈길을 걷는 꿈속 습관으로

  꿈속까지 따라오는 장소를 부드럽게 뒤집을 수 있었다.

 

  꿈속에서 눈을 감으면, 동면에서 이르게 깬 것 같았다.

 

  * 필립 존슨, 「고스트 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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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밤 눈이 내렸어
양은 사라지기보다 멀어진 것 같았지
양이 멀어질수록 멀어지는 것에 다가갈수록 눈안개가
자욱하고

 

양털 유령, 양떼지기, 아기 양, 아기 양 지킴

 

 

 

  구세계였어

  비한국적인 인상이었지만 다만 먼 곳이었지

  순백의 양떼 속에서 유백색 양이 태어났어

  이듬해 황백색 양과 흑회색 양이 태어났어

  백 년 후 어둡고 따뜻한 색감의 양떼 속에서 희고 눈부

신 양이 태어났어

  오랜 밤 눈이 내렸어

  양은 사라지기보다 멀어진 것 같았지

  양이 멀어질수록 멀어지는 것에 다가갈수록 눈안개가

자욱하고

  사라진 유령마저 잃어버리는 안개의 잠재력

 

  한 세대의 기일이 지나고 있었어

 

  어둠이 지울 수 없어 흰 눈이 지우는 현세계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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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미린 시인: 2012년 《세계의 문학》 신인상으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 『빛이 아닌 결론을 찢는』 『눈부신 디테일의 유령론』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