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의 밥
평등하라 평등하라 평등하라
하느님이 펼쳐주신 이 땅 위에
하녀와 주인님이 살고 있네
하녀와 주인님이 사는 이 땅 위에서는
밥은 나눔이 아니네
밥은 평화가 아니네
밥은 자유가 아니네
밥은 정의가 아니네 아니네 아니네
평등하라 펼쳐주신 이 땅 위에,
하녀와 주인님이 사는 이 땅 위에서는
하나 되라 하나 되라 하나 되라
하느님이 피 흘리신 이 땅 위에
강도질 나라와 빼앗긴 나라의 백성이 살고 있네
강도질 나라와 빼앗긴 나라 백성이 사는 이 땅 위에서는
밥은 해방이 아니네
밥은 역사가 아니네
밥은 민족이 아니네
밥은 통일이 아니네 아니네 아니네
하나 되라 펼쳐주신 이 땅 위에,
강도질 나라와 빼앗긴 백성이 사는 이 땅 위에서는
아아 밥은 가난한 백성의 쇠사슬
밥은 민중을 후려치는 채찍
밥은 죄없는 목숨을 묶는 오랏줄
밥은 영혼을 죽이는 총칼
그러나 그러나 여기 그 나라가 온다면
밥은 평등이리라
밥은 평화
밥은 해방이리라
하느님 나라가 이 땅에 온다면
밥은 함께 나누는 사랑
밥은 함께 누리는 기쁨
밥은 하나 되는 성찬
밥으 밥은 밥은
함께 떠받치는 하늘이리라
이제 그 날이 오리라, 여기
그 나라가 오리라, 기다림
목마르네 목마르네 목마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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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의 아이에게
어느 태양의 나라에서
아시아의 배고픔을 우는 아이야
슬픈 이야기가 여기 있구나
네가 태어나기 전부터 아시아엔
네 탯줄이 결정짓고
네 길을 결정짓는 힘이 따로 있었구나
네가 네 발로 걷기도 전에 아시아엔
네가 두 손으로 절하며 받아야 할
밥과 미끼가 기다리고 있구나
고개를 똑바로 들려무나 아이야
아시아의 운동장을 뛰어가려무나
네가 두 손으로 절하며 밥을 받을 때
그것은 아시아가 절하는 거란다
네가 무릎 꿇며 미끼를 받을 때
그것은 아시아가 무릎 꿇는 거란다
네가 숨주겨 고개 숙일 때
그것은 아시아의 하느님이 고개 숙이는 거란다
크게 소리치려무나 아이야
너는 우리의 살아있는 희망
크게 소리치려무나 아이야
너는 아시아의 평등의 씨알
너는 이제 자본의 하느님을 버려야 한다
아아 너는 이제 평등의 밥으로
평등의 밥으로 울어야 한다
아시아를 깨우는 힘찬 징소리로 징소리로
징~ 징~ 징~ 울려 퍼져야 한다
< >
브로드웨이를 지나며
문짝마다 번쩍거리는 저 미제 알파벳은
아시아를 좀먹는 하나의 음모이다
거리마다 흘러가는 저 자본의 물결은
아시아를 목조르는 합법적 강간이다
지프니 양철지붕 밑에
알록달록 새겨놓은 저 암호문이나
모든 슈퍼마켓과 대형백화점에 면밀하게 진열된 양키즘은
세계 인민의 기둥서방을 자처하는
매판자본의 매춘문화이다
저것은 아시아의 추억이 아니다
저것은 아시아의 우정이 아니다
저것은 아시아의 역사가 아니다
동아시아의 하늘에 높다랗게 매달린
코코넛이 단물을 만들 동안
그리고 우후죽순처럼 치솟은 바나나가
바람난 치맛자락을 펄럭일 동안
우기의 홍수보다 무섭게
한 나라의 넋을 점령해버린 칼,
메이드 인 유에스에이
메이드 인 저팬
메이드 인 차이나 그리고 이제는
메이드 인 코리아?
경보장치가 없는 아시아에서
시장마다 번쩍거리는 저 외제 상표는
아시아 사람들의 희망이 아니다
거리마다 흘러가는 저 팝송가락은
아시아 사람들의 신명이 아니다
칼자루를 쥔 제국의 음모가
종말처럼 가까이 다가오고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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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의 밥상문화
내가 거처하는 호스 슈 빌리지 아파트에는
종교학을 가르치는 인도인과
비파를 연주하는 중국인 그리고
시를 쓰는 한국인이 함께 살고 있는데요
세 나라가 함께 모여 이야기를 나눌 때는
아시아가 하나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서로 고픈 배를 해결하는 방식에는
동상이몽을 확인하게 됩니다
대저 밥이란 무엇일까요
인도 사람을 인도식으로 밥을 듭니다
더러는 그것을 손가락밥이라고 말합니다
중국 사람은 중국식으로 밥을 듭니다
더러는 그것을 젓가락밥이라 말합니다
일본 사람은 일본식으로 밥을 듭니다
더러는 그것을 마시는 법이라 말합니다
미국 사람을 미국식으로 밥을 듭니다
더러는 그것을 칼자루밥이라 말합니다
한국 사람은 한국식으로 밥을 듭니다
더러는 그것을 상다리밥이라 말합니다
손가락밥이든 젓가락밥이든
마시는 밥이든 칼자루밥이든
그게 뭐 그리 대수로운 일이랴 싶으면서도
이를 가만히 바라보노라면
밥 먹는 모습이 바로 그 나라 자본의 얼굴이라는 생
각이 듭니다
손가락밥 위에 젓가락밥 있습니다
젓가락밥 위에 마시는 밥 있습니다
마시는 밥 위에 칼자루밥이 있습니다
밥이 함께 나누는 힘이 되지 못할 때
들어삼키는 힘으로 둔갑하고 맙니다
이것이 밥상의 비밀입니다
우리들이 겁내는 포도청이
젓가락힘이냐 마시는 힘이냐 칼자루힘이냐···
이 삼자 대질의 묘미를 즐기다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밥은 다만 나누는 힘이다, 상다
리밥은 마주앉는 법이다, 지렛대를 지르고 나서
문득 우리나라 보리밥을 생각했습니다
겸상 합상 평상 위에 차린 보리밥
보리밥 고봉 속에 섞여 있는 단순한 땀방울과
보리밥 고봉 속에 스며 있는 간절한 희망사항과
보리밥 고봉 속에 무럭무럭 솟아오르는 민초들의 뜨
겁디뜨거운 정,
여기에 아시아의 혼을 섞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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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녀 유니폼을 입은 자매에게
가차없이 하느님이 팔려가고
성모 마리아가 팔려오는 어느 태양의 나라에는
팔려가는 하느님을 주님이라 부르는 그대
팔려오는 마리아를 어머니라 부르는 그대가 있네
하녀 유니폼을 입은 그대가 있네
들꽃처럼 티없이 맑고 순한 그대
달의 그대가 있네
그대는 누구인가
하녀라 부르는 그대는 누구인가
태양이 된 사람들이 하늘을 차지하는 나라
자기 씨앗 뿌릴 땅 한평 없는 소작인의 나라에서
하느님이 팔려간 길을 따라
백치처럼 팔려가며 성호를 긋는 그대는 누구인가
성모 마리아가 팔려온 길을 따라
골고다로 향하는 그대는 누구인가
달처럼 온순한 그대
순한 양의 그대가
바보보다 성실하게 친절하게
가난의 역사 억압의 역사
너무 슬퍼서 슬픈지조차 모르는 역사를 가냘픈 등짝
에 지고
주님, 주님, 부르며 걸어갈 때
까닭 모를 눈물이 내 두 눈을 적시네
하녀의 친절과 단순한 노동의 아름다움이
빼앗긴 사람들의 서러움을 감싸네
지금 살아남은 자들의 골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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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령의 시대, 그리고 사랑
악령의 자본이 시대를 제패한 후
그대는 이제 꿈꾸는 것만으로는
안식의 밥을 갖지 못하네
기다림이라거나 신념 따위로는
그대는 이제 편히 잠들 수 없네
그대가 영혼의 방에 불을 끈 그대가
악령의 화려한 옷자락에 도취된 후
품위 있고 지적이며 인자하고 또 매우
귀족적인 악령의 도술에 반해버린 후
궁핍한 시대의 인본주의는 죽었네
인본주의와 함께 신도 죽었네
사랑도 그대도 죽었네
연미복을 입은 악령의 날개 밑에서
그대는 지금 황홀한 사랑의 독주를 마시네
애오라지 그대가 그리워하는 모습으로
노심초사 그대가 사랑하는 모습으로
악령이 망또 자락을 휘날리는 밤,
그대가 악령과 살을 섞고 입맞추는 밤에는
창세기의 하늘에서 비가 내리네
먼저 간 영혼들의 수의자락이
지난날 우리들 고행의 등불마저
상수리나무 숲에서 마악 젖고 있네
젖고 있는 목숨의 행복한 죄악 위로
실로 달콤한 악령의 순풍이 불어와
우리들 슬픔의 촉각을 마취시키는 동안
악령태평천국 박제수술대에 누운 어린 영혼이
새 시대 주기도문을 받아 외우네
세계는 이제 악령의 통일로 가고 있네
지적이며 우아하며 또 귀족적인 환상으로 사랑으로.
고정희 시인: 1948년 해남 출생. 1975년 《현대시학》을 통해 문단에 나옴. 시집 『누가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가』 『실락원 기행』 『초혼제』 『이 시대의 아벨』 『눈물꽃』 『지리산의 봄』 『저 무덤 위에 푸른 잔디』 『광주의 눈물비』 『여성해방 출사표』 『아름다운 사람 하나』 그리고 유고시집,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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