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더 큰 집이 필요하다 그 안에 온 우주를 가둘 수 있는,
초자연적 3D 프린팅
좀더 큰 집이 필요하다 그 안에 온 우주를 가둘 수 있는,
그러나 우주도 결국 하나의 집이다
집 우(宇) 집 주(宙) 넓을 홍(洪) 거칠 황(荒) ······ 평수
가 좀더 될 뿐
우리가 또 여기서 어디로 갈 수 있겠어? 가도 가도 여기
이곳뿐인데
그래도 지금보다도 훨씬 큰 집이 필요하다
그건 크기만의 문제는 아니어서 한순간의 진동일 수도 있
거 물에서 빠져나와 들이쉬는 단 한 번의 숨일 수도 있지만
여하튼 그 안에 모든 발광과 기쁨과 통곡과 신경쇠약을
가둘 수 있는
눈물과 눈물 없인 못 들어줄 그 모든 노래를 넘나들 수 있
고 여기서 저-기로
저-기서 여기로 마음껏 건너뛰며 놀 수 있는, 장대높이뛰
기 선수가 필요하다
장대높이뛰기 선수의 흉곽 안에서 마음껏 뛰놀 수 있는
풍선처럼 터지지 않는 심장이 필요하고
그 안에 모든 핏물과 파도치는 피바다를 견뎌낼 수 있을
장대하고 긴 핏줄과
충만한 힘이 마음놓고 뻗어나갈 수 있을 드넓은 아량과
이해와 그 모든 넘쳐나는 것들의 온갖 표면장력을 잡아 가
둘 수 있을 단
한 채의 집이
손에 잡히는 걸 모두 집어던지는 대신
눈에 보이는 걸 모두 자판으로 두들겨 화면 속에 때려박
아버렸는데
세상에, 글자들이 담긴 여백이, 그 글자들보다 더
그럴듯해 보이는 거 있지!
아무래도 좀더 큰 집이 필요하다
내 모든 무지와 나태와 방종을 가둘 수 있는, 그것들 모두
를 가둬 굶겨 죽일 수 있는
아무래도 하나의 극단적인 선택이 필요하다
* * *
초자연적인 밤---
나는 늘 뭘 잘 모르고
뭘 잘 모르는 내가 그것에 대해 품은 생각은 늘
실제의 그것을 초과한다
초자연의 밤---초자연적 밤바다
누구도 온전히 수용할 순 없어
인간 주제에
그래봤자 겨우 쾌와 불쾌 사이을 요리조리 왔다갔다할 뿐
인 주제에!
자, 여기 칼이 많이 잠들어 있다 어느 칼을 깨워 베어줄
까?
잠든 칼을 깨우기만 해도 춤이다 깨어난 칼이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도 춤이 두 눈 번득인다 물에 칼자국 난다!
칼로 물 베기의 예술을, 이번엔 누구에게 보여줄까
칼처럼 고요히 누워 있는 물을 누구에게 먹여줄까? 누구
목에 부어줄까?
칼춤 추는 무당아, 하늘에서 보면 너는 붕붕거리는 한 마
리 무당벌레로밖엔 안 보이는구나
아무리 날아봐야 출발지와 도착지가 거기서 거기인 작은
버러지 한 마리로밖에는 생각되지 않는구나
뭐 눈엔 뭐밖에 안 보인다곤 하지만
그러나 네 손가락 위를 기어가던 무당벌레는
손가락이 끝나면 그 끝에서 양
날개를 펼치곤
붕
날아가버리고
뒤에 남겨진 손가락은 날아가는 무당벌레를 한동안 멍
하니 바라만 보다 다시 제정신으로 돌아와
뒤늦게 자판이나 두들긴다
춤으로 바다를 다 건너낼 수 있다고 해놓고선
바닷속으로 풍덩
물속에 들어가는 칼처럼
깨끗하게 입수하는 춤들
오늘은 유난히 밤이 길다
바다 끝까지 가라앉는 데 걸리는 시간과 노력처럼
축 늘어진 팔다리처럼
나는 그 팔다리를 다 주물러주고 싶었으나
누구는 그 팔다리를 몽땅 다 잘라주고 싶었을 것이다
더이상 흔들리며 걸어다니지 않아도 되도록
물처럼 바람에 출렁이지 않도록
다 잘린 너를 식물처럼 땅에 심어주고 싶었을 것이다
흐드러지게 붉은 꽃 필 것인가
바다 위에 점점이 흩어진 산다화 같은 것인가
인간 주제에
그래봤자 겨우 눈에서 딱정벌레가 왔다갔다할 뿐인 주제에!
무당들이 시퍼런 칼을 먹고 밤새도록 긴 물 뿜어내는 밤
지평선에 가까워져 바닥에 펼쳐지는 몸뚱어리처럼
오늘은 길어지는 밤이 끝도 없고
너는 정말이지 환하게 미쳐 있다
아주 멀리서도 다 보일 만큼
* * *
가까스로 화장실로 몸을 던져 지퍼를 여는 데 간신히 성
공한 나는
놀란다! 아직도 내 몸안에 이렇게나 많은 따뜻한 것들 숨
어 있었다니
술이 확 깬다, 알 수 없는 힘 솟구친다!
그러고는 미소 지은 채 그 자리에서 그대로 고꾸라지고
하늘이 땅에 물을 주면 땅은 그걸 또 좋다고 다 받아 마
신다
술 처먹고 노상방뇨 하는 아저씨들의 물조차도 땅은 다
받아 마셔
만취 상태에 드니 대지가 울렁울렁
대지고 토하고 싶은 거겠지 대기도 흔들린다
때로는 대기도 확 다 토해내고 싶은 거겠지
술에 꼴아 더이상 차도와 안도를 구분하지 못하는 분이
시여
차도를 인도처럼 걸어다니며 온갖 차들로 하여금 너님을
비켜가게 하는 분이시여!
다 토해내고 난 후의 밤이 좋다
"세상은 다리니 그 위에 집을 짓지 말지어다" 따위의 문
장들을 강물 위에 다리처럼 놓고는 그곳을 홀연히 뜨자마자
하나둘 강물 속으로
뛰어들기 시작하는 단어들이 한없이 사랑스럽기만 한 밤
우울함이 다리 위에서 다리 아래를 바라보는 나를 보고는
못 본 체 그냥 지나가준다
모든 것은 지나가
이번만은 나도 널 그냥 지나가주지
수십 번 돌려봐도 내 것이 되지 않던 필름처럼 삶이 내 것
이 되지 않을 때
그날 봤던 강변의 대관람차를 떠올리며 생각한다, 아무렴
삶이 내 것은 아니지
돌고 도는 삶 위에 올라타 돌고 돌고 돌다 미처 내릴 생
각을 못하고
그 아래 펼쳐지는 야경에 탄성이나 내뱉다, 말한다
그러니까 그건, 네 것도 아니다
갈 데까지 갔다, 라는 말이 있던데 갈 데는 무궁하고
겨우 제자리를 돌고 돈 주제에 갈 데까지 갔다, 라고 생각
하는 바보 멍청이들이여
삶을 좀 우습게 봐줄 줄 알아야 삶도 널 우습게 보지 않
지 않겠어?
별짓 다 해봐야 한갓 인간에서 벗어날 수 없다
과도한 오류와 확대해석을 통해서만 간신히 신성(神性)에
도달하는 오늘은 정말이지 더 큰
사랑이 필요하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감당하다 내가
죽을, 죽어도 여한 없을 사랑이 ······
(그럼 신성으로서도 영광이겠지)
나 대신 여기서 더 멋지게 마지막을 장식해줄
지구 최고의 다이빙 선수가 필요하다!
··· ··· 어머 나 좀 취했나봐,
(오죽하면 네가 그럴까)
그날따라 우린 세상에서 우리가 못할 건 없을 건만 같았고
차라리 모든 걸 잃고 싶다 모든 걸 잃고 나면 사람은 바뀌
기 싫어도 바뀌고
정신이 송두리째 뿌리 뽑혀 생각지도 못한 생각에도 이
르게 되고
인생을 포기하자 갑자기 멋있어진 한 인간에게 어느 날
너는
한눈에 반하고
그런 밤이면 좀 지나치다 싶을 만큼의 여백이 필요하다
글자를 읽다 잠시 여백으로 새어나가 마냥 걷다보면 누구
도 방해하는 이 없어, 정말이지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한다 싶을 만큼의 고요 속에서
끝도 없이 홀로 거닐다 마침내 조용히
마음의 결정을 내릴 수 있게
네가 내 혈관 속에 흐를 수 있게 해줄게
내가 네 혈관 속에 흐를 수 있게 해줄래?
(오죽하면 내가 이럴까)
그런다고 죽는 일은 없겠지만
목숨을 다해서, 라는 기분으로
그래봤자 우리가 어제의 인간에서 한 치라도 벗어날 가능
성 따윈, 아무래도 없다고 봐야겠지만
마침내 난 내 모든 걸 다 바쳤다! 라는 기분이 들 때쯤
원하든 원치 않든 다시 잔뜩 들어찬 글자들로 붐비는 아
침은 올 것이고
너는 이윽고 제정신으로 돌아오고 말겠지만 그건 그때 가
서 생각하고, 어쨌거나 오늘은
너의 엄청난 힘이 내 위에서 쓰러지는 게 나는 좋다
< >
황유원 시인: 2013년 《문학동네》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 『세상의 모든 최대화』 『이 왕관이 나는 마음에 드네』 『초자연적 3D 프린팅』 『하얀 사슴 연못』 등. 김수영문학상, 대한민국예술원 젊은예술가상, 김현문학패, 현대문학상 등 수상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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