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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시인들

■ 황유원 시인의 시 ■ 우리 반 애들 & 무덤덤한 무덤 & 밤의 행글라이더 & 여몽환포영 & 초자연적 3D 프린팅

by 시 박스 2024. 7.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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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글라이더-픽사베이>

 

  어쨌든 그때 그 얼굴과 함성

  갑자기 떠올라

  지금 나 혼자 있는 이 방 가득 메워

  정신이 아득해진다

우리 반 애들

 

 

  싸움이 나면 와!!!

  하고 모여들어

  한 놈은 링을 만들고

  또다른 한 놈은 선생님 오나 안 오나 망을 보게 하던

  이 싸움 방해하면 죽었어, 하는 눈빛으로

  싸움을 관장하던

  사랑스런 우리 반 애들

  지금 생각해도 끔찍한

  얼마나 심심했으면 그렇게

  끔찍이도 좋아했을까 싶은데

  내가 우리 반 짱 얼굴에 침을 뱉었을 때

  늘 와!!! 하던 내 절친이 그때도

  와!!! 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어쨌든 그때 그 얼굴과 함성

  갑자기 떠올라

  지금 나 혼자 있는 이 방 가득 메워

  정신이 아득해진다

  싸우는 꿈을 꾸다

  두들겨맞는 꿈을 꾸다

  소스라치며 깨어나

  한밤중에 차가운 변기에 앉았을 뿐인데

  나는 이제 거의 마흔

  그 지긋지긋한 함월국민학교 졸업한 지도 너무

  오래되었는데

  불혹은커녕

  나는 다시 국민학생이고

  나는 여태 국민학생이고

  아직도 들려오는 함성 소리

  와!!!

  그 소리 그렇게 슬플 수 없어

  그렇게 기쁠 수 없어

  나는 또 기꺼이 링에 올라

  싸워준다

  맞아준다

  오늘도 너희들의

  소소한 기쁨이 되어

  <  >

 

 

옆에 있는 아무 무덤이나 열어제끼고 들어가

  안에서 잠들고 싶다

  고기 냄새 술냄새 풍기며 죽은 이를 깨워 거기서 내쫓고

  내가 거기를 온통 독차지하고 싶다

무덤덤한 무덤

 

 

  오늘 같은 날은 무덤가에서

  고기 굽고 술 먹고 싶다

  고기 굽고 술 먹다 졸리면

  옆에 있는 아무 무덤이나 열어제끼고 들어가

  안에서 잠들고 싶다

  고기 냄새 술냄새 풍기며 죽은 이를 깨워 거기서 내쫓고

  내가 거기를 온통 독차지하고 싶다

  죽은 이가 꾸던 꿈을 도중에 가로채

  죽음과 삶 모두를 내 것으로 하고 싶다

  무덤덤하게

  무덤덤하단 말은 분명 무덤에서 나왔을 터

  누가 자꾸 무덤에서 기어나온다

  기어나와 무덤 옆에 무덤덤히 앉아

  흐려진 건 눈인데 자꾸 안경이나 벗어 닦고 있는 그는 도

무지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 아름다운 산하와 대지가 훗날

  자기가 드러누워 평생 잘 무덤이 된다는 게

  갑자기 모든 게

  무덤 속에서 기어나와 다시 무덤 속으로 기어들어가기라

도 한 것처럼

  조용해진다는 게

  아무래도 오늘 저녁엔 무덤가로 기어나가

  고기를 굽고 술이나 쳐야겠어

  같이 앉아 고기를 굽다보면 다들 공범이 된 듯해

  좀 안정이 되고

  무덤가에서 먹는 고기와 술은

  아무래도 무덤가가 아닌 곳에서 먹는 고기와 술보다 훨씬

  맛이 있고

  그러다 어느새 혼자만 남게 되었을 때 다시 아무렇지 않

은 척

  한 발 한 발 무덤 속으로 기어들어가기 위해서라도 제발

  무덤덤해져야 한다

  술에 취해 도처의 곧은 선들 죄다

  능선으로 휘어지고

  그제야 무덤은 무덤다워져

  도처에 무덤만이

  쓰러지는

  신들처럼

  코를 골 때

  그러니까 이런 날 술자리는 그냥 먹고

  죽자는 말

  제법 풍취가 있다 죽은 자만의 곤조가 있어

  "음, 아무래도 오늘 난 여기서 하룻밤 자고 가야겠군!"

  오늘도 함소입지(含笑入地)한 자를 입안 가득 삼켜

  속에 꺼지지 않는 웃음을 품게 되었다

  <  >

 

 

 밤의 헹글라이더는 밤의 헹글라이더

  이 비행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다

  알 수 있다면 슬프지도 않았을

  그러므로 애초에 이 비행은 성립되지도 않았을

밤의 헹글라이더

 

 

  밤의 헹글라이더는 밤의 헹글라이더

  어디까지 날아가나

  언제까지 날아가나

  바보같이 저렇게

  날아가기만 하고 있을 텐가

  밤의 헹글라이더는 밤의 헹글라이더

  낮의 헹글라이더도 아니고

  밤의 산토끼도 아닌

  밤의 행글라이더는 밤의 헹글라이더

  불 모두 꺼진 언덕 위로

  혼자 프로펠러를 돌리며 날아가는

  고무 동력기를 측은하게 바라보다 방향을 잃고 마는

  바보 천치 머저리 등신······

  밤의 헹글라이더는 밤의 헹글라이더

  밤의 행글라이더에 올라타 끝없이 펼쳐지는 밤의 언덕 내

려다보며

  불어오는 바람에 온몸과 마음을 맡겨만 본다

  내 온 몸과 마음을 맡은 밤의 행글라이더가 아무 말 없이

날아가기만 한다

  밤의 행글라이더는 밤의 헹글라이더

  이 비행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다

  알 수 있다면 슬프지도 않았을

  그러므로 애초에 이 비행은 성립되지도 않았을

  밤의 헹글라이더는 이제 힘이 다해간다

  밤의 헹글라이더에 올라탄 나는 그것을 느끼고 밤의 헹글

라이더를 쓰다듬어준다

  숨막히는 행글라이더를 불쌍히 여겨준다 마치 그것이 나

인 것처럼

  마치 그것의 비행이 나의 비행이라도 되는 것처럼

  나는 추락하는 밤의 헹글라이더를 내 무덤으로 삼아주고

그것과 함께 추락해준다

  밤의 행글라이더는 밤의 헹글라이더

  오늘밤의 비행은 이것으로 끝나지만

  내일 밤은 또 어떤 비행이 펼쳐질지 알 수 없다

  펼쳐진다

  펼쳐지는 그것이 원래 얼마나 많이 접혀 있었던 것인지

알 수 없다

  낮에는 있지도 않았을 밤의 헹글라이더

  밤만 되면 나타나 끝없이 언덕만이 펼쳐지는 지구를 누

비며

  나를 못살게 구는 헹글라이더

  헹글라이더 헹글라이더

  행글라이더라는 발음 속에 사는

  그러나 헹글라이더라는 발음 밖에도 존재하는

  밤의 헹글라이더

  추락하는 밤의 헹글라이더 

  새도 아니면서

  새의 뜨거운 심장도 가지고 있질 않으면서

  어찌 보면 새처럼도 보이는

  바람에 빌붙어먹는 더러운 헹글라이더

  나를 달리게 만들고 기어코 뛰어내리게 만드는 사랑하

는 나의

  행글라이더

  사랑하는 나의 밤의 행글라이더

  사랑하는 나의 밤이 지나고 낮이 지나고 다시 찾아온 밤

의 행글라이더

  오르면 잠시 용감해지다

  이윽고 슬퍼지는

  무한한 나의

  밤의 행글라이더는 밤의 헹글라이더

  양날개의 균형을 닮은 이 문장을 주문처럼 반복시키며

  나는 그만 이 시를 끝내지만

  이 시는 끝나고도 계속 날아가고 있다

  밤의 행글라이더는 밤의 헹글라이더

  밤의 헹글라이더는 밤의 헹글라이더

  <  >

 

 

사실 난 죽을까봐 좀 무서워서

  그다음부턴 뛰어들지 않았고

  너만 혼자 계속 바다로 뛰어들었지만 ······

여몽환포영

 

 

  죽어도 된다

  우린 그날 저승처럼 컴컴한 해변에 앉아 있다가

  안전요원들의 눈을 피해 하나둘 밤바다로 뛰어들었지

 

  안전하지 않아도 된다

  파도 소리의 저음에 경박한 호루라기 소리 섞어주며 우

린 밤새

  속초의 밤바다 잠들지 않게 했지

 

  사실 난 죽을까봐 좀 무서워서

  그다음부턴 뛰어들지 않았고

  너만 혼자 계속 바다로 뛰어들었지만 ······

 

  잠들면 안 돼! 우린 여기서 밤새 놀다 가야 하니까

  어차피 죽음을 삶에 좀 섞어보는 거다

  그 역(逆)이 아니라

 

  아까 그 안전요원을 몇 번이나 빡치게 만들며

  너는 침대에 몸이라도 누이듯 또 한번 밤바다에 드러누

웠지

  그게 벌써 오륙 년 전 여름의 일이고

 

  불은 끈다고 하루가 끝나는 건 아니어서

  불을 끄면 기다렸다는 듯

  밀려오는 물결들

 

  내가 더이상 해변에서 잠들지 않으므로

  간혹 해변이 내 곁으로 와

  쓰러져 잠드는 밤이 있고

  

  그런 밤이면 몰래 자리에서 일어나

  어둔 밤의 해변을 홀로 거닐기도 했다

  젖은 모래 위에 如, 夢, 幻, 泡, 影 *

 

  손끝으로 한 자 한 자 써보며

  꿈 같고, 허깨비 같고, 물거품 같다는 말

  또 그림자 같다는 말을 문신처럼 새겨넣었다

 

  우리 조금만 더 죽자

  진짜 죽음이 있기 전에

  하고 기도하던 밤이 있었다

 

  파도의 포말처럼

  기도가 새하얘져

  해풍에 흔들리다 꺼져버리던 밤이 있었다

 

 

  * 『금강경』 사구게(四句偈)에 포함된 비유.

 

 

초자연적 3D 프린팅
(이 시는 별도의 페이지로 포스팅합니다.)

 

출처: 황유원, 『초자연적 3D 프린팅』, 문학동네,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