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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시인들

■ 길상호 시인의 시 ■ 우리의 죄는 야옹 & 가디마이 & 잠잠 & 그림자 사업 & 빗방울 사진.

by 시 박스 2024. 7.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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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pexels-Pixabay >

 

 

남몰래 길러온 발톱을 꺼내놓고서

  부드럽게 닳을 때까지

  물벽에 각자의 기도문을 새겼네

우리의 죄는 야옹

 

 

  아침 창유리가 흐려지고

  빗방울의 방이 하나둘 지어졌네

  나는 세 마리 고양이를 데리고

  오늘의 울음을 연습하다가

  가장 착해보이는 빗방울 속으로 들어가 앉았네

  남몰래 길러온 발톱을 꺼내놓고서

  부드럽게 닳을 때까지

  물벽에 각자의 기도문을 새겼네

  들키고야 말 일을 미리 들킨 것처럼

  페이지가 줄지 않는 고백을 했네

  죄의 목록이 늘어갈수록

  물의 방은 조금씩 무거워져

  흘러내리기 전에 또 다른 빗방울을 열어야 했네

  서로를 할퀴며 꼬리를 부풀리던 날들,

  아직 덜 아문 상처가 아린데

  물의 혓바닥이 한 번씩 핥고 가면

  구름 낀 눈빛은 조금씩 맑아졌네

  마지막 빗방울까지 흘려보내고 나서야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 되어

  일상으로 폴짝 내려설 수 있었네

  <  >

 

 

순례의 마지막 발자국에는

  비린 숨소리만 가득 고였다

  여신의 그늘진 목덜미를 짚어보니

  짓이겨진 꽃물이 줄줄,

가디마이*

 

 

  흰 염소와 검은 염소가 나란히

  서로의 얼굴을 바꿔 달고서

  피로 물든 들판을 걸었다

  간신히 몽우리를 연 들꽃들도

  쿠크리 칼날 아래 목을 들이밀고

  향기로운 눈을 감았다

  순례의 마지막 발자국에는

  비린 숨소리만 가득 고였다

  여신의 그늘진 목덜미를 짚어보니

  짓이겨진 꽃물이 줄줄,

  연고를 듬뿍 짜 발라주어도

  쓰라린 저녁은 쉬 아물지 않았다

  버팔로 뿔을 내장 깊숙이 박고

  한 무리의 바람이 날뛰다 쓰러져갔다

  통증은 축제의 불꽃놀이 같은 것

  순한 제물의 목울대를 뒤적여

  미래를 찾아내던 사람들,

  신선한 비명에 취해

  손금에 깃든 울음은 듣지 못했다

 

  * 오 년마다 열리는 네팔의 힌두교 축제로 수십만 마리의 동물들이 

제물로 바쳐진다.

  <  >

 

 

온기도 없는 달이 뜬 밤

  수천 겹 물결을 열고 아픈 이름들이

  기포처럼 떠오르기도 했지만

  얼굴을 생각해내기도 전에 꺼져버렸다

잠잠

 

 

  낮과 밤이 등을 맞대고 앉아

  서로를 외면하던 날들은 지났다

  계절이 가고 또 지나고 보니

  다짐은 그리 단단한 것이 아니었다

  모래를 덮어쓰고 해당화 시들기도 전에

  가슴에 달아둔 나비는 날아가버렸다

  세월을 사정없이 물어뜯던 파도는

  이제 또 잘 길들여진 개가 되어

  바다의 상한 발목을 핥고 있었다

  온기도 없는 달이 뜬 밤

  수천 겹 물결을 열고 아픈 이름들이

  기포처럼 떠오르기도 했지만

  얼굴을 생각해내기도 전에 꺼져버렸다

  명치에 가라앉은 바다가

  다시 깨어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나는 차가운 밤을 쓰다듬었다

  잠잠해진 꿈속에서 건져낸 나의 심장은

  이미 오래전에 죽은 조개처럼

  갯내 가득한 진흙만 쌓여 있었다

  <  >

 

 


 그래서인지 찾는 사람들이 많아져 벌이가 쏠쏠합니다.
어떠세요. 저와 손잡을 생각 없으신가요?

그림자 사업

 

 

  저의 직업은 그림자 소매치기입니다. 뒷모습을 버린 사람

들에게서 그림자를 슬쩍하는 건 아주 손쉬운 일이지요. 뒤

따라다니며 주사기를 대고 쭉 빨아올리면 그것으로 그만이

니까요. 놀라 뒤돌아보던 사람도 홀쭉해진 그림자를 알아보

는 일은 없습니다. 증거도 없이 멱살부터 잡는 놈이 가끔 있

지만 미리 덩치를 불려둔 바닥의 나를 보여주면 열이면 열

꽁무니를 빼고 도망가지요. 그렇게 모아둔 그림자들은 농도

에 따라 나눠 얼려둡니다. 조울증을 다스리는 귀한 약이 되

기도 하거든요. 조증이 최고치에 달했을 때 투여하면 그야

말로 직방이지요. 가끔 가난한 사람들이 밤의 어둠도 그림

자라고 잘못 뽑아 수혈했다가 별빛에 찔려 목숨을 잃었다는

데, 그래서인지 찾는 사람들이 많아져 벌이가 쏠쏠합니다.

어떠세요. 저와 손잡을 생각 없으신가요?

<  >

 

 

그가 빗방울에 맺힌 그림자를 꺼내

  연잎 위에서 굴리는 동안

빗방울 사진

 

 

  연꽃의 조리개가 닫히고 나면

  사진관은 곧 사라질 거라 했다

  

  못도 물그림자를 걷어내며

  암실 같은 어둠을 준비하고 있었다

 

  마지막 손님을 위해 사진사는

  잎 끄트머리 빗방울 렌즈를 갈아 끼우고

 

  꽃받침도 없이

  겨우 꽃잎을 붙잡고 있는 인연,

 

  바람만 조금 불어도

  초점거리에서 벗어나버리는 얼굴

 

  그가 빗방울에 맺힌 그림자를 꺼내

  연잎 위에서 굴리는 동안

 

  현상되지 않던 표정들은

  잎맥 사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떨어뜨린 연, 꽃잎을 받아들고

  어두워진 수면이 한참을 울먹였다

  <  >

 

 

길상호 시인: 200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오동나무 안에 잠들다』 『모르는 척』 『눈의 심장을 받았네』.
산문집 『겨울 가고 나면 따뜻한 고양이』가 있다. 현대시동인상, 천상병 시상, 한국시인협회 젊은시인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