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의 시인들

■ 황인찬 시인의 시 ■ 비역사 & 사랑을 위한 되풀이 & 아카이브 & 요가학원 & "내가 사랑한다고 말하면 다들 미안하다고 하더라"

by 시 박스 2024. 7. 1.
728x90

<밤의 수영장>

 

밤의 수영장에 
혼자 있었다

 

비역사

 

 

  밤의 수영장에 

  혼자 있었다

 

  귀에 닿는 물소리 탓에

  네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너는 실내에서 나오지 않는다

  너는 어디에서도 나온 적 없다

 

  밤의 수영장을 혼자 걸었다

  몸에 닿는 밤공기가 차가워

  네가 만져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너는 실내에서

  나오지 않는다

 

  밤의 수영장에 

  혼자 있었다

 

  보름달이 너무 크고 밝아

  네가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너는 내 어깨에

  손을 올린다

 

  너는 어디에서도

  나온 적 없다

  <  >

 

  내 역할은 이야기를 반전시키는 의외의 목격자 같은 것
이고
  그 이후로 나는 나오지 않는다

 

사랑을 위한 되풀이

 

 

  나는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아니다

 

  나는 그저 마을 어귀의 그루터기에 앉아 사람들을 향해

욕을 하거나 소리 지르는 사람

 

  내게 무슨 놀랍거나 슬픈 사연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인적

드문 날 혼자 물소리를 듣는다거나 다른 이들 모르게 무슨

일을 하는 것도 아니다

 

  내가 마을 어귀의 그루터기에 앉아 사람들을 향해 욕을

하거나 소리 지르는 사람이 된 것은

 

  이야기가 시작되는 순간부터였다

 

  내 역할은 이야기를 반전시키는 의외의 목격자 같은 것

이고

  그 이후로 나는 나오지 않는다

 

  여기선 물소리가 들리지도 않는다

  이야기는 나도 모르는 새 끝나버렸다고 한다

 

  아마 해피엔딩이었을 것이다 악을 물리치고 소중한 일상

을 되찾지만 무고한 이들의 희생이 마음속에 언제고 남아

있다는 식의

 

  수많은 사상(事象)을 짊어지고, 그 자체로 복잡한 인과가 되

어버린 주역들에게 미래란 말은 조금 무거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등장인물의 미래는 상상 속에만 있는 것이니까

  믿고 맡겨야지 그 모든 미래를

 

  끝 이후의 시간을

 

  바야흐로 지금은 어떤 이야기 속의 봄날 저 여린 빛의 꽃

은 피어 있는 채로 지지 않고 투명한 물은 흐르지 않는 고요

한 동심원이고

 

  나는 쓰러진 악과 함께 앉아 있다

  <  >

 

  벌써 여름이구나

  그렇게 말하는 순간 지난여름에도 똑같은 말과 생각을 했
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카이브

 

 

  이 계단을 오르면 집에 이른다

 

  제비들이 창턱에 앉아 뭐라 떠들고 있다

  그것이 여름이다

 

  장미가 피는 것을 보며 여름을 알고

  무궁화가 피는 것을 보먀 여름인 줄을 알고

 

  벌써 여름이구나

 

  그렇게 말하는 순간 지난 여름에도 똑같은 말과 생각을 했

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게 알아차리는 순간 이 알아차림을 평생 반복해오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순간마다 여름은 창턱을 떠나 날아갈 준비를 한다

 

  이 계단은 집을 벗어난다

 

  여름이 무리 지어 날아다니고 여름이 이리저리 피어 있는

풍경이다

  낮은 풀들이 한쪽으로 밟혀 누워 있다

 

  발자국은 보이지 않는다

 

 이 누적 없는 반복을 삶과 구분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이

시의 서정적 일면이다

<  >

 

먹는 일에도 자꾸 미안한 마음을 가지게 되고
마음의 양식은 독서라는데 사랑의 음식은 사랑이라는데

쓸 게 없는 시인들은 맨날 시에 대한 시나 쓰고
나는 삼시 세끼 다 먹고 소가 되면 좋겠네

 

요가학원

 

 

  아, 시 계속 이렇게 쓰면

  좋은 시인 못 되는데, 나도 아는데······

 

  착한 사람 되라고 엄마가 말했는데 듣고도 그냥 흘리는 

것처럼

 

  좋은 시인이 되면 뭐 좋은 일이라도 있다는 것처럼

  좋은 시인 못 되는 게 무슨 자랑이라도 된다는 것처럼

 

  그렇게 놀기만 하면 훌륭한 사람 못 된다 그렇게 놀기만

하면 소가 되어버린다던 엄마의 말처럼

 

  좋은 시인 못 되면

  소라도 되어야지

 

  신선은 아침에 먹고

  짐승은 낮에 먹고

  귀신은 밤에 먹는다는데(유진, 박한별 나오는 영화 「요가

학원」에서 봤음)

 

  먹는 일에도 자꾸 미안한 마음을 가지게 되고

  마음의 양식은 독서라는데 사랑의 음식은 사랑이라는데

 

  쓸 게 없는 시인들은 맨날 시에 대한 시나 쓰고

  나는 삼시 세끼 다 먹고 소가 되면 좋겠네

 

  인찬아, 너는 은유를 못 쓰니까 가능하면 쓰지 말자,

  그렇게 말씀하시던 선생님도 계셨는데

 

  좋은 시인 못 될 거라 상관이 없네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노 저어 오오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결국 나는 소가 되었고 이제 이 시는 소가 된 나의 이

야기가 된다

 

  그것은 우리에게 불가능한 목가적 풍경과

  그 평화로운 나날을 가까이에서 들여다보았을 때 드러나

는 참혹이라는 상상된 진실에 대한 집요하고 강박적인 관

찰과

  그렇기에 불가능할 수밖에 없는 사랑에 대한 지극하고 억

지스러운 긍정과

  그런 긍정을 딛고 다시 일어남으로써 가능해지는 다른 생

명들과의 환대를 암시하고자 숲과 대지를 비추며 점차 부감

하는 시선에 대한 메타적 인식과

  그런 장면의 한 귀퉁이에 놓여 있는, 다른 모든 소와 다름

없이 평화롭게 풀을 뜯어 먹고 있는 얼룩소 한마리로 구성

된다

 

  그런 풍경과는 무관하게

  소가 된 나는 뭐 이미 정육식당 어딘가에  놓여 있겠지

 

  그렇다 하더라도 ······

 

  내 마음은 호수고 그대는 노 저어 오고

  산에는 꽃이 피겠지 계속 피겠지

 

  꽃피는 한우(집 근처 소고기집)에서는

  소고기가 자꾸 익어가고

 

  그런데 이 시를 다 써도 내가 아직 소라면 어떻게 하지?

 

  정육식당에 가만히 놓여 있는 소고기가 된 나는

  고기 냄새를 맡으며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시는 무능한 영화가 그러하듯이

  천천히

 

  천천히 위로 올라가며

 

  아무것도 없는 곳을 비추려 한다

  <  >

 

사랑해, 그런 말을 들으면 책임을 내게 미루는 것 같고
사랑하라, 그런 말은 그저 무책임한데

 

"내가 사랑한다 말하면 다들 미안하다고 하더라"

 

 

  공원에 떨어져 있던 사랑의 시체를

  나뭇가지로 밀었는데 너무 가벼웠다

 

  어쩌자고 사랑은 여기서 죽나

  땅에 묻을 수는 없다 개나 고양이가 파헤쳐버릴 테니까

 

  그냥 날아가면 좋을 텐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날 꿈에는

  내가 두고 온 죽은 사랑이

  우리 집 앞에 찾아왔다

 

  죽은 사랑은

  집 앞을 서성이다 떠나갔다

 

  사랑해, 그런 말을 들으면 책임을 내게 미루는 것 같고

  사랑하라, 그런 말은 그저 무책임한데

 

  이런 시에선 시체가

  간데온데없이 사라져야 하는 법이다

 

  그러나 다음 날 공원에 다시 가보면

  사랑의 시체가 두 눈을 뜨고 움직이고 있다

  <  >

 

 

  황인찬 시인: 2010년 《현대문학》을 통해 작품 활동 시작. 시집으로 『구관조 씻기기』 『희지의 세계』 『사랑을 위한 되풀이』『이걸 내 마음이라고 하자』 등이 있다.
김수영 문학상, 현대문학상 시 부문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