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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시인들

■ 김승일 시인의 시 ■ 항상 조금 추운 극장 & 너무 오래 있었던 세계 & 2차원의 악마 & 나는 모스크바에서 바뀌었다

by 시 박스 2024. 6.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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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일 시집, 『항상 조금 추운 극장』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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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시여 잘했지요 고양이

얘기로 시작하긴 했지만 고양이 얘기가 아닌 얘기를

했잖아요 옛날에 알았던 사람들이 전부 영화에 나왔

으면 좋겠어요 좀비로요 극장은 항상 조금 추워요

 

항상 조금 추운 극장

 

 

  고양이와 함께 산 다음부터 고양이 얘기 아니면

할 얘기가 없게 됐어요 앞으로도 남은 평생 고양이 얘

기만 해도 되냐고 신에게 물었어요 그러지 말라네

요 내가 고양이가 아닌데 당신은 어떻게 나를 좋

아했나요 아직도 좋아하나요 극장에서 좀비 영화

를 봤는데 좀비로 분장한 당신을 발견했어요 확실

히 당신이었어요 표를 새로 끊고 극장에 앉아서 당

신이 또 지나갈 때까지 기다렸어요 잠깐만 나오더

군요 당신이 나를 좋아했을 때 당신은 만나는 사람

이 있었죠 곧 헤어지겠다고 하고서는 헤어지는 것

을 힘들어했죠 당신이 빨리 헤어지길 바랐어요 세

월이 아주 많이 흘러서도 당신이 미웠어요 당신이

인간이라 그랬나봐요 당신이 고양이라면 만나는 사

람이 있든 말든 무슨 상관이었을까 오늘 극장에서

당신을 봤을 때는 밉지 않았어요 내일 또 당신을 보

러 극장에 갈 심산이에요 신이시여 잘했지요 고양이

얘기로 시작하긴 했지만 고양이 얘기가 아닌 얘기를

했잖아요 옛날에 알았던 사람들이 전부 영화에 나왔

으면 좋겠어요 좀비로요 극장은 항상 조금 추워요

세상의 계절은 항상 환절기고요 신에게 묻고 싶어요

좀비는 환절기에 민감한가요? 그렇다면 그렇지

게, 그렇지 않다면 계속 그렇지 않게 도와주세요 그

들은 아파도 얼마나 아픈지 말하지 못해요 눈물도

없고 가질 수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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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가 불쌍하다, 세계가 불쌍하다. 한목소리로 소리치

는 모임이 있다면 꼭 참여하고 싶습니다. 세계가 망

할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죽을 것이기 때문에 모여

서 소리치는 모임이 아니라.
그냥 세계가 너무 오래있었기 때문에. 

 

너무 오래 있었던 세계

 

 

  세계는 침묵으로도 말하지 않습니다. 세계는 오래

있었습니다. 해일, 지진, 작은 벌레들의 고통, 화강

암의 따스함이나 차가움, 우리가 지금 나누고 있는

이 대화도 세계에게는 표현이 아닙니다. 우리는 세

계의 입이 아니라 세계의 생각입니다. 세계는 생각

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세계가 생각하지 않은 생

각이고 세계는 너무 오래 있었습니다. 나는 사람들

많은 곳에 가는 것을 꺼리는 편이지만 만약 사

람들이 어딘가에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모여서 세

계가 불쌍하다, 세계가 불쌍하다. 한목소리로 소리치

는 모임이 있다면 꼭 참여하고 싶습니다. 세계가 망

할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죽을 것이기 때문에 모여

서 소리치는 모임이 아니라. 그냥 세계가 너무 오래

있었기 때문에. 그 사실이 불쌍해서 미치겠는 사람

들의 모임에 꼭 참여하겠습니다. 아무리 수많은 입

들이 떠들고 외쳐도. 지나가던 고양이와 개들도 한

데 모여 한마음 한뜻으로 비명을 질러도. 어떤 것도

세계의 표현은 아니라는 것을. 그 모임에서 다시 한번

되뇌고 싶습니다. 세계가 겪는 슬픔에 조금 다가가기

위해서요. 세계는 슬픔과는 아무 상관 없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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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나 사랑이란 단어로 덧칠하는

건. 내가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몇 안 는 것들 중에 하나.

 

2차원의 악마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그림이 되고 싶어 하네

 

  다들 그림이 되고 싶어 한다는 것은 내가 완벽하

게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것들 중에

하나.

  그림이 되고 싶어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

도 있지. 가을비나 돌멩이처럼. 돌아서서 다시 생각

해보면. 그것들도 역시 그림이 되고 싶어 하네. 어

떤 것들은 외로워서 그림이 되고 싶어 한대. 가을비

는 외롭지 않지만. 그림이 되고 싶어 하네. 웃긴 걸

까 슬픈 걸까. 그림이 되고 싶다는 것은.

  네 옆에 앉아 있다가. 너는 그림이 되기를 원하

지 않는 것 같다고 생각했어. 모든 것이 그림이 되

고자 하는데. 너만 제외해도 되는 것일까. 고민하다

가 고양이가 특별한 대우를 바란다는 것을 깨달았

다. 사랑하니까. 마주칠 때마다 네게 고백하니까.

특별하게 대우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네가 그림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 이유는 사랑 때

문이 아니야. 어디에나 사랑이란 단어로 덧칠하는

건. 내가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것들 중에 하나.

 

  그리고 누군가가 책에 그려놓은 악마. 나 때문이 

아니야. 너희가 그림이 되고 싶어 하는 것은. 나 때

문이 아니야.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만 같은.

 

  나 때문이 아니야.

 

  네가 누군데?

 

  가을비.

  <  >

 

 

애들도 시체를 봐야 시체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

겠지만 나는 시체가 너무 불쌍해서 시체를 들고 먼

곳으로 간다

  아무도 보고 수군거리거나

  

  침묵하지 않도록

 

나는 모스크바에서 바뀌었다

 

 

  나는 무서운 것이 너무 많고

  비위도 약하지만

 

  내가 시체 청소부면 좋겠다

  초등학교 앞에 시체가 나타나면 아이들이 떼로

몰려서 시체를 둘러싸고 서서 그걸 보고 있다

  한마디씩 하는 애들도 있고 아닌 애들도 있지

 

  애들도 시체를 봐야 시체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

겠지만 나는 시체가 너무 불쌍해서 시체를 들고 먼

곳으로 간다

  아무도 보고 수군거리거나

  

  침묵하지 않도록

 

  그때 나는 아직 어린아이고 시체는 대부분

  축축하고 무겁다

 

  나는 내가 많으면 좋겠다

  천만 명이면 좋겠다

 

  어린애들이 있는 곳이면 거기 항상 있는

  시체가 나타나면 들고 먼 곳으로 가는

 

  모스크바 공항에서 파리행 비행기를 놓치고

  공항에 오랫동안 갇혀서

  이런 개고생 좀 그만하자고, 술도 끊고, 집에서

만 놀았는데 싫은 사람 나쁜 사람

  안 만나고 솎아내고 살고자 했던 것 같은데

 

  그렇게 살지 말아야지

 

  전염병이 도는 시기에

  누울 곳이 없는 모스크바에서

 

  그렇게 살지 말아야지 내가 많았으면 좋겠다

  어디서나 머리만 기대면 깜박 잠들고

 

  시체를 둘러싼 아이들 틈바구니를 비집고

  들어가서 시체를 들고 먼 곳으로

 

  그런 생각을 스무 시간 하고

  나는 모스크바 공항에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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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일 시인: 2009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에듀케이션』 『여기까지 인용하세요』 『항상 조금 추운 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