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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과 몸 사이에 또 다른 팔이 들어올 수 있다는 것에
나는 잠깐 놀라기도 했다
내 남은 팔은 그리할 수 없는데
사이라는 것은 많은 일을 가능하게 하는구나
흙비
이를테면 한해살이풀이란 말이 여름 내내 걸음을 기우
는 것
왜 이 길로 가느냐고 물었다 저쪽으로 가면 돌아가지
않고 한 번에 갈 수 있는데
슈퍼를 지나 공원을 끼는 이 지루하고 재미없고 무딘
길을 걷느냐고
당신은 말없이 씩 웃으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이유를 대답할 수 없다는 듯이
푹푹 찌는 무더위에 어느덧 숨은 가쁘고 이마엔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손바닥을 바지에 문질렀다 주머니에 손
을 넣고 미간을 찌푸렸다
이해할 수 없는 동선이다 당신은 왜 이토록 나를 힘들
게 하지? 나는
세탁소에 맡긴 옷들을 찾으러 나왔을 뿐인데 이봐요
당신,
나는 처음부터 산책 따위를 할 마음이 없었단 말이야
아이들은 공원에서 신나게 뛰어놀고 있었다
푸릇한 나무들이 비자림처럼 울창했고 이제 여기선
정말
식물 이름을 알 수가 없었다 저건 이름이 뭐지? 당신
은 여전히 내 옆으로 다가와 말이 없었다가 슬며시 팔짱
을 꼈다
팔과 몸 사이에 또 다른 팔이 들어올 수 있다는 것에
나는 잠깐 놀라기도 했다
내 남은 팔은 그리할 수 없는데
사이라는 것은 많은 일을 가능하게 하는구나
어느 고요한 벤치에는 육체와 멀어진
한 그림자가 주저앉았다가 그대로 쓰러졌다
여름을 열심히 걷다 보면 봄이 오나 보다
이윽고 팔짱을 낀 당신의 몸이 나의 몸속으로 스며들
고 있었다
그것을 배고픔을 못 느끼고 무수한 어깨에 치이는 족
족 넘어지고
더는 밝은 곳으로 향할 수 없다는 직감의 명령이었다
당신은 말이 없었고 당신은 생각하지 않았고 당신은
단지 나를
조금 돌아가게 하는 존재, 무엇을 보라고 어디로 가라고
세탁소에 맡긴 옷들이 오염된 순간으로 돌아가고 있
었다
당신은 황급히 화단으로 나갔었다
거센 비가 들이쳐서 모든 걸 망쳤다고
여태까지 심은 것들이 다 죽고 말았다고
이상하다 밖은 유독 화창했는데
눈이 부셔서 당신 쪽을 못 볼 지경이었는데
정수리 위로 장난감 팔이 툭 떨어졌고
---철쭉.
---응? 아, 맞네. 철쭉.
당신은 대답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몇십 분 전의 물
음을 머릿속에서 떠나보내지 않고 끝까지 붙든 것이었다
내개 답을 주기 위해 꽃의 이름을 알려주기 위해
부드러운 곡선 같은 대답을, 긴 침묵을 깨고서
나는 5월의 아름다운 철쭉을 바라보며
몸속에 스민 동시에 몸속을 벗어나려는 당신을 미워
했다
서로 나빠지자고요
책임감 없는 상태로 돌아가자고요
바람이 불어도
당신이 알려준 꽃의 이름은 흔들리지 않았다
옷을 맡겼던가 그런 일은 필요했으나
감내하지 않아도 좋았다 경계를 가르는 날씨
한쪽에는 먹구름이 잔뜩 꼈고 한쪽에는 뭉게구름이 넘
실대고 있었다
어느 쪽으로 가고 싶어? 당신은 옆에서 걷고 있었는데
당신이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며 내게 말했다
아무래도 잘못 온 것 같아
돌아가는 게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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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안 와요. 우산 더 안 써도 돼요" 하면서 전단지를
계속 내밀고
누굴 기다리느라 옆에서 10분 넘도록 책을 읽는 사내
에게는 전단지를 내밀지 않는다
극세사
"골프입니다" 하면서 전단지를 내미는 할머니들
아직 비가 내리는 줄 알고 우산을 쓰며 걷는 사람들
"비 안 와요. 우산 더 안 써도 돼요" 하면서 전단지를
계속 내밀고
누굴 기다리느라 옆에서 10분 넘도록 책을 읽는 사내
에게는 전단지를 내밀지 않는다
우산을 접으며
우산을 펴며
끊임없이 발소리를 내는 사람들
더 안 해도 되는 일들이 거리에는 많다
역사 미화원은 출구 앞에 파란 우산털이통 하나를 놓
으며
"아이고, 사람들이 많아도 많아도 너무 많다. 정신없어
죽겠다. 미치겠다" 하면서 계단을 오르는데
지하철에서 방금 내렸는지 수많은 인파가 한꺼번에 계
단을 내려온다
사람이 사람을 지나친다고 해서
시간이 교차하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를 기다리기 위해 들고 있는 시집을
가끔씩 툭툭 건드리는 어깨들이 있다고 해서
기다리는 사람이 곧장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다만 모르는 얼굴이 또 하나 늘어나고
어디까지 읽었는지 잠시 까먹을 뿐이다
망원역에는 출구가 두 군데밖에 없고
출구끼리 서로 마주 보고 있으므로
여기로 나오면 저기를 바라보게 되고
여기로 나왔기에 저기를 잃어버리게 된다
상점마다 비추는 빛들이 물기 가득한 자리로 한데 모
인다
저 빛을 밟으면 순간 모든 길들이 환해질 것만 같은데
스친 옷자락 사이로 잠깐 먼지가 붕 떠오르다가
접은 우산에서 떨어진 물방울과 펼친 우산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모인 자리를 향해
천천히 가라앉고 있다
그리고 잠깐 다른 곳을 보고 있던 사이에
사내가 어디론가 가고 없다
시집을 덮고 반가운 얼굴로 기다렸던 사람을 만난
사내의 모습을 그려볼 수도 있겠지만
그 순간을 놓친 자에게 영원이란 행방불명일 것
손에 쥔 전단지를 다 돌린 할머니들이
검은 봉지 속에서 잡히는 대로 한 묶음을 새로 꺼낸다
어쩌면 이번 겨울은 좀더 따뜻하게 보낼 수 있을지도
눈빛들이 얽히는 파장 속에서
기워볼 만한 순간들은 다 기워봐야지
젖은 풍경은
햇볕에 잘 말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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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들을 나누어 가지려고 해
공중에서 힘없이 털썩 내려앉는 팔을,
수양버들
팔들을 나누어 가지려고 해
공중에서 힘없이 털썩 내려앉는 팔을,
유언을 전하려고 눈꺼풀을 떨면서
입을 떼는 순간 툭 떨어지는 팔을,
허리가 거의 다 굽은 할머니가 아픈 무릎을 펴며
검은 봉지에 방울토마토를 한 움큼 덤으로 주는 팔을,
등 뒤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대신 받아주고 막아주는
팔을,
아무리 노력해도 눈물이 나오지 않는 모습이 더욱 비
참해져서
가슴을 두드리는 팔을,
흐르지 않은 눈물방울을 그리며 물기를 느끼고 갈라지
는 두 뺨을 닦는 팔을,
죽은 작곡가가 쓴 곡을 연주하기 위해 꺾는 최초의 각
도를 사랑하는 팔을,
박수하는 팔을,
인사하는 팔을,
결혼해요 결실을 맺어요
서로에게 반지를 끼워주기 위해 약간 비틀어지는 몸
기울어지는 고개
닮은 각도가 교차되는 순간의 팔을,
창가에 기대 바깥을 바라봐야만 할 때 턱을 괴는 팔을,
물 한 잔을 더 따라주는 팔을,
약속하는 팔을,
찾아주는 팔을,
보여주는 팔을,
바람에 맡겨보려고 해 그냥 편안히 흔들려보기로 해
팔들을 나누어 가지며 더 붉은 뺨을 어루만질 수 있
나요
떠도는 팔들을 한데 그러모으면 더 많은 영혼을 돌이
킬 수 있나요
공중에 모인 팔들이 만든 그늘이 땅에 엎드리다가 기
어다니기도 하면서
오늘만큼은 그늘이 필요한 사람 사랑하는 대상의 크기
만큼 얼굴이 조각난 사람
금빛 언덕이 이완되도록 심호흡해야 하고
뾰족한 공기 속에서 터지지 않는 피부를 배워야 하는
사람
팔들이 모여 스스럼없이 사람을 껴안으니
사람이 비로소 흐느끼네 나무가 되려 하네
없는 팔을 더는 그리워하지 않네
없는 만큼 바람을 뿌리로 가지로 뻗을 수 있으니
잠시 쉬고 싶은 자리에 누워
팔들을 나누어 가지려 해
팔을 뻗으니 새로운 팔이 돋아나 다가오려 해
가까이는 가겠으나 붙잡진 않으려고 해
단추를 잠궈주는 팔을,
휘몰아치는 태풍 속에서도 억센 팔을,
버들잎 아래 차례로 누워
< >
우연히 네가 쓴 시를 읽었다고 다 좋은데 너는
'나는'을 참 많이 쓴다고
어떻게 문장마다 '나는'으로 시작하냐고
나는
가을에 아름다운 학교에는 넓은 교정이 있고
조금 흠집이 난 나무 의자에 미대생이 앉아 담배를 피
우고
도서관 창문에 구름이 가득해서 통유리에 비치는 이
젤은
순간적으로 다리를 부러뜨려 그림을 잊는다
한낮에 무언가를 망쳤다는 생각이 아직 푸릇한
잎사귀들은 꺾어야지 꺾어서
다시는 생명을 돋을 수 없도록
농구대를 망가뜨려야지 그물망을 찢어서
공이 들어갔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도록
나는 미대생에게서 몇 걸음 떨어져 앉는다
관점에 따라 나란히 앉았다고 볼 수도 있다
아는 사이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모르는 사이도 아닌
것이
우리에겐 지정석이 있었다 암묵적으로 합의한
저 녀석은 수업을 듣긴 하는 걸까?
밖에서만 온갖 고민을 다 풀어놓고
왜 강의실에 들어가는 꼴을 못 보는 건지
우리 학교 학생이 아니라면 진짜 어이없고 웃기겠다고
나는 내가 쓴 시를 찢고 휴지통에 버린다
문제는 간단하다 어느 날,
강의실에 하염없이 앉아 있던 나를 일으킨 사람은 4학
년 선배였다
우연히 네가 쓴 시를 읽었다고 다 좋은데 너는
'나는'을 참 많이 쓴다고
어떻게 문장마다 '나는'으로 시작하냐고
그것은 심각한 자의식과잉이니까
얼른 기존 습관을 버리고 새로운 주어를 사용하는 습
관을 들이라고
'나는'이 많이 나오면 시가 사변적으로 변한다고
조언인지 화풀이인지 모를 말만 다 하고 나가버렸다
다행히 그해 선배는 좋은 지면에 데뷔했다
모두가 축하해주었다
진심이 아닌 축하도 거기 섞여 있었다
[··· 중략 ···]
나는 머지않아 가을에 아름다운 교정의 분위기를 해치는
시인이 되려나
도서관에 들어가 한 시인의 시집을 몽땅 빌리거나
'나는'을 단 한 번도 쓰지 않은 시집 찾기를 시도하거나
교문 앞 분식집에서 다 먹은 꼬치를 품에 담아 오거나
그러면 장면이 될 수 있나
나로 시작하는 글쓰기도 지루하지 않게 해나갈 수 있나
나는 가을이어서 아름답다
조금 흠집이 난 나는 무릎 위에 미대생을 앉힌다
장면이 좋지 않느냐고 묻자 미대생은 조용히 불을 붙이고
경치가 아름답다고 말한다
실망한 나는 낙제된다
실바람만 부는데
다음 계절을 어찌 부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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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리 시인: 2020년 「그 웃음을 나도 좋아해」 외 55편으로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 시작.
시집 『그 웃음을 나도 좋아해』 『젖은 풍경은 잘 말리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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