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琉璃) 속을 번지다
유리(遊離)로 가라앉는 그림자
눈이 와서
눈이 와서
문득 하늘이 있다 막 퍼붓는
하늘을 쓰고 눈 쪽으로 사라지는 사람이 있다
잔가지에 쌓인 눈
위태롭고 안온해서 아름다운 눈을 어루며
미친 척 부는 바람이 있다
눈이 와서
문득
유리 안에 소파가 생겨나고
후우욱
긴 숨을 내쉬는
네가 생겨난다
유리(琉璃) 속을 번지다
유리(遊離)로 가라앉는 그림자
앞이나 뒤나 안이나 밖이나 온통
눈이 와서
오솔길은 뱀처럼 숲의 가슴을 파고들고
적송은 풍파 소리로 지나간다
< >
누구세요? 아 네, 아래층입니다 옆집 토
마토 열리는 중 무슨 일이죠? 시침 뚝 떼는 중 아저씨 제발
우리 아빠 좀 말려주세요 어린 토마토 겁에 질린 중 아,
토마토 혹은 지금
옆집 토마토들은 지금 전쟁 중 토마토가 토마토를 던지
는 중 퍽퍽퍽
토마토들 허방으로 날아가는 중 철퍼덕 뭉개지는 중 으
아아
어린 토마토 우는 중 쨍그렁 덩덩
어떤 토마토 산산조각 나는 중 시뻘건 속
흘러내리는 중 던져봐 던져봐
덜 익은 토마토는 악쓰는 중
땡,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래층 토마토 올라오는 중 딩동
초인종 누르는 중 누구세요? 아 네, 아래층입니다 옆집 토
마토 열리는 중 무슨 일이죠? 시침 뚝 떼는 중 아저씨 제발
우리 아빠 좀 말려주세요 어린 토마토 겁에 질린 중 아, 선
생님 많이 취하셨네 그만하시죠 아래층 토마토 빌붙는 중
당신 뭐야 뭔데 남의 집에 와서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거야
아, 요 아래층 토마톱니다 우리 집 토마토들이 잠을 못 자
서요 아래층 토마토 들이대는 중 거봐요, 무슨 망신이야
마누라 토마토 투덜대는 중 아래 위 토마토들 뭐라 뭐라
떠드는 중 미안합니다, 부탁합니다 아래층 토마토 뚜벅,
뚜벅뚜벅 계단으로 내려가는 중
그러나 옆집 토마토들 아직도 전쟁 중 무한정적의 토마
토 던지는 중
무한정적의 토마토 휙휙 날아다니는 중 뭉개지는 중
뭉개진 토마토 다시 뭉개며 무한정적의 거대한 토마토
속에서
부활하는 중
< >
문득 달려든 형광 빛도
천길 위에서 내려다보는 한 시선도
상관없다는 듯 그저
개미
첫새벽, 화장실 다녀오는 길에 보았다
어떤 묵언처럼
곰곰 지나가는 당신을
문득 달려든 형광 빛도
천길 위에서 내려다보는 한 시선도
상관없다는 듯 그저
가지런한 속도로 지나가고 계셨다
형용할 수 없는 쬐그만 얼굴로
털실 보푸라기 같은 다리로
끊어질 듯 가는 허리로
집채만 한 허공을 지시고
거대한 식탁의 자리를 지나
의자 다리를 돌아
내용 없는 상자의 긴 모퉁이를 돌아
바싹 마른 걸레 위 울퉁불퉁한 길을 힘겹게 지나
얽힌 전선들 사이로 난 끈적한 길을
다만 지나가고 계셨다
발소리 하나 없었다
한번 뒤돌아본 일도 없었다
어디에서 나와 어디로 가는 길이셨는지
눈 깜박할 사이 거대한 은빛 냉장고 밑으로 사라지셨다
잠결이었다
오줌 누러 갔다 오는 몇발짝 사이
어떤 미친 시간이 오토바이를 타고 굉음으로
달려가는 사이
글쎄 백년이 지났다고!
< >
혈압약을 먹고 아침을 먹을까
아침을 먹고 혈압약을 먹을까
뿌연 혈압약 같은 해가 또 도착했어
그래, 여긴 아직도 장마야
비를 과식한 쇠붙이들이 녹을 줄줄 게워내고 있어
하수구에는 녹물보다 먼저 도착한
껌 종 이, 우유 갑, 빈 요구르트 병, 굵고 가는 빨래들,
바람 빠진 콘돔 나부랭이 같은 것들이 물길을 막고 있어
길 잃은 물들이 건달처럼 빙빙 돌다가 어디 움푹한 곳에
모여서는
저희끼리 부글부글 끓다가 무슨 굉장한 모의라도 한 것
처럼 콰, 콰, 콸
기찬 웃음을 내뱉으며 더 낮은 곳을 찾아 곤두박질치는데
아침을 먹고 혈압약을 먹을까
혈압약을 먹고 아침을 먹을까
누가 비를 노래하고 있어
이 장마에, 누가 미친 듯 비를 부르고 있어
(봄비, 나를 울려주는 봄비 언제까지 내리려나아)
녹내가 진동하는데
나뭇잎이, 담벼락이, 녹내를 뒤집어쓰고
부슬부슬 삭아내리는데 아아
(봄비에 젖어서 길을 걸으면······)
누가, 녹내를 맛있게 끓이고 있어 끓는 녹내
속으로 뭔가 전속력으로 달려가고 있어
세상이 미치는 건 녹내 때문일지 몰라
밑도 끝도 없이 녹내를 만드는 이 긴 장마 때문일지 몰라
밤마다 캄캄하게 흘러내리는 시간들의 머리칼 때문일
지 몰라
그것들이 휘감고 흐르는 저 헤아릴 수 없는 나무, 길, 집,
전봇대
그래, 비는 이데아야
흙더미에 반쯤 묻힌 채 녹슬어 삭아가는 숟가락이야
흘러내리는 녹물을 웃음인 줄 알고 히히 웃다가
그만 주르르 흘러내리고 말 진흙 인형이야
귓구멍에 햄버거를 쑤셔넣으며 우적우적 걸어가는 아
이들이야
우우우 우우우----
진흙의 입으로 소리치면
소리에서 녹내가 나
더러운 악천후야 젠장,
번개가 번쩍 천둥이 꽈광 해도 별거 아니야
ET 같은 얼굴에 주름 몇 줄 더 만들며 떠는 호들갑일 뿐
이야
그래, 이제 여긴 더이상 플라토닉하지 않아
봄? 나무마다 중구난방 쥐뿔 같은 것이 터져나오는
알 수 없는 거리(距離)
헤아릴 수 없이 캄캄한 하룻밤
그리하여, 그 셀 수 없는 하룻밤과 하룻밤이 딥키스에
들 때
나는 곰곰 생각하지
혈압약을 먹고 아침을 먹을까
아침을 먹고 혈압약을 먹을까
< >
갈피 속의 영옥은 잠깐의 꾸바, 어느날의 광화문, 막 지
나가는 연신내,
부산, 대구, 비 추적대는 날의 왕릉,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늙은 의자,
어색한 술자리, 시 ······ 그 무엇보다
깊은 불치(不治)
영옥이라는 이름으로
영옥(影屋)이 도착한다 한권의 책으로
한쪽의 표지로 몇쪽의 갈피로, 옆인 듯 앞인 듯
휙 돌아보는 듯 희미하게 웃는 듯
볼이 통통한 영옥, 눈이 매혹적인 영옥, 머리칼이 칠흑
인 영옥
배경은 검은 숲, 회백색의 개울, 그 건너 뽀얀 몽돌밭
그러나 영옥은 어디 있나?
갈피 속의 영옥은 잠깐의 꾸바, 어느날의 광화문, 막 지
나가는 연신내,
부산, 대구, 비 추적대는 날의 왕릉,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늙은 의자,
어색한 술자리, 시 ······ 그 무엇보다
깊은 불치(不治)
영옥은 무엇인가?
맨발로 구만리 심해를 헤매는 눈먼 물고기?
바닥으로,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는 조약돌?
그 파문에 잠시 저희끼리 몸 비비는 물풀?
영옥은 도착한다 지금 막 없는 순환 열차를 타고 없는
역에 슬쩍 내려
장검(長劍)처럼 번쩍이는 햇살에 아득히 미간을 찡그리
고 있을 영옥은
일면식도 없는 아침
누군가 흘리고 간 손수건
나인 듯 너인 듯 그인 듯 그것인 듯 그 무엇인 듯 그 모든
것인 듯
나도 아니고 너도 아니고 그도 아니고 그 무엇도 아닌
그러나 그 무엇인 듯
키가 삼천척은 되는 저녁으로 붉은 치마를 펄럭이며
도. 착. 한. 다. 여기저기서
없는 영옥들이 늙은 아카시아나무 우듬지를 흔들며
아아아 아아아
말하기 시작할 때
< >
이경림 시인: 1989년 《문학과비평》으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 『토씨찾기』 『그곳에도 사거리는 있다』 『시절 하나 온다, 잡아먹자』 『상자들』 『내 몸속에 푸른 호랑이가 있다』 『급! 고독』. 산문집 『언제부턴가 우는 것을 잊어버렸다』 시론집 『사유의 깊이, 관찰의 깊이』 등의 저서가 있다.
지리산문학상, 윤동주서시문학상, 애지문학상 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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