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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에게도 잠자는 말이 있다
하얀 점이 커지고 작아지고 한다
그 말을 건드리는 마술이 어디에
분명히 있을 텐데
달나라의 돌
아라비아에 달나라의 돌이 있다
그 돌 속에 하얀 점이 있어
달이 커지면 점이 커지고
달이 줄어들면 점이 줄어든다*
사물에게도 잠자는 말이 있다
하얀 점이 커지고 작아지고 한다
그 말을 건드리는 마술이 어디에
분명히 있을 텐데
사물마다 숨어 있는 달을
꺼낼 수 있을 텐데
당신과 늪가에 있는 샘을 보러 간 날
샘물 속에서 울려나오는 깊은 울림에
나뭇가지에 매달린 눈[雪]이
어느새 꽃이 되어 떨어져
샘의 물방울에 썩어간다
그때 내게 사랑이 왔다
마음속에 있는 샘의 돌
그 돌 속 하얀 점이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 동안
나는 늪가에서 초승달이 되었다가 보름달이 되었다가
그믐달로 바뀌어간다
* 플리니우스의 말이라고 함.
헨리 데이비드 소로, 『달빛 속을 걷다』(조애리 옮김, 민음사, 2018) 참조
어머니는 달빛이 참 좋구나
막내 손이 약손이구나 하며
시원하게, 수줍게 웃음을 터뜨리셨다
달빛이 참 좋은 여름밤에
들일을 하고 식구들 저녁밥을 해주느라
어머니의 여름밤은 늘 땀에 젖어 있었다
한밤중 나를 깨워
어린 내 손을 몰래 붙잡고
등목을 청하던 어머니,
물을 한바가지 끼얹을 때마다
개미들이 금방이라도 부화할 것 같은
까맣게 탄 등에
달빛이 흩어지고 있었다
우물가에서 펌프질을 하며
어머니의 등에 기어다니는
반짝이는 개미들을
한마리씩 한마리씩 물오 씻어내던 한여름 밤
식구들에게 한번도 약한 모습 보이지 않던
어머니는 달빛이 참 좋구나
막내 손이 약손이구나 하며
시원하게, 수줍게 웃음을 터뜨리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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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불광사(佛光寺)
는 멀지 않다는데 잉어들은 새벽에 빛으로 가득한 상류에
알을 낳는 건지, 나는 그들의 밤 유영에서 영원을 보았다
불광천
천변을 거닐다가 밤잉어들을 보았다 낮에는 보지 못했던
잉어들을 밤에 보았다
천변의 벚꽃 길에서 멍하게 봄은 광선에 겨울의 질병 부
위를 쬐고 있다가 떨어져내리는 벚꽃들로 강물의 비늘이 되
었다 밤잉어들은 비늘과 지느러미, 두 단어로 왔다
잉어들은 처음엔 소리로 다가왔다 사진기 셔터를 찰칵찰
칵 누르듯이 지느러미를 털며 회귀하는 소리가 귀로 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여기까지 오려면 한강과 경계에 있는 시멘트 보를 뛰어넘
어야만 한다는데 밤에 상류로 올라가는 건 수초에 알을 낳
기 위해서라는데
보의 난간을 뛰어넘으려고 지느러미가 파닥거릴 때마다
물고기 배에 피멍이 드는 환영이 내 눈에 찍히고 있었다 밤물
결 속에서 수천의 비늘이 튀어올랐다 여기서 불광사(佛光寺)
는 멀지 않다는데 잉어들은 새벽에 빛으로 가득한 상류에
알을 낳는 건지, 나는 그들의 밤 유영에서 영원을 보았다
잉어들이 상류로 올라가고 나는 반대로 한강을 향해 내
려가는데, 기슭에선 물결에 얼비치는 벚꽃 비린내를 부리로
건져내며 오리 한마리가 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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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무새도 개처럼 산책을 시키고
가끔은 날려주어야 한다고 사내는 구경하는 사람들에게
말을 한다
홍금강앵무가 뛰듯이 강을 향해 나아갔다가 공중을 한바
퀴 돌고
교각
교각은 나날이 튼튼해져간다
사내의 잠으로 떠받쳐진 교각 위 도로로
자동차들은 새벽이면 더 날쌔지고 미끈해진다
물고기들은 자신의 속력을 주체하지 못해
물 위로 힘껏 뛰어올랐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강물에서는 정말로 용수철 튕기는 소리가 난다
팅팅, 교각 아래 사내의 잠은
불안하게 긴장되어 있다
처음엔 교각 아래에서 자는 사내의 잠이 평온해 보였다
강물이 사내의 잠에도 공평하게 흘러가는 듯 보였다
어느날부터 교각의 벽에 조금씩 변화가 생겨났다
처음엔 주워 온 듯한 낡은 자전거가 받쳐져 있었다
그러고 얼마 뒤부터 짐받이에 박스가 올려지기 시작했다
사내의 머리맡에도 변화가 생긴다
비닐봉지에 감자가 몇알 담겨 있었는데
며칠이 지나도 감자의 개수가 줄지 않았다
때때로 사내의 곁을 지나며 비닐봉지에서 감자 싹이 터서
사내의 잠을 감고 교각의 벽면을 타고 올라가는 생각에
빠지곤 했다
그러나 나는 사내가 한번도 잠에서 깨어난 것을 본 적이 없다
나는 산책을 나올 때마다 사내 곁을 스쳐간다
여전히 낡은 자전거는 교각의 벽에 기대어 있고
짐받이엔 박스가 점점 더 높게 쌓여간다
사내의 머리맡에도 점점 더 많은 물건이 쌓여간다
날이 무더워지기 시작하자
사내의 머리맡엔 수박이 반통 랩에 싸여 있다
랩에 덮여 더 붉게 보이는 쪼개진 수박의 붉은 속살이
사내의 잠을 더욱 동물적으로 느껴지게 한다
나는 사내를 스쳐서 강을 향해 걸어간다
점점 더 강이 넓어지고 풀밭이 나오고 저녁이 오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나는 홍금강앵무를 날리는 또다른 사내와 마주쳤다
앵무새도 개처럼 산책을 시키고
가끔은 날려주어야 한다고 사내는 구경하는 사람들에게
말을 한다
홍금강앵무가 뛰듯이 강을 향해 나아갔다가 공중을 한바
퀴 돌고
사람들의 머리 위를 스치듯이 지나 사내의 손에 다시 내
려앉는다
헉헉 숨을 내쉬는 스프린터가 결승 테이프를 끊는 듯한
새의 비행(飛行)을 보며 구경꾼들은 탄성을 지른다
새에겐 공중을 나는 시간만 있을 뿐이지
땅에 내려앉는 공간 같은 건 없는 것 아닌가.
나는 그 순간 홍금강앵무의 화려한 비행을
그러나 그것은 홍금강앵무의 색깔보다 더한 내 정신의 채
색과 허영일 뿐
내 몸은 벌써 저 건너 강변에 커지는 마천루의 별빛에 별
빛보다 빠르게 반응한다
멀리 나갔던 강변에서 돌아오는 길에
교각 밑에서 잠을 자는 사내의 곁을 다시 지나간다
교각의 벽면이 노을을 받아 번지고 있다
곤충채집판처럼 교각의 벽면에 노을이
사내의 기억을 압핀으로 꽂아서 물들일 것 같다
염천에 더 질긴 그리움으로 생생해지는 능소화의 그림자
같은
노을이 교각의 벽면에 잠시 머물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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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나무로 만든 도마
우리 집 여자라면
한번쯤 단단히 스쳐갔을
칼집 난 자리가
집안의 손금이 되어버린
백년 도마
백년 도마
도마가 그립다
이제 아무도 살지 않는
고향 집 부엌에
도마는 여전히 거기 있을까
감나무로 만든 도마
우리 집 여자라면
한번쯤 단단히 스쳐갔을
칼집 난 자리가
집안의 손금이 되어버린
백년 도마
다른 건 몰라도
생명선은 길어서
그대로 있을지 몰라
가마솥에 밥물이 끓어 넘치면
솥뚜껑을 열어젖히고
뭉텅뭉텅 김치를 썰어
척척 밥에 감아 먹던
치매 할머니와
얼굴 한번 못 보고
시집와선
눈썹과 눈썹이 달라붙은
신랑이 미워 첫날밤에
양미간의 눈썹을 뜯어 넓혔다는
어머니의 매운 손매와
김칫독에서 막 꺼낸
살얼음 낀 김치를 썰 때
도마에서 나던
초겨울의 소리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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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준 시인: 199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 『빵냄새를 풍기는 거울』 『물속까지 잎사귀가 피어 있다』 『춤』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 『불탄 집』 『줄무늬를 슬퍼하는 기린처럼』.
산문집 『저녁의 무늬』 『아름다움에 허기지다』. 평론집 『침묵의 음』 등이 있다.
현대시학작품상, 소월시문학상, 육사시문학상, 유심작품상, 풀꽃문학상 대숲상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