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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어둠 위에 어둠을 껴입고
괜찮아 괜찮아, 늙은 개를 타일러
새 꽃병을 사러 간다
굴뚝의 기분
너는 꽃병을 집어 던진다
그것이
망가질 대로 망가진 네 삶이라는듯이
정오
너는 주저앉고
보란 듯이 태양은 타오른다
너는 모든 것이 너를 조롱하고 있다고 느낀다
의자가 놓여 있는 방식
달력의 속도
못 하나를 잘못 박아서 벽 전체가 엉망이 됐다고
그러거나 말거나
너의 늙은 개는 집요하게 벽을 긁고 있다
거긴 아무것도 없어
칼을 깎는 사과는 없어
찌르면 찌르는 대로
도려내면 도려내는 대로
우리는 살아가야 하고
얼굴은 빗금투성이가 되겠지
돌이켜보면 주저앉는 것도 지겨워서
너는 어둠 위에 어둠을 껴입고
괜찮아 괜찮아, 늙은 개를 타일러
새 꽃병을 사러 간다
깨어진 꽃병이 가장 찬란했다는 것을 모르고
심장에 기억의 파편이
빼곡히 박힌 줄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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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한 것보다 훨씬 눈부신 집이었다
우리는 한달음에 달려가 입구에 세워진 팻말을 보았다
가장 사랑하는 것을 버리십시오
한 사람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면벽의 유령
여름은 폐허를 번복하는 일에 골몰하였다
며칠째 잘 먹지도 않고
먼 산만 바라보는 늙은 개를 바라보다가
이젠 정말 다르게 살고 싶어
늙은 개를 품에 안고 무작정 집을 나섰다
책에서 본 적 있어
당나귀와 함께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기도*
빛이 출렁이는 집
다다를 수 있다는 믿음은 길을 주었다
길 끝에는 빛으로 가득한 집이 있었다
상상한 것보다 훨씬 눈부신 집이었다
우리는 한달음에 달려가 입구에 세워진 팻말을 보았다
가장 사랑하는 것을 버리십시오
한 사람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늙은 개도 그것을 보고 있었다
누군가는 버려져야 했다
기껏해야 안팎이 뒤집힌 잠일 뿐이야
저 잠도 칼로 둘러싸여 있어
돌부리를 걷어차면서
다다를 수 없다는 절망도 길을 주었다
우리는 벽 앞으로 되돌아왔다
아주 잠깐 네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늙은 개를 쓰다듬으며
나는 흰 벽에 빛이 가득한 창문을 그렸다
너를 잃어야 하는 천국이라면 다시는 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 프랑시스 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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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은 울상을 하고서
얼마 전부터 흰토끼 한마리가 보이질 않는다고 했다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온전히 나를 잃어버리기 위해 걸어갔다
언덕이라 쓰고 그것을 믿으면
예상치 못한 언덕이 펼쳐졌다
그날도 언덕을 걷고 있었다
비교적 완만한 기울기
적당한 햇살
가호를 받고 있다는 기쁨 속에서
한참 걷다보니 움푹 파인 곳이 나타났다
고개를 들자 사방이 물웅덩이였다
나는 언덕의 기분을 살폈다
이렇게 많은 물웅덩이를 거느린 삶이라니
발이 푹푹 빠지는 여름이라니
무엇이 너를 이렇게 만든 거니
언덕은 울상을 하고서
얼마 전부터 흰토끼 한마리가 보이질 않는다고 했다
그뒤론 계속 내리막이었다
감당할 수 없는 속도로 밤이 왔다
언덕은 자신에게
아직 토끼가 많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지만
고요 다음은 반드시 폭풍우라는 사실
여름은 모든 것을 불태우기 위해 존재하는 계절이라는 사실도
모르지 않았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토끼일까
쫓기듯 쫓으며
나는 무수한 언덕 가운데
왜 하필 이곳이어야 했는지를 생각했다
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어떤 시간은 반으로 접힌다
펼쳐보면 다른 풍경이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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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언제나 같은 자리를 맴도네
그를 이끄는 것은 발이 아니라네
누군가의 마지막 숨
놓을 수 없는 시간이 그의 손에 들려 있어서
풍선 장수의 노래
그가 걸어오네
양손 가득 풍선을 들고
"저기 풍선 장수가 나타났다!"
아이들은 앞다투어 몰려들지만
그가 풍선을 파는 법은 없네
"이 황금과 맞바꿉시다"
"원한다면 내 집이라도 내어드리리다"
그의 풍선은 너무 아름다워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키지만
그는 오직 노래만 한다네
텅 빈 하늘을 향해
죽음의 천사여 나는 당신이
이 땅에서 거두어가지 못한 것을
쥐고 있다네
그의 목소리가 허공으로 울려 퍼질 때
풍선들은 고갯짓하며 장단을 맞추네
마치 그 안에 영혼이라도
담긴 것처럼
그는 언제나 같은 자리를 맴도네
그를 이끄는 것은 발이 아니라네
누군가의 마지막 숨
놓을 수 없는 시간이 그의 손에 들려 있어서
죽음의 천사여
여기 담긴 것은 공기가 아니라네
먼 곳의 바람도 비밀도 아니라네
종양을 주렁주렁 매단 나무처럼
그 풍경은 너무나 아름다워
보는 이를 눈물짓게 한다네
그의 발끝은 언제나 조금 들려 있네
금방이라도 죽음에 빨려들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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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고 일어나면 어김없이
열매들은 터지고 갈라져 있다
여름이 내 머리 위에 깨뜨린 계란 같았다
열과(裂果)
이제는 여름에 대해 말할 수 있다
흘러간 것과 보낸 것은 다르지만
지킬 것이 많은 자만이 문지기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문지기는 잘 잃어버릴 줄 아는 사람이다
그래, 다 훔쳐가도 좋아
문을 조금 열어두고 살피는 습관
왜 어떤 시간은 돌이 되어 가라앉고 어떤 시간은
폭풍우가 되어 휘몰아치는지
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솔직해져야 했다
한쪽 주머니에 작열하는 태양을, 한쪽 주머니엔 장마를 담고 걸었다
뜨거워서 머뭇거리는 걸음과
차가워서 멈춰 서는 걸음을 구분하는 일
자고 일어나면 어김없이
열매들은 터지고 갈라져 있다
여름이 내 머리 위에 깨뜨린 계란 같았다
더럽혀진 바닥을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여름은 다시 쓰일 수 있다
그래, 더 망가져도 좋다고
나의 과수원
슬픔을 세는 단위를 그루라 부르기로 한다
눈앞에 너무 많은 나무가 있으니 영원에 가까운 헤아림이 가능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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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연의 세 번째 시집,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에서 지속적으로 들려주는 '여름' 이야기는 조곤조곤 슬픔을 겹쳐 놓는다. 그의 시를 읽다보면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슬픔을 담담히 마주하며 걸어가는 사람과 만나게 된다.
작가 소개는 본 블로그 <안희연 시인의 시>편을 참조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