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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시인들

■ 김유자 시인의 시 ■ 덜그럭거리는 숲 & 백야라는 부사 & 식탁의 다리 & 물고기의 가역반응 & 슈만의 구두 가게

by 시 박스 2024. 5.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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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구두가 예뻐

<  >

 

 

책상은 서랍을 빼물고 덜걱거린다

  당신은 나를 꺼낸다

  물고리 없는 숲이 펼쳐진다

 

덜그럭거리는 숲

 

 

 

  서랍 속에 누워 있다

  밤을 좋아하지만 밤은 계속 밤이다

  서랍 속에는 문고리가 없다

 

  덜그럭거리는 심장

  열리지 않는 숲

 

  밖에선 어떤 일이 일어날까

  나 없는 세계는 이야기일 뿐

  나 있는 세계도 여기에선 이야기여서

 

  울창한 그림자에 담겨 나는

  하늘을 떠올린다 구름이 게으르게 흐르고 바람이 내려앉지 못하고

  별들은 시린 발을 꼼지락거리고

  구름과 땅을 비가 꿰맬 때

 

  당신은 책상 위에 시침처럼 엎드려 있다

  여전히 밤인데도

  당신의 심장이 문을 두드린다

 

  눈 덮인 숲에서 나무들이 컹컹 짖고

  눈처럼 먼지가 날아오르고

  하늘이 흔들리고 새들이 떨어져 내리고

  나는 쓸려 가지 않으려 이야기를 힘주어 붙든다

 

  책상은 서랍을 빼물고 덜걱거린다

  당신은 나를 꺼낸다

  물고리 없는 숲이 펼쳐진다

  <  >

 

 


만일,
  만약에,
  혹시, 라는 말들에는
  사라지지 않는 윤곽이 있다
  백야가 있다 그리하여

 

백야라는 부사

 

 

 

  세상의 윤곽을 지우지 못해

  뒷골목에서 얼굴을 묻고 주저앉은 곳

  시계가 없어 밤을 만날 수 없는

  

  여기까지 왜 왔나 6월의

  늙은 침대와 한 덩어리 어둠인 나를

  바라보는 눈이 있다

  

  결정 뒤에 나는 언제나 어스름이었다

  만일,

  만약에,

  혹시, 라는 말들에는

  사라지지 않는 윤곽이 있다

  백야가 있다 그리하여

  떠오르지도 가라앉지도 않는 지평선에 누워

 

  눈 감으면 여기는

  나를 더듬고 있는 나, 여서

 

  오래 희미한 곳

  잘 지워지지 않는 곳

  <  >

 

 

 화르르 공중에 뜬 수저들이 숨을 멈춘 동안

  식탁보가 절단한 다리에서 무수한 다리가 꿈틀대고

 

식탁의 다리

 

 

 

  하얀 식탁보를 보면 들춰 보고 싶다

  엄마의 치마 속처럼

  

  두 개의 다리

  네 개의 다리 여섯 개의 다리가 있고

  떨리는 한 개의 다리가 막혀 있는 공기를 흩트린다

  은밀하게 격렬하게

 

  식탁 위에 제초제

  식탁 위에 나체

  식탁 위에 시체가 있어도

  놀랍지 않았는데

 

  엄마의 뺨 맞는 소리

  심장이 타오르는 냄새

  화르르 공중에 뜬 수저들이 숨을 멈춘 동안

  식탁보가 절단한 다리에서 무수한 다리가 꿈틀대고

 

  식탁의 다리는 어디까지 가나

  두 개의 다리는 백 년을 걷고 있고

  백 년 속에는 몇 개의 다리가 물 위에 걸쳐 있다

  맞은 편의 당신과 문득

  같은 접시 위에서 젓가락이 마주친다

 

  식탁보를 들춰 본다

  어디 숨었나 식탁의 다리는 여전히

  엄숙하다 벌어져 있다

  내 몸이 식탁보 속으로 끌려들어 간다 이곳은

  뚜껑이 덮인 세계

 

  천장이 손에 닿고 맥박이 눈처럼 쌓이고

  차오는 숨소리가 젖은 화선지처럼 얼굴을 뒤덮는다

  <  >

 

 

 내 몸이 뜨거워졌다 잡혀 올라온 물고기처럼
슴이 펄떡거렸다 나는 몰려든 아이들 뒤에 있었다

 

물고기의 가역반응

 

 

 

  외삼촌이 청첩장을 주고 가셨다

  그 애의 결혼식은 없다

 

  네가 그랬니?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이들이 네가 

썰매 태웠다던데?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왼쪽 볼이 겨

울 저수지처럼 딱딱해져 갔다

 

  그 애는 죽었다

 

  얼어붙은 저수지에서 아이들이 썰매를 타고 있었다 그

애에게 무릎을 쪼그려 앉게 하고, 앞에서 나는 그 애의 손

을 잡았다, 달렸다, 신난다, 그 애의 소리가 들렸다, 더 빨

리 달렸다, 얼어붙은 물결이 화난 물고기의 지느러미 같았

다 물결에 걸려 그 애가 넘어졌다 꽃잎, 꽃잎, 꽃잎, 얼음

위에 피가 스며들었다 손톱 속 봉숭아 물처럼

 

  그 애는 죽을 것임에 틀림없다

 

  사방에서 아이들이 비명을 질렀다 어른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나는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흰 얼음 위에 피가 섬

뜩했지만 내 몸이 뜨거워졌다 잡혀 올라온 물고기처럼 가

슴이 펄떡거렸다 나는 몰려든 아이들 뒤에 있었다

 

  나는 집에 있었다

  나는 저수지에 간 적이 없다

 

  그 애는 죽을지도 모른다

 

  네가 여섯 살인가? 그 애가 네 살 때 이마가 찢어져 여

덟 바늘이나 꿰맸잖니 기억 안 나? 너랑 저수지에 갔던 그

날 말야 다행히 가로로 찢어져 이젠 흉터도 잘 안 보여 외

삼촌 말에 내 왼쪽 볼이 지느러미를 쫙 폈다

  <  >

 

 

물고기 눈동자 같은

  잠자리 날개의 구멍들 같은

  거미줄에 걸린 태양 같은 당신의 마지막 구두,

 

슈만의 구두 가게

- 죽음이 찾아온 그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마지막 악보가 손수건처럼 흔들리고 있었네

 

 

 

  발바닥은 눈 뜨고 무슨 생각을 할까 잠든 물고기처럼

  늙은 슈만이 악보 속을 맨발로 걸어 다닐 때

  물결에 밀려온 구두들

  구두에 내 발을 넣어 보네

  빨간 구두가 예뻐 검은 구두는 발에 맞지 않아

  하이힐 플랫슈즈도 좋지만

  물고기 눈동자 같은

  잠자리 날개의 구멍들 같은

  거미줄에 걸린 태양 같은 당신의 마지막 구두,

  신어 보지 않아도 내 발이 콧김을 휭휭 내뿜네

  모래밭을 달려가네, 귓속으로 파고드는 태양의 허밍들

  수평선을 끌어당기네, 허밍을 터트리는 파도들

  날뛰던 내가 물속으로 서서히 가라앉을 때

  태양이 떨어져 내리는 지붕 위에서 슈만은 톱 악기를 꺼내 드네

  활을 긋자, 발과 가락과 톱은 서로 껴안고

  서로 떠밀며 한 발자국 두 발자국

  떠오르고 있네

  <  >

 

 

김유자 시인: 2008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고백하는 몸들』 『너와 나만 모르는 우리의 세계』가 있다.
제18회 한국시인협회 젊은시인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