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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은 서랍을 빼물고 덜걱거린다
당신은 나를 꺼낸다
물고리 없는 숲이 펼쳐진다
덜그럭거리는 숲
서랍 속에 누워 있다
밤을 좋아하지만 밤은 계속 밤이다
서랍 속에는 문고리가 없다
덜그럭거리는 심장
열리지 않는 숲
밖에선 어떤 일이 일어날까
나 없는 세계는 이야기일 뿐
나 있는 세계도 여기에선 이야기여서
울창한 그림자에 담겨 나는
하늘을 떠올린다 구름이 게으르게 흐르고 바람이 내려앉지 못하고
별들은 시린 발을 꼼지락거리고
구름과 땅을 비가 꿰맬 때
당신은 책상 위에 시침처럼 엎드려 있다
여전히 밤인데도
당신의 심장이 문을 두드린다
눈 덮인 숲에서 나무들이 컹컹 짖고
눈처럼 먼지가 날아오르고
하늘이 흔들리고 새들이 떨어져 내리고
나는 쓸려 가지 않으려 이야기를 힘주어 붙든다
책상은 서랍을 빼물고 덜걱거린다
당신은 나를 꺼낸다
물고리 없는 숲이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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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만약에,
혹시, 라는 말들에는
사라지지 않는 윤곽이 있다
백야가 있다 그리하여
백야라는 부사
세상의 윤곽을 지우지 못해
뒷골목에서 얼굴을 묻고 주저앉은 곳
시계가 없어 밤을 만날 수 없는
여기까지 왜 왔나 6월의
늙은 침대와 한 덩어리 어둠인 나를
바라보는 눈이 있다
결정 뒤에 나는 언제나 어스름이었다
만일,
만약에,
혹시, 라는 말들에는
사라지지 않는 윤곽이 있다
백야가 있다 그리하여
떠오르지도 가라앉지도 않는 지평선에 누워
눈 감으면 여기는
나를 더듬고 있는 나, 여서
오래 희미한 곳
잘 지워지지 않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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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르르 공중에 뜬 수저들이 숨을 멈춘 동안
식탁보가 절단한 다리에서 무수한 다리가 꿈틀대고
식탁의 다리
하얀 식탁보를 보면 들춰 보고 싶다
엄마의 치마 속처럼
두 개의 다리
네 개의 다리 여섯 개의 다리가 있고
떨리는 한 개의 다리가 막혀 있는 공기를 흩트린다
은밀하게 격렬하게
식탁 위에 제초제
식탁 위에 나체
식탁 위에 시체가 있어도
놀랍지 않았는데
엄마의 뺨 맞는 소리
심장이 타오르는 냄새
화르르 공중에 뜬 수저들이 숨을 멈춘 동안
식탁보가 절단한 다리에서 무수한 다리가 꿈틀대고
식탁의 다리는 어디까지 가나
두 개의 다리는 백 년을 걷고 있고
백 년 속에는 몇 개의 다리가 물 위에 걸쳐 있다
맞은 편의 당신과 문득
같은 접시 위에서 젓가락이 마주친다
식탁보를 들춰 본다
어디 숨었나 식탁의 다리는 여전히
엄숙하다 벌어져 있다
내 몸이 식탁보 속으로 끌려들어 간다 이곳은
뚜껑이 덮인 세계
천장이 손에 닿고 맥박이 눈처럼 쌓이고
차오는 숨소리가 젖은 화선지처럼 얼굴을 뒤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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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이 뜨거워졌다 잡혀 올라온 물고기처럼
가슴이 펄떡거렸다 나는 몰려든 아이들 뒤에 있었다
물고기의 가역반응
외삼촌이 청첩장을 주고 가셨다
그 애의 결혼식은 없다
네가 그랬니?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이들이 네가
썰매 태웠다던데?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왼쪽 볼이 겨
울 저수지처럼 딱딱해져 갔다
그 애는 죽었다
얼어붙은 저수지에서 아이들이 썰매를 타고 있었다 그
애에게 무릎을 쪼그려 앉게 하고, 앞에서 나는 그 애의 손
을 잡았다, 달렸다, 신난다, 그 애의 소리가 들렸다, 더 빨
리 달렸다, 얼어붙은 물결이 화난 물고기의 지느러미 같았
다 물결에 걸려 그 애가 넘어졌다 꽃잎, 꽃잎, 꽃잎, 얼음
위에 피가 스며들었다 손톱 속 봉숭아 물처럼
그 애는 죽을 것임에 틀림없다
사방에서 아이들이 비명을 질렀다 어른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나는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흰 얼음 위에 피가 섬
뜩했지만 내 몸이 뜨거워졌다 잡혀 올라온 물고기처럼 가
슴이 펄떡거렸다 나는 몰려든 아이들 뒤에 있었다
나는 집에 있었다
나는 저수지에 간 적이 없다
그 애는 죽을지도 모른다
네가 여섯 살인가? 그 애가 네 살 때 이마가 찢어져 여
덟 바늘이나 꿰맸잖니 기억 안 나? 너랑 저수지에 갔던 그
날 말야 다행히 가로로 찢어져 이젠 흉터도 잘 안 보여 외
삼촌 말에 내 왼쪽 볼이 지느러미를 쫙 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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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 눈동자 같은
잠자리 날개의 구멍들 같은
거미줄에 걸린 태양 같은 당신의 마지막 구두,
슈만의 구두 가게
- 죽음이 찾아온 그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마지막 악보가 손수건처럼 흔들리고 있었네
발바닥은 눈 뜨고 무슨 생각을 할까 잠든 물고기처럼
늙은 슈만이 악보 속을 맨발로 걸어 다닐 때
물결에 밀려온 구두들
구두에 내 발을 넣어 보네
빨간 구두가 예뻐 검은 구두는 발에 맞지 않아
하이힐 플랫슈즈도 좋지만
물고기 눈동자 같은
잠자리 날개의 구멍들 같은
거미줄에 걸린 태양 같은 당신의 마지막 구두,
신어 보지 않아도 내 발이 콧김을 휭휭 내뿜네
모래밭을 달려가네, 귓속으로 파고드는 태양의 허밍들
수평선을 끌어당기네, 허밍을 터트리는 파도들
날뛰던 내가 물속으로 서서히 가라앉을 때
태양이 떨어져 내리는 지붕 위에서 슈만은 톱 악기를 꺼내 드네
활을 긋자, 발과 가락과 톱은 서로 껴안고
서로 떠밀며 한 발자국 두 발자국
떠오르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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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자 시인: 2008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고백하는 몸들』 『너와 나만 모르는 우리의 세계』가 있다.
제18회 한국시인협회 젊은시인상 수상.